< 72 : 두 가지 갈림길에서 >
한편 그 시각.
한광표 회장은 자식들을 불러 모아놓고 회의 중이었다.
유종범 회장과 틀어져서일까.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 종범이 그놈이 내게 반기를 들었어. 유종범이 그놈이…! 평생 내 뒤에서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던 그놈이 감히…!"
"회장님, 참으세요. 유종범 회장은 결국 후회하게 될 겁니다."
"무슨 수로? 대한화학이 그 지경이 됐는데 무슨 수로!"
역정을 내는 한광표 회장.
일렉트론 화재 사고 이후로 대한화학 역시 하한가를 맞았기에 그의 심기는 꼬일 대로 꼬인 상태인 것이다.
"동준이 니 말을 듣고 물적분할 계획을 맡겼다. 그런데 결과가 이게 뭐냐? 손해를 만회하기는커녕 더 크게 잃게 생겼어!"
대한화학이 NMC배터리를 유일자동차에 납품할 때, 매출 뻥튀기를 위해서 저품질의 배터리를 대량으로 공급했었다.
단순히 실적 부풀리기를 통해서 대한화학 배터리사업부를 분사, 물적분할을 통해 주식을 팔아 하한가를 맞은 대한화학의 손실을 메꾸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일렉트론 화재 사고로 인해 그동안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배터리 불량으로 인해 전량 리콜 처분이 될 터라 해당 생산분은 모조리 폐기 예정이었고, 이는 모조리 손실로 기록되게 생겼다.
게다가 이로 인한 소송까지 따지면… 대한화학은 이번 일로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게 된 것이다.
"너를 믿고 전적으로 일을 맡겼지만, 솔직히 이번 일은 실망이다. 납품을 하더라도 불량률은 잡았어야지!"
한동준의 계획을 승인하고 밀어준 것은 아버지다.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짜증이 났지만, 그보다는 한광표 회장의 분노에 한동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은 채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프로였으니까.
"… 맞습니다. 불량률을 잡지 못한, 사고가 일어날 것까지 고려하지 못한 제 실수입니다. 그리고 네뷸라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도 사실이구요."
"잘못을 인정하면 이 일이 해결돼!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거 아니야!"
"문제를 바로잡는 첫 번째 단추는 잘못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문제의 원인을 알았으니, 고쳐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한동준을 보며 한광표 회장의 화가 누그러졌다.
"…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일단 네뷸라를 인정해야 합니다."
"네뷸라를 인정해?"
"예. 전고체배터리 사업에서 네뷸라 케미컬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깨끗하게 인정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그럼 다음은?"
"전고체배터리 사업에서 네뷸라를 이길 수 없다면, 제2의 솔리드스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면… 그냥 솔리드스타를 우리 걸로 만들면 됩니다."
"솔리드스타를 우리 걸로…?"
둘째 아들의 말에 한광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하자는 말이구나."
"예, 회장님."
"어떻게 인수할 건데?"
"이정우 대표 조사해보니까 뒷배가 없습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평범한 직장인이자 서민이었죠. 그런 그가 성운이노베이션을 인수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코인 때문입니다."
"코인… 그 얘기라면 들어서 알고 있다. 코인으로 꽤 돈을 벌었다지?"
"예. 하지만 그래봤자 한두 푼이고, 성운이노베이션 인수하고 솔리드스타 사업하면서 돈 다 썼을 겁니다. 성운이노베이션 인수 자금이 1,100억원 가량 된다고 하더군요."
"오호… 그럼 지금 돈이 없다?"
"그렇습니다. 솔리드스타 공장을 늘리느라 돈이 바닥났을 확률이 99%입니다."
한동준은 자신 있게 얘기했다.
"그런데 회장님, 뭔가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지금 네뷸라와 관련된 기사가 계속 나오는 것에 대해서요."
"냄새가 나긴 하지."
"저는 얘네가, 돈이 바닥난 이정우 대표가 노리는 다음 수가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한광표 회장이 눈을 번쩍 떴다.
"… 상장!"
"그렇죠. 네뷸라는 지금 상장을 노리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상장을 하게 되면 수단이 많아지죠. 주식을 팔아도 되고,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도 있구요."
"음… 너는 그럼 네뷸라가 상장했을 때 주식 대량 매입을 통해 인수하자는 얘기냐?"
"예, 맞습니다."
"너무 무모해."
진지하게 듣던 한광표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네뷸라의 가치는 이미 시장을 통해 증명되었어. 전기차 회사든, 배터리 회사든, 아니면 그저 돈이 많은 놈들이든, 무조건 네뷸라의 지분을 확보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란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수를 한다고? 어림도 없다."
작은 거인은 냉철했다. 그는 네뷸라가 시장에서 가지는 가치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동준은 달랐다.
"회장님 말씀대로 네뷸라의 가치는 한두 푼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회사의 가치를 떨어트려야지요."
"가치를 떨어트린다? 무슨 수로?"
"지금 네뷸라가 비싼 이유는 전세계 유일무이한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상징성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음…!"
"우리도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했다고 발표하는 겁니다."
"… 우리가 그런 기술력이 있나? 처음 듣는 얘긴데."
"왜 없습니까. 만들려면 만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상용화가 어려워서 그렇죠."
"모르쇠로 가자는 거군."
"예. 어차피 우리 목표는 네뷸라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인수하는 거니까요"
획기적인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엔 문제가 있었다.
바로 거짓으로 전고체배터리를 개발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기 혐의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한동준 사장은 지금 불법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점을 알기에 한동준 사장의 획기적인 주장에도 한광표 회장은 쉬이 수긍하지 못했다.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지면 어떡하려고. 자칫 잘못하면 사기죄로 줄줄이 엮여서 골치 아파져."
"사기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주장하는 건 전고체배터리를 개발했다는 거지, 상용화 가능한 단계의 전고체배터리를 개발했다는 의미가 아니니까요."
"… 나중에라도 빠져나갈 구석은 만들어놓겠다라…."
고민에 잠긴 한광표 회장.
한동준이 한마디 덧붙였다.
"회장님, 아니 아버지. 네뷸라 케미컬을 인수할 기회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성장해서 자금줄마저 탄탄해져버리면 공략할 약점이 사라질 거예요. 지금이 적기입니다."
둘째 아들의 말이 맞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인 네뷸라다. 지금처럼 성장한다면 대한화학은커녕, 전세계 배터리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이를 그냥 눈 뜨고 내버려 둔다?
네뷸라에게 시장을 그냥 내어주자는 말과 동일했다.
결국 한광표 회장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이렇게 된 이상 네뷸라를 먹어야만 우리가 사니 어쩔 수 없군. 알겠다. 진행해봐."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지만 이를 위해선 판이 더 깔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장만 해서는 신뢰도가 낮아요."
"그럼 어쩌려고?"
"내연기관 자동차 회사들. 그들을 끌어들입시다."
"내연기관 자동차 회사들이라면, 도요타나 독일 3사를 말하는 거냐?"
"예. 걔네들이 우리를 지지해주면 발언에 힘이 실릴 겁니다."
"… 좋다. 내가 그쪽 회장들과 연이 있으니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마."
"감사합니다. 회장님."
한광표 회장의 승낙에 한동준 사장이 미소지었다.
하지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한성준 사장은 회의적이었다.
"아버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제가 만나본 이정우 대표는 회사 상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걸로 보였는데요."
한성준 사장의 태클에 한동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형한테 굳이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 속내를 누가 알겠어?"
"너 말 잘했어. 근데 말 나온 김에 얘기해보자. 너는 이정우 대표를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상장을 확신하는 거냐? 그리고 거짓으로 전고체배터리를 개발했다고 발표하자고? 그러다 일본 엘피다 꼴이 날 거야. 너무 위험해."
일본 D램 반도체 생산 기업인 엘피다는 업계에서 '양치기 소년'으로 통했다. 반도체 업계에 60나노공정이 표준이던 시절, 60나노 공정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30나노 공정 개발이 완료될 거라고 허풍을 쳐서 주가를 끌어올렸다가, 진성이 30나노공정 상용화를 발표하면서 주가 상승분을 고스란히 반납한 채 짓밟혔던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망신이었으니까.
이런 엘피다 사건 외에도 업계에서는 소위 말하는 '뻥카'가 꽤 있는 편이다. 허장성세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이용한달까. 하지만 그걸 통해 얻은 결과물은 모래성과 같아서 거짓이 밝혀졌을 때 항상 그 배 이상 도로 토해내야만 하기에, 발표에 허위 사실을 담는 건 매우 리스크가 있는 행동이었다.
한성준은 이 점을 지적한 것인데, 의도와 달리 한동준은 신중한 형을 보며 비웃을 뿐이었다.
"그걸 굳이 만나봐야만 아나? 사업가라면 돈이 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 네뷸라의 행보를 봐. 기가테네시 공장을 세운답시고 미국 DOE 지원 사업으로 받은 수조 원을 퍼붓고 있어. 국내에서도 기흥에 솔리드스타 생산 공장을 짓는다고 돈을 때려 박고 있고. 이런 상황인데 자금 조달을 위해서라도 상장은 당연한 거지. 그리고 엘피다? 웃기지 마.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우리도 전고체배터리가 있어. 상용화만 어려울 뿐이지 거짓이 아니라니까."
"… 그런가. 알겠다.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절대 한마디도 지지 않는 동생을 보며 결국 한성준은 한발 물러서고야 말았다.
하지만 왜일까. 그의 머릿속에 당당하고 유쾌하던 이정우 대표가 떠오르며, 왠지 대한화학이 엘피다 꼴이 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한성준 사장을 옥죄었다.
네뷸라와의 적대와 상생. 그 두 가지 갈림길에서.
대한과 유일, 두 그룹의 운명이 갈라지고 있었다.
* * *
완전히 척을 지기로 한 대한화학과 달리 유일그룹은 유종범 회장의 진두지휘하에 네뷸라 케미컬과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고, 특히 유종범 회장이 직접 정우를 찾았다.
유일 회장이 네뷸라 케미컬 본사를 직접 방문한다는 말에 정우 역시 준비에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 그는 유종범 회장을 맞았다.
"반갑습니다. 유 회장님. 이정우입니다."
"… 당신이 이정우 대표로군요. 반가워요."
정우는 마주한 유종범 회장을 살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말 그대로 '범'처럼 부리부리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이 유일그룹의 수장…!'
TV에서나 보던 인물을 마주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기보다는 절로 긴장이 되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겉모습처럼, 유종범 회장은 굉장히 직설적이었다.
"본론부터 갑시다. 이 대표, 솔리드스타를 납품받고 싶어서 왔어요."
"솔리드스타를요?"
유일 회장이 직접 솔리드스타를 납품받기 위해, 그 협상을 위해 자신을 찾아오다니.
자신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생각에 격세지감이 들었지만, 아쉽게도 그를 도와줄 수는 없었다.
"회장님, 저희 솔리드스타를 찾아주셔서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코가 석자라서요. 당장 솔리드스타 생산물량만 가지고는 유일자동차쪽 납품까지 커버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우가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유종범 회장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동요하지 않았다.
"그 점은 이미 알고 왔어요. 그래서 하나 더 제안할까 합니다."
"무엇입니까?"
"솔리드스타 생산 공장, 우리가 하나 더 지어주겠습니다."
"네?"
공장을 직접 지어주겠다는 말에 오히려 정우가 당황했다.
"공장… 을요?"
"맞아요. 이 대표가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생산량 아닙니까? 이를 위해선 더 큰, 더 많은 공장이 필요하고요?"
"… 그렇긴 합니다만, 공장을 직접 지어주신다니 이해가 안 가서요."
"말 그대로예요. 우리 유일이 투자해서 공장을 지어드리죠. 공장의 크기는 네뷸라의 기흥 공장의 10배 크기. 대신 거기서 생상한 솔리드스타는 모두 유일자동차에 납품하는 조건입니다. 어떻습니까?"
"음…."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정우가 돈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코인에 묶여 있기에 자금을 조달하기 여의찮은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공장을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
'하지만… 테슬라의 상징성을 무너뜨릴 수야 없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전고체배터리인 솔리드스타를 탑재하여 전기차를 생산하는 기업.
그 기업이 바로 테슬라였다.
유일자동차에 솔리드스타를 납품한다는 건 이 상징성을 무너트리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인 셈.
물론 네뷸라 케미컬은 테슬라와 미국시장에 한해서만 독점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즉, 국내 시장에서 생산한 솔리드스타는 마음대로 납품을 해도 되는데, 그렇다고 자동차 회사인 유일자동차에 솔리드스타를 납품하기는 애매했다.
유일자동차가 해외수출을 안 하는 기업이면 모를까, 이미 십여 년간 해외 수출과 판매를 통해 상당한 브랜드 인지도를 쌓은 기업이었기에 유일자동차에 솔리드스타를 납품한다는 건 테슬라와 척을 지는 행동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정우는 테슬라의 지분 1%를 취득한 상태였기에 테슬라의 손해는 정우의 손해로 직결되는 상황이라 유종범 회장의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정우의 선택은 거절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 제안 역시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입니까? 혹시 우리 유일이 이 대표를 섭섭하게 해서 그렇습니까? 그때 일 때문에 내 아들놈을 많이 혼냈습니다. 그러니 괘의치 않았으면 좋겠네요."
유종범 회장은 지난번에 정우가 유일자동차를 방문했다가 소득 없이 돌아간 일을 언급했다.
그 부분이 꽤나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저는 대표이자 경영자입니다. 이득이 된다면 어제의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당시 유일자동차에서 거절당한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정우는 테슬라와의 계약에 대해서, 지분에 대해서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기에 에둘러 표현했다.
"음… 굳이 말씀드리자면 채무를 늘리고 싶지 않달까요?"
"채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장은 저희가 지어줄 테니, 솔리드스타를 생산해서 채무를 솔리드스타로 갚으시면 됩니다."
"네?"
돈이 아닌 배터리로, 그것도 남의 공장에서 생산한 배터리로 갚으라고?
엄청나게, 아니 미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파나소닉이 리튬이온배터리 독점 납품 계약을 조건으로 테슬라의 기가팩토리 투자 비용 대부분을 부담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대표, 우리가 네뷸라의 파나소닉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은 공장에서 생산한 배터리로 갚으면 우리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 대표. 이 정도 제안이면 이 대표에게 손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