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 … 저런 취향이시구나 >
"미국 출장가셨다는데 바쁘시지 않을까요."
"그러려나."
"아마도 우리 대표님보다 강 팀장님 수익률이 높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뭐? 하하하, 그건 절대 아니지. 대표님 올초에 산 이더리움 아직도 보유하고 계시다던데?"
"정말요? 와… 그거 수익률 진짜 궁금하다."
"나도 그래."
"그래도 우리 개발팀 수익률 1위는 우리 팀장님이신 걸로! 땅땅땅!"
"결론이 그렇게 되나. 그럼 2위는 누군데?"
"음… 태형 씨 아니면 지용 씨 같은데요?"
고지용 연구원이 강성열 팀장과 함께 이정우 대표의 말을 듣고 코인에 투자한 사실은 개발팀에 소문이 난 상태였다.
갑자기 자기를 향한 주목에 고지용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아니에요. 길태형 선임님이 더 잘하십니다. 되게 공격적으로 하세요."
고지용이 한쪽에서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회를 먹고 있던 둥근 인상의 직원을 가리켰다.
그는 바로 정우에게 인수인계 받고 들어온 길태형 선임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음, 저 부르셨어요?"
"어. 태형 씨가 단타 쳐서 일주일만에 수익률 100% 넘었다고 하지 않았어?"
강성열 팀장이 묻자 길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요? 맞습니다. 음… 지금까지 한 150% 정도 됩니다."
"와- 150%? 그 정도면 나랑 얼마 차이도 안나네. 시드가 얼만데?"
"4천으로 시작해서, 지금 1억 정도 있네요."
"이야, 역시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투자 센스가 장난 아니네. 그럼 무슨 종목을 투자하고 있는 거야?"
"그냥 그날그날 급등하는 코인 타서 단타 치고 빠지고 그러고 있어요."
급등 코인을 단타친다는 말에 옆에 있던 한 개발팀 직원이 끼어들었다.
"어? 오늘 아인스타이늄 급등하지 않았어요? 몇백 프로 올랐던데."
"안 그래도 아까 그거 단타 좀 쳐서 먹었… 헙."
신나서 떠들던 길태형 선임이 강성열의 눈치를 봤다.
업무 중에 코인 단타를 친 게 사실 잘한 건 아니니까.
강성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요새 코인에 정신이 팔려서 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일해야 할 거는 해놓고 적당히 합시다. 무슨 말인지 알지? 코인 때문에 업무나 프로젝트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니까."
"밀린 업무는 제가 야근해서라도 반드시 끝내놓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팀장님."
"알겠어. 근데 태형 씨, 아인스타이늄 같은 급등 코인은 낙폭도 크지 않아? 난 위험해서 그런 단타는 못 치겠더라고. 그냥 이더리움 같은 시총 큰 종목 들어가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마음 편하지."
"진짜 멀리 보면 장투가 낫긴 하죠. 근데 이런 상승장에서는 급등하는 코인들이 많아서 그거 다 먹으면 장투랑 비교도 안 되게 벌 수 있거든요. 순환펌핑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순환펌핑? 뭐, 돌아가면서 펌핑이 온다 이런 건가?"
"예. 2만원짜리 어거REP가 4만원 가고 그러면 같은 만원 대 코인인 디크레드DCR 같은 애들도 들썩이잖아요? 그게 심리상 어거 상승분을 못 먹은 개미들이 비슷한 코인으로 몰리면서 생기는 현상이거든요. 일종의 눈치게임이랄까요?"
"아, 그래서 급등 코인이 나오면 다른 코인들도 오르니까 그 상승분을 먹겠다는 거구만?"
"예. 그래서 천원짜리인 아인스타이늄이 오르길래 다른 지폐 코인들 좀 사놔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상승세가 심상치 않네요."
"지금 얼만데?"
"장초에 1,000원이었던 게 지금은… 3,000원이네요."
"뭐? 3,000원? 하루만에 3배가 된 거야?"
"정확히 말하면 200%가 오른 거죠. 2배입니다."
"아, 맞네. 그래도 1,000원짜리가 3,000원을 가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데."
"팀장님, 지금 엇비트 앱 들어가서 보세요. 아인 3,300원 됐어요."
"뭐? 거기서 10%가 더 올랐다고?"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는 사이 또 10%가 올랐다는 말에 모두가 허탈해졌다.
"뭐야, 방금 아인에 100만원 넣었으면 10만원 먹는 거네? 그 돈이면 이 초밥 배터지게 먹고도 돈 남겠다."
"하, 지금이라도 아인스타이늄에 돈 넣어야 하나 봐요."
"너무 올라서 위험하지 않을까. 나는 저런 급등주 단타는 자신이 없어서."
강성열 팀장이 부정적으로 얘기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고지용 연구원이 맞장구쳤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입니다. 괜히 욕심 부리면 망한다고 봐요. 저도 팀장님 생각처럼 지금 들어가는 건 위험해 보입니다."
"지용 씨야 팀장님처럼 이더리움에 투자해놨으니까 안정적이라 그런 거겠지. 우리 같이 투자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좀 박탈감이 든다고."
"맞아. 뭐라도 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태형 씨 생각은 어때? 지금이라도 아인에 투자하는 게 맞을까?"
대표적인 장투파인 강 팀장과 고지용의 조언을 듣기 싫은 걸까.
팀원들이 단타파인 길태형 선임에게 물었다.
길태형이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뭐, 저는 일단 지금 투자하는 중이라."
"지금도?"
"예. 보세요."
길태형이 스마트폰으로 코인거래소 앱을 켜서 화면을 모두에게 공유했다.
거기엔 아인스타이늄에 1억원을 투자한 길태형의 자산이 표시되어 있었다.
"세상에… 3,150원에 1억원 어치나 샀어?"
"예. 아까 3천원 뚫었을 때 다른 거 다 팔고 냅다 샀습니다. 지금 고점 계속 갱신 중이라 위에 시체가 없거든요. 매도벽이 없어서 어디까지 오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얼마까지 올라간다는 거야?"
"저는 최소 4천원에서, 많게는 5천원까지 가지 않을까… 예상 중이에요."
"와… 4천원? 진짜 지금이라도 사야 하나."
말하는 지금도 아인스타이늄은 계속 급등하더니 3,500원을 돌파한 상황.
모두에게 보여지고 있는 길태형의 수익도 +2천만원을 돌파했다.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수천만원을 벌어들이고 있는 동료 직원들을 보며 모두가 허탈해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나도 아인스타이늄에 돈 넣어야겠어."
"저도요."
뒤늦게 부랴부랴 코인거래소 앱에 원화를 입금한다고 모두가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낑낑거렸다.
오직 강성열 팀장과 고지용 연구원만 어안이 벙벙해서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니, 다들 진정해. 급등하는 종목 타면 물리기 쉬운 거 몰라? 너무 위험해."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들어가시는 건 위험해요. 만약 들어가신다면 단타 개념으로 접근하셔야 합니다. 수익 나면 바로 팔아야 하는 거 아시죠?"
길태형이 맞장구쳤다.
하지만 걱정된다는 듯한 말과 달리 그의 입가엔 왠지 모를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장기투자 따위로 운 좋게 돈을 번 강성열 팀장보다 자기가 더 투자에 뛰어나다는 걸 드러내는 듯한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지금 돈 들어왔다. 태형 씨, 아인스타이늄 어떻게 사?"
"그냥 시장가 누르시고 주문수량 100% 선택하고 매수하시면 됩니다."
"잠깐만… 오케이. 했다. 3,600원에 전부 사졌어!"
"윤 책임님 저도 3,600원에 다 샀어요."
"정훈 씨 얼마 샀어?"
"전 은행 이체 한도 때문에 200만원만 넣었어요. 좀 더 넣고 싶었는데."
"나는 2천만원."
"2천만원요? 통도 크셔라."
"남자는 한방이지. 어? 3,700원 됐다! 벌써 빨간불이야!"
"와, 우리도 이제 부자 되나요?"
뒤늦게 아인스타이늄을 산 개발팀 직원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희망찬 미래를 얘기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인스타이늄이 3,700원을 넘어 3,800원을 찍은 순간, 텅 비어 있던 매도호가창에 파란 벽돌이 차올랐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는 매도벽이었다.
"어?"
누군가의 당황한 한마디와 함께 그 직후, 시퍼런 눈물이 차트 아래로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수직낙하하는 아인스타이늄의 가격.
1초만에 아인스타이늄의 가격은 2,900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 뭐야!"
"헉!"
모두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스마트폰을 붙든 채 소리쳤다.
이미 그들의 자산은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뀐지 오래. 그것도 -20%를 훌쩍 넘은 상태였다.
"시, 시발! 이거 어쩌지!"
"좀 조용히 해봐! 반등할 것 같으니까!"
짜증 난 듯 누군가 소리쳤다. 그의 말처럼 고점을 찍고 고꾸라진 아인스타이늄은 반등할 것처럼 다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제발 전고점만… 전고점만…!"
하지만 전고점만 오면 털어버리려는 그들의 바람과 달리, 채 절반도 못 오른 채 아인스타이늄의 차트는 다시 수직낙하하기 시작했다.
2,900원을 뚫고 내려가는 아인스타이늄.
순식간에 2,200원에 도달하자, 김정훈 선임이 발 빠르게 대응했다.
"아씨, 모르겠다 전 팝니다!"
"뭐? 지금 판다고?"
"아무리 봐도 이거 떨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아요! 아, 근데 이거 왜 안 팔려! 엇비트 서버 왜 이따구야 진짜!"
"나도 팔아야 하나."
"어? 팔렸다! 아, 몰라! 전 손절했어요! 하… 70만원 날아갔네."
김정훈 선임이 안도인지 답답함인지 모를 한숨을 내쉴 때, 윤 책임이 울상을 지었다.
"하… 나 벌써 마이너스 800이야… 어쩌냐…."
"윤 책임님, 그냥 손절해요. 이거 답 없어요. 이미 300% 가까이 올랐던 건데 어디까지 빠질지 알고 들고 계시는 거예요. 그냥 빨리 손절해 버려요."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냐. 하… 미치겠네. 태형 씨! 태형 씨는 어떻게 했어? 팔았어?"
"… 저요?"
아인스타이늄에 물려버린 윤 책임이 묻자 길태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저도 아직 못 팔았습니다."
"뭐? 태형 씨 거의 1억 원 어치 샀잖아. 근데 안 팔았다고?"
"… 분명 매도 버튼을 눌렀는데 서버가 버벅거리더니 체결이 안 됐네요. 하…."
"지금 마이너스 얼만데?"
"… 3천이요."
"뭐?!"
무려 3천만원을 손해 보고 있다는 말에 식당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 숨 막히는 적막을 깨려는 듯 길태형이 애써 웃었다.
"하하… 뭐, 다시 오르겠죠. 이렇게 급격한 상승 이후에 폭락이 나오면 한번 더 상승하기 마련입니다. 세력이 한번 더 해먹으려는 게 기본이거든요."
"그럼 손절하지 말고 기다릴까?"
"전 아직 상승 한 파동 더 남아 있다고 봐서… 존버해 보려고요."
"파동? 음… 난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태형 씨 믿고 따라갈게."
"저 너무 믿지 마세요. 지금 -30% 맞은 거 안 보이세요? 그리고 괜히 아인스타이늄 얘기해서 선동한 것 같아서 죄송한데…."
"뭐, 어쩌겠어. 투자 책임은 나한테 있는데. 그래도 태형 씨 말대로라면 조금은 복구 되겠지. 나도 존버 간다."
새하얗게 질린 두 사람이 애써 위로를 건네며 자기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얘기하는 그 순간에도 아인스타이늄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지켜보던 강성열 팀장과 고지용 연구원은 쓰게 웃었다.
"… 역시 난 이더리움 존버나 해야겠다."
"저두요. 근데 팀장님, 보유하신 이더리움 언제 파실 거예요?"
"나? 글쎄. 이 대표님이 12월 말에서 내년 초에 팔라고 했으니까. 난 딱 1월 1일에 팔까 하는데 확신은 없어."
"음… 저도 그쯤 팔까 싶긴 한데 애매하네요."
"그치? 이거 우리 이 대표님한테 한번 물어봐?"
"대표님한테요?"
모두가 놀라서 반문하자 강성열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랐어? 나 우리 대표님이랑 개인톡 하는 사이야."
"오오오."
"물어봐주세요. 진짜 궁금합니다."
고지용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부탁하자 강성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봐. 지금 바로 톡 보낼 테니까."
신나서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강성열 팀장.
하지만 그와 반대로 길태형과 그를 따라 산 직원은 속으로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누군가는 돈을 잃고.
누군가는 돈을 벌고.
평화로워야 할 회식 시간에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고 있었다.
* * *
─────────
[봉수]: 아인스타이늄!
[봉수]: 믿고 있었다고!
[봉수]: (사진)
[봉수]: 아인 3500원에 다 팔았다!
[봉수]: 최고점에 못팔아서 좀 아쉽 ㅋㅋ
[KKD]: 이욜~ 좀 먹었네
[KKD]: (사진)
[KKD]: 근데 난 3700원부터 3800원까지 다 팜 ㅋ
[봉수]: ㄷㄷㄷㄷ ㅁㅊ ㅅㄲ
[봉수]: 단타 신이네
[동현]: (사진)
[동현]: 나두 3700원부터 다 팔았는데?
[동현]: 봉수 허접이네 ㅋ
[KKD]: 야 넌 일하는 놈이 언제 그때 팔았냐?
[KKD]: 진짜 꼭지점에 팔았네
[봉수]: 뭐야 나만 고점에 못 판 거?
[봉수]: ㅂㄷㅂㄷ
……
─────────
하루만에 300% 급상승한 아인스타이늄으로 인해 친구들과의 단톡방은 코인 얘기가 한창이었다.
"짜식들… 좋냐."
친구들이 돈을 벌어서 행복해하는 걸 보니 정우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하더니 개인톡 하나가 날아왔다.
─────────
[강성열 팀장]: 충성충성!
[강성열 팀장]: 존경하는 대표님!
[강성열 팀장]: 건강하신지요!
[강성열 팀장]: (굽신거리는 이모티콘)
─────────
바로 자신의 사수였던 강성열 팀장이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강 팀장의 선톡이 반가웠다.
─────────
[정우]: 아이고 강 팀장님
[정우]: 오랜만입니다
[정우]: 그런데 그렇게 예의 갖추지 않으셔도 돼요
[정우]: 편하게 말씀하세요
[정우]: 우리 사이에 ㅎㅎ
[강성열 팀장]: 여윽시 우리 대표님이셔! (엄지 척 이모티콘)
[정우]: 근데 어쩐 일이세요?
[강성열 팀장]: 대표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우]: 편하게 물어보세요 ㅎㅎ
[강성열 팀장]: 그 이더리움 언제 파실 생각이신가요?
[강성열 팀장]: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이모티콘)
─────────
언제 판다라.
정우는 가지고 있던 자신의 포지션, 그리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중이었던 시장 상황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이더리움 1,400달러의 고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길어야 한 달?
─────────
[정우]: 오래 갖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정우]: 길어야 한 달 안에 다 처분할 듯 싶어요
[정우]: 근데 그건 왜요?
[강성열 팀장]: 저두 그때쯤 팔려고… ㅎㅎㅎ
[정우]: 아 맞다 코인 투자하셨댔지
[정우]: 지금쯤 꽤 버셨겠는데요?
[강성열 팀장]: 에이~ 대표님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하죠 ㅎㅎ
[정우]: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ㅋㅋㅋㅋㅋ
[강성열 팀장]: 아무튼 감사합니다 대표님!
[강성열 팀장]: 충성충성!
[정우]: 네 ㅎㅎ
[정우]: 강 팀장님 다음에 서울 가면 술 한잔 해요^^
[강성열 팀장]: 사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
강성열의 메시지에서 신난 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강성열 팀장의 투자 역시 꽤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것으로 보였다.
"다 잘 풀려서 다행이야."
모두가 행복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흐뭇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 근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스마트폰을 보며 런닝머신 위를 걷던 정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땀내가 가득한 공간. 근육 빵빵한 형님들이 기합인지 악인지 모를 괴성과 함께 쇠질 하는 이곳은 테네시 주의 유명 헬스장이었다.
그렇다.
정우는 지금 헬스장에 와 있었다.
그것도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서였다. 옆에서 그의 담당조교(?)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표님, 너무 천천히 걸으시는 거 아니에요? 충분히 쉬신 것 같은데."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지서현.
헬스장 운동복 차림의 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정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그게 아니라 잠깐 연락이 와서. 그래서 좀 확인하느라 그랬어."
"운동을 할 때 요령이나 농땡이를 부리면 안 됩니다. 땀 흘린 만큼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알겠어. 열심히 할게…."
호랑이 교관의 지도하에 정우는 열심히 운동을 했다.
런닝머신 5km 걷기.
벤치 10개*4세트.
스쿼트 12개*4세트.
데드리프트 8개*4세트.
……
미친 듯한 운동량을 소화하고 나니 온몸이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허억… 허억… 아니 서현 씨,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초보자 때는 근성장 효율이 좋아서 전신을 조져주는 게 좋습니다."
"뭐? 조져?"
"…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단련하는 게 좋다는 의미입니다. 자, 이거 드십시오."
지서현이 쉐이크통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운동 후 1시간은 헬스인들에게 골든타임으로 불리는데 이때 체내 단백질 흡수율이 대폭 증가합니다. 그래서 준비한 쌀에서 추출한 필수아미노산이 함유된 프로틴 보충제입니다."
"이걸 마시라고? 나 보통 이런 거 먹으면 속이 거부룩하던데. 알잖아? 나 라떼도 잘 안 마시는 거."
"예. 유당불내증이 있으셨죠. 그래서 WPI보충제로 준비했습니다."
"W… 뭐? 그게 뭔데?"
"분리유청단백질이라고 유당을 제거하고 단백질 성분만 걸러낸 건데 소화효소도 들어 있어서 소화가 잘 되는 보충제입니다. 드셔도 소화에 문제 없으실 겁니다."
"어… 그래. 고마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가져온 정성이 있으니 마셨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더부룩한 느낌도 없이 맛있었다.
"좋은데? 몸에 힘이 딱 들어가는 느낌이야."
"잘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지서현이 흐뭇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의외다. 그녀가 이렇게 운동에 대해 잘 알 줄이야.
"신기하다. 서현 씨 운동도 되게 잘했네? 아는 것도 많고."
"건강한 육신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고 어머니가 어릴 때 운동을 많이 시키셨습니다. 커서는 잘 안 했지만… 그래도 그때 배운 게 어디 가진 않네요."
"그렇구나. 맨날 집에서 게임만 한다길래 운동이랑은 담 쌓은 줄 알았는데… 아얏! 아 왜 때려!"
"… 죄송합니다. 갑자기 등에 모기가 보여서… 흠흠."
"… 그냥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호텔로 가시죠. 순환펌핑 관련해서 자동 매매에 추가된 기능에 대해서 보고드릴 것도 있으니까요."
"아, 그거 보긴 봐야지. 알았어. 가자고."
그렇게 헬스장을 나서는 길.
미국이다 보니 몸매가 쭉쭉방빵한 누님들이 레깅스와 요가복 같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딱 달라붙는 스포츠웨어를 입고 헬스장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Hey, Cutie~"
정우도 남자다 보니 본능적으로 시선이 갔다가 눈이 마주치자 금발의 누님들이 손을 살랑이며 윙크를 날렸다.
"와…."
저도 모르게 헤벌쭉해서 그녀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살기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지서현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뭐하십니까?"
"어? 어… 그게 말이지… 하하, 하하하. 그냥 눈이 돌아가대?"
"품위를 좀 지키시죠. 보기 민망합니다."
"… 그 정도라고?"
지서현의 팩트 폭격에 가슴을 부여잡는 오버액션을 취할 때, 그녀의 입에서 어떤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 저런 취향이시구나."
"음? 뭐라고?"
"…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명 뭐라고 했는데?
내가 잘 못 들었나.
하지만 왜일까.
지서현의 눈빛이 알 수 없는 열정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에 정우는 오싹해졌다.
* * *
지서현의 1대1 집중 관리를 받으며 잠시 미국에서 지냈다.
주로 안 하던 운동을 하는 생활이었는데, 왜일까. 쌓였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혈액순환이 잘 되면서 활력이 솟아난달까.
"어떻습니까. 운동, 나쁘지 않죠?"
옆에 있던 마사지베드에 누운 지서현이 물었다.
운동 후 피로를 풀기 위해 타이 마사지샵을 찾았는데, 담당 마사지사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아서 피로가 쫙 풀리는 기분이었다.
노곤노곤하니 눈이 차츰 감기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하음… 괜찮네. 운동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
"이제 재미도 붙이셨으니 틈틈이 운동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켜볼 겁니다."
"… 마치 군대로 돌아간 것 같은데 이거."
"예?"
"아니야, 아무것도."
스케줄만 잡아주고 사생활에 터치하지 않던 김 비서가 그립다.
그래도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암. 오래 살려면 관리해야지.'
비로소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부를 얻었는데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그동안 열심히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틈틈이 하기로 했다.
마사지를 받는 사이 지서현이 코인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대표님, 최근 코인 투자와 관련하여 장의 변동폭이 매우 커졌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API로 코인 급등 알림 기능을 추가했는데 확인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코인 급등 알림 기능이라고?"
"네. 급등 폭을 설정할 수 있는데, 단순 알림뿐만 아니라 지정한 변동폭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매수 진입 및 매도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입니다."
"오… 근데 반짝 올랐다가 바로 빠지면 위험하지 않아?"
"네. 그래서 시총이 큰 종목에만 해당 기능을 사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네. 한번 써볼게. 땡큐."
그녀가 신경 써준 게 느껴져 고마웠다.
하지만 정우도 나름의 포트폴리오를 갖추어 분산투자를 해놓은 상황이라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친구들처럼 급등하는 코인에 들어가서 단타를 치기보다는 미리 씨앗을 뿌려놓고 수확을 거두는 느낌이 강하달까.
때문에 계속 코인 장세를 확인하지 않아도 미리 매도를 걸어두거나 API 자동매매 기능을 이용하여 원하는 가격 근처에 왔을 때 알림이 오도록 설정해놓아서 신경을 덜 쓸 수 있었고, 그만큼 스트레스나 심력 소모가 덜했다.
지금처럼 여유롭게 마사지를 즐길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서현 씨도 코인 투자하고 있지 않아? 나 따라서 이더리움도 투자하고 그랬잖아. 그거 어떻게 됐어?"
"… 나름 재미를 좀 보고 있습니다."
"이야, 서현 씨가 재미를 본다고 할 정도면 장난 아니게 번 것 같은데? 얼마나 벌었는데? 아, 좀 사적인 질문인가?"
"…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계좌 보여드리겠습니다."
"진짜? 기대되는데?"
마지막으로 지서현의 계좌를 보았을 때 3억원 넘게 있었다.
똘똘하기 그지없는 그녀라면 한 10억 정도는 넘게 벌지 않았을까?
서현 씨 나이가 20대 중후반인데 10억원이라….
"… 서현 씨 1등 신붓감이네."
"네?"
"그 나이대 또래들에 비하면 상위 1%, 아니 상위 0.1%가 아닐까 싶어서."
"… 아. 아닙니다."
"왜 그래. 자신감을 가지라고. 서현 씨 정도면 얼굴도 이쁘지, 돈도 많지, 운만 좋으면 재벌가에 시집도 갈 수 있을지도?"
"… 재벌가요?"
정우의 말에 지서현이 풉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왜 웃어?"
"아, 아닙니다. 그냥 재밌어서요. 근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대표님은, 제가 만약 재벌가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서현 씨가? 뭐 재벌 2세나 3세 말하는 거야?"
"… 네, 뭐. 그런 가정입니다."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제는 어엿한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한때는 푼수 덩어리였던 그녀가 재벌가 사람?
"에이- 농담도 잘해. 서현 씨가 무슨 재벌가야. 전혀 안 어울려."
"그냥 가정입니다만."
"흠, 가정이라… 만약 예전에 나였다면 서현 씨가 재벌가 사람이었지? 당장 꼬셨을 듯."
"… 정말요?"
지서현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뭐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어. 근데 지금은 글쎄… 재벌가 사람이라고 굳이 뭐 특별한 건가 싶네. 내가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꿀리지 않겠지.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지낼 것 같은데?"
정우의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음… 그렇군요."
"근데 그 얘긴 왜?"
"그냥… 갑자기 재벌 얘기가 나와서 물어봤습니다."
"싱겁긴. 어? 전화 왔다."
전화가 왔는지 마사지사가 스마트폰을 건네줬다.
정우는 마사지를 받으며 그 전화를 받았다.
스마트폰 액정에 떠오른 <아버지>라는 세 글자.
아버지?
"여보세요? 아부지, 무슨 일이세요?"
-정우야, 너 지금 미국이냐?
"네. 미국이죠. 그건 왜요?
-다른 게 아니라, 나 미국 좀 보내다오.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