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인 후 인생 대박-81화 (81/120)

81화 홍시처럼 붉게

갑자기 미국이라니 당황스럽다.

“아부지, 미국은 갑자기 왜요?”

-뭐 이유가 있어야만 가니. 그냥 나도 한 번쯤은 양놈들 땅 좀 밟아 보고 싶어서 그런다. 왜, 부담되냐?

“아뇨. 부담은요. 제가 얼마를 버는데 아버지 여행 하나 못 보내 드리겠어요? 전 그보다는 아버지가 갑자기 미국 간다고 하시길래 국내에서 무슨 일이 있나 했죠. 얼마 전에 기자들 엄청 왔다 갔다면서요?”

정우가 유명해져서일까.

극성 기자들이 정우의 부모님 집까지 찾아내서 인터뷰를 한답시고 아파트 입구에 진을 쳐 놨었다.

그걸로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를 못하겠다고 투덜거렸던 것이 기억나서, 아버지가 미국을 보내 달라는 말에 기자들 때문인 줄 알았던 것이다.

-아, 그거? 상종을 안 했더니 알아서 떨어져 나가더라. 내가 그놈들이 3번 정도 찾아오면 인터뷰해 줄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 뭐다냐? 그 3번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뭐였지?

“삼고초려요?”

-어어! 그거! 삼고초려! 내가 기자 놈들이 삼고초려 하면 받아 줄라고 했는데 끈기가 없더라고.

“하하하, 아버지가 제갈공명이셨네요.”

-제갈공명도 안 부럽지. 우리 아들이 누군데. 으하하하하! 아무튼 정우야, 그럼 그 미국 가는 것 좀 부탁하자. 내가 이 나이까지 해외 한 번 못 나가 봤어.

“하긴 아버지랑 엄마 두 분 모두 해외여행 한 번도 못 가 보셨죠. 이참에 엄마랑 같이 오세요. 제가 티켓 끊어 드릴게요. 숙소도 알아봐 드리고.”

-하하하, 고맙다! 역시 아들밖에 없어~

그때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하이고- 정우야, 니 아빠가 미국 왜 가려는 줄 아니? 아니, 글쎄 츄레라 보러 간다고 그 난리다!

“예? 츄레라요?”

웬 츄레라?

예상조차 못 한 뜬금없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정우가 당황했다.

“그…… 츄레라면 아빠 차 같은 트레일러 말하는 거죠?”

-어어! 그거그거! 진짜 요새 이 인간이 츄레라 동호회인지 뭔지 거기를 뻔질나게 다니는데, 거기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미국 가야겠다고! 아주 그냥 사람 복장을 뒤집어 놔!

-아니, 미국 가는 게 뭐 어떻다고 그래! 우리 아들 잘나가는데 해외여행 좀 부탁할 수 있는 거지! 겸사겸사 그…… 츄레라 대회도 좀 보고……!

-그 츄레라 대회 때문에 가려는 거면서 핑계는!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사서 고생이냐고!

-아, 그럼 당신은 가지 말어! 나 혼자 갈 거니까!

-……누가 안 간대요? 이상한 거 보지 말고 자유의 여신상? 그런 거 보면서 제대로 관광을 해야지, 뭔 츄레라야!

“…….”

수화기 너머로 부모님의 아옹다옹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도 없기도 했지만, 두 분이 다투시는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서 피식 웃었다.

“하하하, 아부지, 엄마, 두 분 싸우지 마세요. 츄레라 여행도 가고 자유의 여신상도 보면 되죠.”

-그치? 정우 니가 말 잘했다. 둘 다 보면 될 걸 왜 이리 바가지를 긁는다냐!

-츄레라 동호횐지 뭔지 이상한 거 한답시고 맨날 밖에 싸돌아댕기면서 뺀질거리니까 그렇지, 내가 당신이 제대로 하면 이 소리 하겠어요? 증말 답답하다 답답해.

“워워, 그만그만. 자꾸 싸우시면 여행 안 보내드립니다?”

그 말에 수화기 너머 다투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우리가 언제 다퉜다고…… 흠흠…. 아무튼 아들, 부탁 좀 하자.

“예. 제가 티켓 끊고 연락드릴게요. 일정은 언제가 좋으세요?”

-아무 때나 상관 읍다. 우리야 집에서 맨날 노는데 뭐.

“아하, 그러면 최대한 빠른 일정으로 잡을게요. 내일도 상관없죠?”

-뭐? 내일? 내일은 너무 빠른데. 짐도 싸야 하고 준비도 하려면 크흠…….

“짐 챙길 필요 없어요. 현지에서 다 사면 되거든요. 그냥 꼭 필요한 것만 챙겨서 편하게 오세요. 그리고 도착하시면 제가 직접 모실 테니 저어언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 우리 아들이 그렇게 얘기하니 든든하구만. 그럼 그렇게 하마.

“예. 그럼 내일로 일정 잡을게요. 쉬세요.”

-알겠다. 몸조심하고. 조만간 얼굴 보자.

“예.”

-아, 이 양반이 진짜! 전화를 그냥 끊으려고 하면 어떡해요! 나 아직 인사도 못 했구만! 전화 나 좀 줘봐요…… 아들~ 사랑해~

“하하하, 네, 엄마 저두요. 끊을게요.”

통화를 마치고.

옆에서 마사지를 받던 지서현이 물었다.

“부모님이십니까?”

“어. 미국에 오고 싶다고 하시네?”

“전화 소리가 커서 들었습니다. 내일 출발이시면 모레…… 오시는 건가요?”

“아마도? 근데 아버지가 트랙터 취미에 푹 빠지셨나 보네. 미국까지 직접 오시려는 걸 보면. 근데 미국에서 트랙터 대회가 열리나 봐?”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 듣습니다만.”

“나도 방금 처음 들어 봤어. 트랙터 대회면 짐 같은 거 옮기는 대회인가? 궁금해지네.”

스마트폰으로 슬쩍 검색을 해 보니 ‘트랙터 풀링 대회’라는 게 나왔다.

영어로는 ‘Pull on Sunday, plow on Monday!’라는 일요일에는 당기고, 월요일에는 쟁기질하자는 웃기는 이름의 대회였는데, 정우의 짐작대로 무거운 짐을 트랙터로 누가 빨리 옮기는지 가리는 대회였다.

일정도 마침 딱 3일 뒤다.

정우는 아버지가 가고 싶다는 대회가 여기인 것 같다고 짐작했다.

“진짜 있네. 지상 최강의 모터쇼라…….”

“아버님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예전부터 큰 차를 좋아하셨거든. 근데 우리 아버지이지만, 나도 그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스마트폰이 또 진동하더니 <머스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일론 머스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또 전화 왔네.”

“……대표님, 인기쟁이시네요.”

“그걸 이제 알았어?”

“아뇨, 원래 알았습니다.”

“……농담인데 너무 진지하게 받으니 당황스럽네. 아무튼 전화 좀 받을게?”

“예. 저는 괜찮습니다.”

“고마워. 네, 미스터 머스크, 오랜만입니다.”

전화를 받자 이제는 익숙해진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오랜만이네요, 미스터 리. 미국에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없어요?

“아, 이것저것 한다고 좀 바빴네요.”

-이거 실망입니다. 저는 미스터 리가 저를 보러 바로 팔로알토로 달려와 줄 줄 알았는데!

“하하하, 미안해요. 이번 마음의 빚은 조만간 봐서 거하게 제가 한잔 사서 갚겠습니다.”

정우가 너스레를 떨자, 머스크가 기다렸다는 듯 받았다.

-그 말 취소하기 없습니다?

“네?”

-안 그래도 미스터 리를 초대하려고 했거든요. 우리 행사에.

“행사요? 행사라면…… 혹시 테슬라 쪽 행사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세미 트럭 공개를 하게 되었거든요.

“아! 세미트럭!”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이맘때쯤 테슬라의 세미트럭이 공개되었다는 걸.

‘정확히 2017년 11월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회귀하고 나서 정우가 발표한 솔리드스타 때문인지 세미트럭의 공개는 미뤄졌고, 이제야 발표하게 된 것이다.

“세미트럭이 드디어 나오나 보네요.”

-예. 디자인은 아주 끝내줍니다.

“알아요. SF영화의 소품 같이 나왔잖아요.”

-……어? 그걸 미스터 리가 어떻게 알아요?

“아니, 그냥 뭐…… 미스터 머스크가 SNS에 떠든 단서들을 좀 조합했더니 알겠던데요? 하하하.”

-아, 하긴 제가 힌트를 많이 뿌리긴 했습니다. 그래도 기억해 주니 고맙네요.

“뭘요. 그런데 세미트럭이 예정보다 좀 늦게 나왔는데, 달라진 게 있나요?”

-아무럼요. 당연히 솔리드스타를 탑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죠.

“아, 역시.”

세미트럭에 솔리드스타를 달았다?

그 스펙이 어느 정도일지 도무지 예상되지 않았다.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놈은 그야말로 괴물Monster이니까요.

“궁금하네요.”

-그래서 미스터 리를 세미트럭 공개 행사에 초대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인 공개쇼가 아니라 흥미진진할 거예요.

“그래요? 일정이 언젠데요?”

-3일 뒤입니다.

“3일 뒤요?”

3일 뒤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트랙터 대회가 있는 날.

“아… 하필이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미안해요, 머스크. 하필 그날 약속이 있네요. 그것도 그냥 약속이 아니라 부모님이 미국으로 오신다고 해서 직접 모시기로 했거든요.”

-아아아!

머스크가 아쉬운 탄성을 터트렸다.

-부모님과의 약속이면 어쩔 수 없죠. 이해합니다.

“저도 그냥 약속이면 미루고 머스크와 함께하고 싶은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미스터 리의 마음만이라도 충분합니다. 하하하. 근데 혼자서 전투를 치러야 하니 갑자기 사기가 죽는 기분이군요.

머스크의 아쉬움이 한가득 느껴지는 목소리에 정우는 미안해졌다.

“나중에라도 꼭 얼굴 봐요. 제가 팔로알토로 넘어갈게요.”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미스터 리, 부모님과의 멋진 여행 되시길.

통화가 끝나고.

“대표님, 머스크 씨와의 약속이 불발된 건가요?”

“어. 하필 부모님과 만나기로 한 날이랑 겹쳐서 말이야.”

“저런…….”

“어쩔 수 없지. 대신 나중에 머스크 좀 챙겨 줘야겠어.”

안 그래도 챙겨 줄 선물이 하나 있긴 하다.

한국에서 그래핀 태양전지가 성공했다는데, 그걸 보여 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머스크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 * *

한남동 대한일가 자택.

박민수 부회장은 조용히 한광표 회장을 찾았다.

“그래, 박 부회장.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예, 회장님. 한동준 사장님 건인데…… 아무래도 보고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찾아뵈었습니다.”

“동준이?”

한 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동준이가 왜? 걔가 무슨 사고를 칠 애가 아닌데?”

“그게…… 에너맥스1000 사태가 생각보다 커지고 있습니다.”

박 부회장은 한동준이 솔리드스타를 에너맥스1000로 포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걸 보고했다.

한광표 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그걸 진짜 그놈이 지시했다고?”

“예. 저도 들으면서 믿기지 않았습니다만,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누가 봐도 악수야. 그런데 여우 같은 그놈이 이유도 없이 그런다? 이해가 안 되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대로만 가도 대한그룹 승계가 유력한 게 한동준 사장 아닙니까? 그런데 굳이 자칫 후계자 자리를 놓칠 수도 있는 이런 무리수를 던진다는 게…….”

박민수 부회장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얘기하자, 한 회장이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유력하다고 그래. 내가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알았으면 됐고.”

한광표 회장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분명 동준이 고놈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거 말고 특이 사항 없었나?”

“아, 이번 대한화학 주가 상승과 관련해서 배터리사업부 분사 계획을 상당히 고대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에너맥스1000 발표 이후 대한화학의 주가가 굉장히 오르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그 분사 쪽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듯 보였습니다.”

“흠…… 배터리사업부 분사……?”

보고를 받던 한 회장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소파 걸이를 손으로 탁 쳤다.

“……오호라! 고놈이 그런 생각이었구만.”

“혹시 짚이시는 바가 있으신 겁니까?”

“동준이 그놈, 지 형 걸 노리고 있어.”

“예? 형이라면…… 한성준 사장의 대한전자 말씀이십니까?”

한광표 회장이 한성준 사장에게 대한전자를 물려주고, 한동준 사장에게 대한디스플레이를 물려준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중 대한디스플레이의 매출 비중과 실적이 워낙 높았기에 대한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한동준 사장이 유력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동준 사장이 대한전자를 노린다?

“자네만 알고 있게. 성준이는 지금 계열 분리를 준비 중이야.”

“예? 계열분리요?”

계열분리는 그룹이 개별 계열사를 그룹에서 따로 떼어 내어 독립시키는 걸 의미했다.

즉, 대한전자를 독립시킨다는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대한전자가 분리되면 그룹이 휘청일 겁니다!”

“그럴지도.”

“회장님, 그럴지도 라뇨. 평생을 일궈 온 그룹이 쪼개지는 일인데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어쩌겠나.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내가 가고 난 뒤에는 지들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이미 나는 이미 손 뗀 일이야.”

한광표 회장이 쓰게 웃었다.

확실히 대한그룹의 작은 거인은 그 위엄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성준 사장의 행동을 묵인할 줄이야.

아니, 그 온건하던 한성준 사장이 계열분리를 추진한 것부터가 놀라웠다.

“한성준 사장이 언제부터 그런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겁니까?”

“꽤 됐지. 대한그룹을 못 물려받을 것 같으니 하나라도 빼먹겠다는 건데 어쩌겠어. 그래도 영리한 선택이라고 보네. 성준이 그놈이 뭐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인 일이지.”

“하지만 회장님, 한동준 사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후계자로서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그룹을 물려받고 싶을 게 분명한…… 어?”

말하던 박민수 부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이미 한성준 사장의 계획을 눈치챈 겁니까? 그래서 대한전자 지분을 노리고 배터리사업부 분사를 추진하는 거군요?”

“맞아. 이제 눈치챘나 보구만. 동준이 고놈 지 형의 계열분리를 막으려고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해. 배터리사업부 분사를 통해 지분 인수를 위한 전쟁용 총알을 마련하는 거지. 그거 아니면 동준이 그놈이 무리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지금 방법은 너무 위험합니다. 후폭풍이 거셀 게 분명합니다.”

“박 부회장, 자네 명줄이 급한 거 아니고?”

한광표 회장의 말에 박민수 부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회장님은 못 당해 내겠네요. 맞습니다. 에너맥스1000을 발표한 것도 그렇고, 이번 일에 연루된 이상 저도 수사망을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회장님, 저 좀 도와주십쇼. 아니, 살려 주십쇼.”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내가 이래 봬도 동준이 아빈데, 제 자식을 도와야 하지 않겠어?”

대놓고 가족을 돕겠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박민수 부회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회장님. 저 회장님 밑에서 정말 개처럼 일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대한화학도 거의 제 손으로 일구어 낸 거나 다름없습니다.”

“내 고집으로 시작한 사업, 여태 적자만 내다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되나 싶었지. 그건 다 자네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배터리사업이라는 게 원래 한두 푼이 드는 게 아니다.

언제 성공할지 알 수 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게 배터리사업이다.

그런데 원천기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배터리사업을 성공시킨 게 다름 아닌 박민수 부회장이었다.

그것도 그냥 성공한 수준이 아닌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로 말이다.

즉, 박민수 부회장은 그만큼 대한화학과 대한그룹에 헌신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야. 차세대 혁신을 주도하기엔 대한화학은 아직 작고 연약한 알에 불과해. 한발 더 나아가려면 그 알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하는 법이야. 낡고 고리타분한 껍데기를 말이지.”

고리타분한 알껍데기. 그건 누가 들어도 박민수 부회장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광표 회장의 말에 박민수 부회장이 얼굴을 굳혔다.

“……그럼 저를 내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내치진 않아. 그저 자연스레 도태되겠지. 그게 자연의 법칙이니.”

“회장님!”

“물론 자네의 노고를 잊지 않고 있어. 내 박 부회장 자네가 감방에 가는 일은 없게 해 주겠네. 섭섭하지 않게 은퇴 자금도 챙겨 주고. 그 정도면 충분하지?”

감방은 안 가게 해 주겠단 한 회장의 약속에 그제야 박민수 부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내 말을 너무 섭섭하게 듣지는 말아. 어쩌겠나. 챙겨야 할 입이 한둘이 아니거늘.”

“……이해합니다. 괜히 부담 드려 죄송합니다, 회장님.”

“대신 자네가 할 일이 있어.”

“무엇입니까?”

“나한테 들은 얘기, 성준이나 동준이한테는 이 얘기하지 마.”

“예? 두 사람한테 말씀이십니까?”

박민수 부회장이 의아해서 물었다.

한광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놈들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입단속 잘하게.”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한성준 사장에게 꽤 타격이 될 텐데요? 자칫 대한전자를 송두리째 한동준 사장한테 뺏길지도 모릅니다.”

“뭐 어쩌겠나. 지들끼리 알아서 치고받는 거지.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인 거야.”

한광표 회장이 집무실을 한쪽을 장식한 호랑이 가죽 카펫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니까.”

* * *

부모님 입국 당일,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갔다.

“……근데 서현 씨는 왜 따라왔어?”

“저요? 대표님 길 잃으실까 봐 안내해 드리려구요.”

“어차피 택시 기사님이 운전해 주시는데?”

“……겸사겸사 바람도 쐬고 싶어서입니다. 따라가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나야 서현 씨가 불편할까 봐 그랬지. 우리 부모님 볼 건데 불편하지 않겠어?”

“아아, 그 정도야 문제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런 것 치고는 오늘 따라 캐쥬얼 정장 차림에 코트를 걸치고 유독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뉴요커 같달까.

그런데 그런 차림새로 누가 봐도 긴장한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데리고 온 것 같은데.”

“예?”

“아니야, 아무것도. 어 저기 나오신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엄마, 여기에요!”

“아들~”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끌고 온 엄마, 그리고 아버지와 반가운 해후를 나눴다.

“얼굴이 왜 이렇게 핼쑥해졌어?”

“제가요? 저 요새 운동하고 잘 먹고 잘 쉬어서 몸무게 좀 붙었는데요?”

“무슨 소리야. 얼굴이 반쪽이 됐구만. 안 되겠다, 엄마가 가서 김치찜 해 줄게.”

“김치찜……이요?”

“아들 엄마 김치 좋아하잖아. 그래서 집에서 직접 김치 가져왔어~”

“……김치를요?”

정우가 당황할 때 옆에 서 있던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마라. 너한테 직접 요리해 준다고 한우니 김치니 이것저것 엄청 챙겼다가 고기는 반입이 안 된다고 비행기 입국할 때 다 내다 버렸다. 니 줄 거라고 나는 한우 한 점도 안 구워 주고 그걸 다 버리는데 얼마나 아깝든지…….”

“진짜 그것 때문에 공항 직원이랑 한바탕했다니까? 왜 고기를 반입 못 하게 하는 거야?”

“어휴…… 당신 그거 엄청 민폐인 거 알아? 당신 같은 사람을 보고 진상 고객이라 하는 거야.”

“뭐요? 진상? 이 인간이 진짜……!”

또 티격태격하는 두 분을 보며 정우가 끼어들었다.

“워워, 두 분 미국까지 와서 왜 싸우고 그러세요. 그만 하세요.”

“아니, 아들! 니 아빠가 하는 얘기 못 들었니? 니 엄마한테 진상이란다! 참말로 내가 몬 살겠다, 몬 살겠어!”

“내가 할 소리!”

공항에서 소리치는 두 사람을 보고 모두가 쳐다봤다.

정우의 옆에 서서 눈치를 보던 지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추태(?)를 보이게 된 정우가 허겁지겁 두 사람을 말렸다.

“아니, 자꾸 왜 이러세요. 저 일행도 있는데 좀 자중하시고 싸우더라도 나중에 싸우세요. 창피해 죽겠네.”

“뭐? 일행? 누구?”

“여기 서현 씨 왔잖아요.”

“……서현 씨?”

부모님이 동시에 옆에 서 있던 지서현을 쳐다봤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녀가 로봇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지서현이라고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아버님, 어머님?

하긴 정우가 대표인데 대표의 부모님을 부르려면 저렇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의 얼굴이 한순간에 돌변했다.

티격태격하느라 짜증이 서려 있던 표정들이 한순간에 온화해졌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너그러움이 그곳에 모인 듯한 인자한 얼굴로 아버지가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정우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아이고…… 색시가 참 참하고 예쁘네. 저는 정우 엄마예요.”

“네, 안녕하세요….”

“근데…… 이름이 서현 씨라고?”

“네, 맞습니다. 어머님.”

“어쩜 이름도 지적이고 이리 이쁠까. 그래, 우리 정우 여자 친구?”

……응? 엄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우가 당황해서 지서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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