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 어제 말이야…….
그래핀 태양전지라는 말에 머스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래핀 태양전지요? 설마 네뷸라에서 그래핀 태양전지 개발에 성공한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면 제가 이야기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미스터 리한테 언급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게 개발이 되었단 말입니까?”
“하하하…… 좀 빠르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머스크.
미래 기억을 통해서 그래핀 태양전지의 개발 실마리를 알아 왔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정우가 멋쩍게 웃었다.
“물론, 아직 저도 실체를 확인한 건 아니라 설레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연구팀이 그래핀 태양전지에 성공했다고 하니, 조만간 그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프로토타입이라도 꼭 보고 싶군요. 만약 기존 태양전지에 비해 단 1%라도 뛰어나다면 저는 미스터 리의 그래핀 태양전지를 사용하겠습니다. 파나소닉의 태양전지는…… 어후. 이제는 그만 보고 싶네요.”
아직 구체적인 스펙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당장이라도 네뷸라의 그래핀 태양전지를 사용하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무한한 신뢰가 느껴진다.
정우가 웃으며 물었다.
“하하하, 그렇게 파나소닉이 싫으신가요? 그래도 기가팩토리 사업의 일등공신 아닙니까.”
“저와 파나소닉의 관계가 네뷸라와 테슬라의 긴밀한 협업 같은 의리가 있을 거라 오해하셨나 봅니다. 뭐, 그렇게 비쳐야 투자자 이탈이 없긴 해서 의도한 거긴 합니다만, 실상은 의리 따위는 없어요. 결국, 제가 비즈니스를 잘해서 파나소닉도 솔깃해 뛰어든 거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지 않았으면 참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가팩토리 투자비용과 배터리 및 태양광 전지 독점계약으로 얻을 이익을 저울질하다가 이득이 될 것 같으니 파나소닉도 뛰어든 거다?”
“그렇습니다. 그게 비즈니스의 기본이니까요.”
머스크의 말대로다.
비즈니스는 결국 이해관계가 맞물려 돌아가게 되어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
그런 점에서 언뜻 보면 냉정해 보일 수 있는 머스크의 태도가 이해가 되는 정우였다.
반면에 지금은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머스크와 자신의 사이도 언젠가는 얼음처럼 차갑게 되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려나.”
“무슨 날이요?”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미스터 머스크. 우리 우정은 변하지 말자구요.”
“하하하, 제가 미스터 리를 배신하면 시장에서 도태될 텐데,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뭐야, 그런 비즈니스적인 이유에서 저와 만나는 거였어요? 그럼 실망인데.”
“당연히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미스터 리의 인격적인 품성이 좋아서 만나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좋은 사람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만든다고 생각하거든요. 성공하는 사람 옆에 있어야 성공하는, 뭐 그런 겁니다.”
“성공하는 사람 옆에 있어야 성공한다…… 좋은 말이네요.”
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 이 사회는 인맥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런 점에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성공한 사람으로 비친다는 점이 감회가 새로웠다. 그것도 이미 세계 수준의 부자이자 테슬라라는 거대한 제국의 CEO인 머스크에게서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그랬다.
“아무튼, 머스크의 눈에 제가 성공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거군요. 그 이미지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겠어요.”
“하하하, 서로 이끌어 주자구요. 미스터 리도 성공하고, 저도 성공하고.”
“머스크는 이미 성공한 거 아니었어요?”
“앞으로 성장할 미스터 리의 잠재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에이. 우주산업도 하시면서 겸손은요. 그럼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해 건배할까요?”
“좋죠. 치어스Cheers.”
두 사람의 소주잔이 맞부딪쳤다.
부딪친 술잔이 내는 맑은 소리는 마치 앞으로 테슬라와 네뷸라의 돈독하고 밝은 비즈니스 관계를 암시하는 듯 보였다.
* * *
기분 좋은 술자리가 길어진 나머지 모두가 거나하게 취했다.
“으하하하, 나 심슨이랑 근처에서 한잔 더 하고 갈 거니까,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어휴, 저 인간은 여기까지 와서 술은……!”
어머니가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 했지만, 신난 아버지는 심슨과 죽이 맞았는지 되지도 않는 콩글리시와 바디랭귀지를 섞어 가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정우가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끄윽…… 아부지. 그렇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다만, 정우 역시 주당인 머스크와 한잔하느라 거하게 취한 상태라는 것이다.
얼굴이 불콰해진 정우를 보며 어머니는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아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끄윽…… 괜찮아요. 아부지… 아부지 좀 챙겨 주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가서 쉬어. 서현아, 남자 친구 좀 부탁할게?”
“……예?”
어머니의 부탁에 ATRC부터 술자리까지 조용히 동행했던 지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정신이 있던 정우도 남자 친구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어? 어…… 엄마.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피곤하니까 얼른 호텔 가서 쉬던가. 아니다. 나도 피곤한데 가서 쉬어야겠네. 같이 갈까?”
“그러시죠. 탁 본부장님. 저희 호텔로 픽업 좀 부탁드릴게요.”
“맡겨만 주시죠.”
영업맨 출신답게 주량이 대단한 탁세훈은 정신이 멀쩡한 듯 보였고, 쉽게 리무진 택시를 불렀다.
‘리무진이라…….’
전 같았으면 부담스러웠겠지만, 리무진도 몇 번 타 보니 익숙해졌다. 오히려 넓은 실내라서 편한 점이 좋아졌다.
정우는 아늑한 시트에 몸을 눕다시피 맡긴 채 몸을 늘어트렸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 음?
“근데 서현아. 어떻게 우리 아들 만나게 된 거야?”
“어, 그게…….”
함께 리무진에 탄 어머니의 질문이 하루의 마감을 허용치 않았다.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던 지서현.
다행히 정우가 수습하기 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처음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음? 정말로? 그럼 별로 안 좋았던 거야?”
“예, 어머님. 제가 성격이 그리 좋지 않고 고집스러운 점이 있어서…… 그래서 선배님, 아니 대표님과 많이 부딪쳤었습니다.”
지서현의 말에 정우도 그녀의 신입 시절이 생각났다.
“아아, 맞아. 서현 씨…… 아니, 서현이가 또라이긴 했지.”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여자 친구한테 또라이가 뭐니?”
“아니 엄마, 진짜예요. 쟤 지 할 일 다 했다고 게임하던 애라니까? 악! 왜 때려요!”
“자기 사람 흉보면 니 얼굴에 침 뱉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소리를 왜 하니.”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맡고 나서야 정우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는 안 끼어들겠습니다. 됐죠?”
“그래. 아무튼 서현아. 그랬는데 어쩌다 사귀게 된 거야?”
“그건…… 음. 사건이 있었어요.”
지서현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빛이 몽롱해졌다.
평소라면 이런 속내를 얘기하지 않을 그녀지만, 술 한잔했다고 용기가 난 걸까.
아니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정우의 어머니가 고마워서였을까.
어쨌든 그녀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입사했을 때, 솔직히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실력이면 더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거든요. 사실 진성이나 대한 등 이름을 대면 알 법한 대기업에서 입사 제안도 받았구요.”
“엄마 들었죠? 서현이가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듣고 있어. 그런데 왜 성운이노베이션에 취직한 거니?”
“……그냥 간섭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일하고 싶었습니다.”
어머니의 예리한 질문에 지서현이 슬쩍 얼버무리더니 계속 이야기해 나갔다.
“그래서 그럴까요. 솔직히 선배님이 우스워 보였어요. 프로그래밍 실력도 저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로? 와, 그건 좀 충격인데.”
“……충격받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남자 친구한테 죄송하다고 하니?”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 흠흠. 근데 엄마, 서현이 말 좀 그만 끊어.”
“아들, 니가 끊었지, 내가 끊었니? 아무튼, 알겠어. 잠자코 들어 보자구.”
어머니는 연애 이야기에 신이 나셨는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지서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그동안 쌓아 둔 게 많아서일까.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말문이 트인 그녀는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땐 제가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선배님도 같잖게 보였고, 팀원들도 실력이 별로라고 생각했어요. 느릿느릿하게 일 처리하는 게 한심해 보였고, 일 빨리 끝내 놓고 남는 시간을 즐기는 게 승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이 터졌죠.”
‘그 사건’을 언급하며 지서현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졸린 듯 눈이 풀려 가던 정우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하음…… 왜 날 봐?”
“……그 사건 기억 안 나십니까?”
“무슨 사건?”
“디에스 레이저 각인 설비 스크립트 오류 났던 사건이요.”
“아아아, 뭔지 알지! 그걸 모를 수가 있나. 그, 우리가 스크립트 짰던 파트에 오류가 있어서 디에스에서 각인 진행한 상품 다 폐기했던 사건 말하는 거지?”
“예, 맞습니다.”
“어휴…… 그때 디에스에서 회사에 손해배상 청구다 뭐다 난리 나긴 했지.”
성운이노베이션 시절, 디에스라는 기업에서 레이저 각인설비를 의뢰하여 납품한 적이 있다.
그때 스크립트를 소프트웨어개발팀이 맡았는데, 그중 오류가 난 스크립트 파트를 정우와 지서현이 맡았던 것.
그 사건으로 디에스에서는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었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면서 회사는 난리가 났었다.
“당연하게도 회사는 책임 소재를 따지기 시작했고, 저는 겁이 났습니다. 그 오류는 제 실수였거든요.”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인지 어머니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지서현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토록 자만하고 오만했었는데, 막상 제 실수로 사건이 커지게 되니 도망치기 바빴어요. 솔직히 숨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배님이 나서 주셨죠. 제 대신 자기 실수라고, 시말서도 대신 쓰시고 징계도 대신 받으셨습니다. 정말…… 엄청 깨지셨죠.”
“정말로? 우리 정우가 그랬어?”
“예. 그래서 너무 죄송했습니다. 근데 선배님은 제 탓을 하지 않으셨어요. 대신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사수가 똥 싼 건데, 당연히 사수가 치워야 한다고요. 부사수는 책임을 질 수 없으니까 부사수라고요. 교육을 잘못시킨 사수 잘못이라고요…….”
그때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지서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선배님.”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아들 좋아한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때부터 자꾸 선배님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계속 신경 쓰이고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선배였는데.
그렇게 짜증 내고 무시하던 선배였는데.
그 사건 이후로 관심이 갔다.
마음이 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되었다.
이 남자, 배려가 넘쳤다.
위에서 쏟아지는 부담과 업무도 자기 선에서 컷하고.
지서현을 좋아하던 양규철의 부담스러운 관심도 적절히 쳐 내주곤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몰랐다니.
게다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전가하지 않았고.
힘들지만, 티를 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맡은 바를 소화해 냈다.
앓는 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내는 사람.
……멋있었다.
그래서였다.
점점 그가 신경 쓰였다.
괜히 잘 보이려고 화장도 해 보고.
옷도 신경 써서 입었다.
서현 씨 오늘 다른 안경 쓰고 왔냐면서 사소한 디테일도 알아 주는 세심함까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와 일하는 하루하루가 설렜다.
지서현의 얘기를 듣던 어머니가 안타까워했다.
“아이고…… 그럼, 우리 아들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정말 아팠겠네.”
“……네.”
정우의 결혼 발표는 그녀에게 그만큼 충격이었다.
솔직히 그가 CS팀의 안예슬이 예쁘다며 대시할 때는 저러다 말리라 생각했다.
저런 눈치 없는 곰탱이를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웬걸.
적극적인 그의 태도에 안예슬도 싫지 않은 눈치였고.
결국, 정우는 안예슬과 결혼을 발표하게 되었다.
당시 축하하는 개발팀원들 사이에서 지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땐 몰랐습니다. 제 눈에 좋아 보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 눈에도 좋아 보이게 되어 있다는 걸요.”
“맞아. 내가 그래서 우리 정우 아빠를 꽉 잡았잖니. 호호호. 그 사람 지금은 저래도 왕년에는 진짜 멋졌었거든~”
“어머님은 현명하셨군요. 근데 미련한 저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아니야, 서현이가 뭐가 미련해. 엄~청 똑똑하지.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어머니의 위로를 들으며 지서현이 정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때는 남의 남편이 되어 버린 남자.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고 마음을 접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를 볼 때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랠 여력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랬던 그가 다시 싱글이 되어 돌아왔다.
다시…… 그녀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선배님의 이혼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러면 안 되지만 솔직히 기뻤어요. 어머님, 저…… 나쁜 여자인가요?”
“기다리지 않고 불륜을 저질렀다면 나쁜 여자지. 하지만 서현이는 묵묵히 기다렸잖아? 그러면 된 거야.”
“……그런가요.”
이혼한 이후에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던 정우.
하지만 물어보면 티를 내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가끔은 나에게 기대도 괜찮은데.
그와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녀에게 어려웠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그녀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변하기로 했다.
항상 수동적인 스탠스에서 이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 퇴사하고, 개발팀장이 되고, 미국까지 따라갔다는 것.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던 그녀로서는 정말 큰 변화였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 만큼, 지금 그녀는 정우의 옆에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는 이미 고단한 듯 곯아떨어진 상태였지만.
“얘가 진지한 얘기하는데 잠을 자네.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이런 점은 지 아빠랑 똑 닮았어, 그냥.”
“……그래도 멋있습니다.”
“서현이 너 너무 콩깍지가 쓰인 거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이 콩깍지가 영원히 벗겨지지 않기를.
지서현이 소망할 때 리무진이 호텔에 도착한 듯 정차했다.
“자, 사모님들 도착했습니다. 어이쿠, 우리 대표님 고사이에 잠드셨네요. 이거 옮기려면 애먹겠네. 호텔리어 좀 부르겠습니다.”
문을 연 탁세훈이 관리인을 불러 정우를 호텔 방으로 옮겼다.
정우의 방 맞은편에 스위트룸을 잡은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며 윙크했다.
“서현아, 우리 아들 잘 부탁해~”
“예? 어머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서현 씨한테 왜 대표님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탁세훈이 끼어들려 하자 지서현이 도끼눈을 날렸다.
살기를 느낀 탁 본부장이 헛기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아, 갑자기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네. 사모님,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래요, 탁 본부장님! 조심히 가요~ 서현이두 잘자~”
어머니도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입구에 서 있던 지서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정우가 누워 있는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든 정우가 보인다.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볼이 귀엽다고 여기며, 지서현은 곯아떨어진 그의 얼굴을 향해 몸을 숙였다.
쪽-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 * *
다음날.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술 한잔하고 늦게 귀가한 아버지의 안색은 그야말로 시체와도 같았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어우…… 말도 마라. 죽겠어. 심슨 그 코쟁이 놈이 얼마나 술을 먹어 대던지.”
“심슨 씨는 덩치가 있는데 당연하죠. 아버지는 적당히 조절하시면서 드시지.”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그리고 한국의 매운맛을 이때가 아니면 언제 보여 주겠어? 안 그러냐?”
“매운맛은 개뿔.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요.”
“……끙.”
아버지가 골골대는 얼굴로 스프를 한 숟갈 떠먹고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하…… 뜨끈한 국물이 그립구나.”
“나가서 한식당 가실래요? 뼈해장국 파는 곳 있는데.”
“그야 좋지.”
“아들, 니 아빠한테 맞춰 주지 마. 버릇 잘못 들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어쩌긴요. 일도 안 하고 술이나 퍼먹는 한량 그 자체지.”
“이 여편네가 진짜! 어제 심슨이랑 그 뭐다냐, 비지떡…… 뭐 있는데.”
“아부지, 비즈니스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다, 비즈니쑤! 거 비즈니쑤 하고 온 거야! 뭣도 모르면서 바가지 좀 그만 긁어!”
“하이고, 요새 비즈니스는 술만 먹으면 되나 보네. 나도 할 수 있겠다, 그 비즈니스!”
“진짜라니까. 이거 봐봐.”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거기엔 아버지의 유튜브 채널, <정우아빠>가 켜져 있었는데, 어제와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구독자 10만이요?”
“봤냐? 니 아빠 이제 무려 10만 유튜바다, 으하하하하!”
놀랍게도 어제 정우가 봤을 때 단 2명에 불과했던 유튜브 구독자 수가 하루 만에 10만 명을 돌파한 것이었다.
“설마…… 어제 그 ATRC 행사 때문에?”
“뭔지는 나도 모르겠고. 아무튼, 영어로다가 뭐라뭐라 댓글도 많이 달렸어. 하하하하. 봤지, 이 여편네야. 내가 이런 사람이야. 에헴!”
아버지가 기가 살아서 거들먹거렸다.
하늘로 승천하려는 듯한 아버지의 어깨를 보며 정우가 피식 웃었다.
“이야, 이러다 아부지 진짜 유튜브로 대박 나시는 거 아니에요?”
“아무렴. 안 그래도 심슨이랑 같이 제대로 유튜바 해 보려고. 같이 세미트럭 리뷰하기로 했어. 그래서 말인데, 정우야. 니 카드 좀 써도 되냐? 유튜바 하려면 제대로 방송 장비를 갖춰야 한다는데…… 나도 카메라 같은 것 좀 맞춰 보려고 그런다.”
“제가 용돈 넉넉히 드릴게요. 한 1억 드리면 되죠?”
“아들! 미쳤어? 무슨 방송 장비에 1억이야!”
“어허, 이 여편네가! 우리 아들이 준다는데, 당신이 왜 난리야!”
“내 아들 돈이니까 그렇죠! 아니 아빠가 되어서 도움은 못 될망정 자꾸 자식 등골 빼먹고 싶어요?”
“뭐야? 듣자듣자 하니까 진짜!”
“… 두 분 그만하세요. 서현이도 보는데 안 창피하세요?”
또 시작된 두 분의 티격태격에 정우가 지서현의 눈치를 보며 말렸다.
하지만 지서현은 신경 쓰지 않고 오물오물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정우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 꿈인가.’
사실 정우는 어젯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고 있는 사이, 지서현이 그의 입에 입맞춤하는 꿈이었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녀를 보며 의심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는 정우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자세로 팬케이크를 썰던 지서현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쳐다보십니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 어제 말이야.”
정우가 용기를 내서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스마트폰이 우우우웅 계속 진동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메시지용 알람이 아닌, 무언가 경고하는 듯한 급박한 진동이었다.
뭔가 싶어서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하나의 팝업창이 떠올랐다.
─────────
[경고! 비트코인이 목표가 도달했습니다!]
[비트코인 목표가: 17,000USD]
[비트코인 현재가: 17,214U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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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지서현이 만든 API 어플리케이션의 목표가 도달 알람이었다.
비트코인의 가격이 정우가 설정해 둔 목표가 17,000불에 도달한 것이다.
그때 지서현도 자신의 스마트폰을 통해 코인 가격 알람을 확인했는지 정우를 불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했다.
“……대표님!”
“……맞아. 드디어 때가 왔어.”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했다.
저물어가는 12월의 어느 날.
드디어 길고 긴 1년의 기다림이 끝났다.
이제 매도의 시간이다.
* * *
일단 제일 먼저 한 건 친구들에게 매수 진입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날린 일이었다.
─────────
[정우]: 때가 왔어
[정우]: 이제부터 난 비트코인은 매도만 할 거야
[정우]: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보거든
[정우]: 그러니 절대 섣부르게 매수 들어가지 마라
[봉수]: ㅇㅋ 라저댓
[봉수]: (경례하는 이모티콘)
[KKD]: ㅇㅋ
[동현]: 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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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모두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하도 수익 자랑과 인증을 많이 해서 대충 파악한 결과, 이미 친구들의 수익은 백억 원대를 돌파한 상황이었다.
직장인으로서는 절대 벌 수 없는 수익을 불과 몇 달 만에 벌어들인 것이다.
인생역전.
정우의 도움으로 말 그대로 인생역전을 하게 되었으니 오죽하랴.
이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 믿을 정도로 친구들은 정우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가득했다.
다만, 로봇처럼 수동적으로 그의 말을 듣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학습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
[KKD]: 근데 정우야, 이제 하락장 시작되는 거면 숏은 들어가도 되는 거지?
[정우]: 내가 선물은 따로 안 알려 줬는데 숏 치려고?
[KKD]: ㅇㅇ 명색이 펀드매니저였는데 나름 할 줄은 알지
[KKD]: 근데 하면 안 됨?
[정우]: ㄴㄴ 상관은 없음
[정우]: 대신 청산 안 당하게 청산가 잘 조절해라
[봉수]: 선물 나도 들어 보기는 했는데
[봉수]: 지난번에는 하지 말라며
[정우]: 그때는 코인 초보라 선물 잘못했다가 청산위험 있으니까 말렸던 거고
[정우]: 매매 이 정도 해 봤으면 이젠 감 다 익혔잖아
[정우]: 해도 상관없다고 본다
[정우]: 그리고 선물도 코인 현물이랑 비슷해
[정우]: 다만 더 약간 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뿐이지
[정우]: 청산만 안 당할 수준으로 운용하면 수익 굴리기 좋으니까 해 보고 싶으면 한번 해 봐
[정우]: 참고로 나는 비트코인 18,000불, 이더리움 1,200불부터 숏 포지션 매집할 거야
[봉수]: ㅇㅋ
[KKD]: 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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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친구들 관리는 끝났고.
정우는 곧장 비트코인 매도에 들어갔다.
아니, 매도를 누를 필요도 없이 이미 매도는 한참 전에 17,000불부터 분할매도를 걸어 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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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CUSDT-Long(Cross 0.05x)]
[Quantity: 424,809.61BTC]
[Entry Price: 929.68]
[Mark Price: 17,258]
[Liq. Price: 0.5]
[Value: 7,036,427,251.15USD(+6,9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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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만 9천 개였던 비트코인 포지션은 17,000불, 17,100불, 17,200불에 각각 25,000개씩 매도되어 현재는 42만 4천 개가 남았다.
하지만 그렇게 매도했음에도 현재 비트코인의 포지션 가치는 무려 70억 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거의 9조 원에 가까웠다.
익절한 비트코인 75,000개의 수익금도 합산 13억 달러로, 한화로 1억 5천만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 아직 이더리움의 매도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
현재 이더리움의 가격은 900불.
그가 매도 목표가로 잡아놓은 1,200불까지 아직 300불 정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어.’
비트코인을 시작으로 이제 다른 코인들의 마지막 순환펌핑이 나올 테고.
화려한 불꽃놀이를 마지막으로 비트코인은 2년이 넘는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 것이다.
정우는 그 암흑기를 넘어 코로나 이후 2021년 비트코인 6만 불의 시대까지 쉬지 않고 돈을 복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의 계획은 진행 중이었다.
[+54,546.9USDT]
[+78,234USDT]
[+123,817USDT]
[+188,299.1USDT]
……
무수히 떠오르는 API 자동매매봇의 체결 로그들.
정우의 보유 코인들이 달러로 바뀌기 시작했다.
* * *
컴퓨터 앞 매트리스 위에서 한 폐인이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으으- 죽겠다.”
앓는 소리를 하는 남자.
그는 바로 남보원이었다.
떡 진 머리와 후줄근한 사각팬티만 봐서는 딱 방구석 폐인 꼴이지만, 사실 이제 그는 백억원 대 자산을 가진 부자.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사는 집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한강뷰 아파트였다.
불과 1년 만에 그는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고 인생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그가 방송만 하면 시청자들이 광대라고 놀려 대지만, 속으로는 우스웠다.
떡상 중인 이더리움 포지션을 보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우정님에게 감사 인사를 올려야지. 우정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디 계신지 몰라 동서남북에 한 번씩 절을 올린 남보원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방송을 켰다.
기다렸다는 듯 몰려오는 시청자들.
이제 그는 네임드가 되어서 방송만 켜도 수천 명이 그의 코인 방송을 시청하곤 했다.
“어우, 죽겠습니다. 형님들. 어제 퀀텀 많이들 자셨습니까?”
어제 새벽 퀀텀 코인의 떡상에 많은 이들이 밤잠을 설치며 단타를 쳤다.
남보원도 마찬가지였는데, 꽤나 수익을 거두고 기분 좋게 잠을 청한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코인 얘기에 시청자 채팅창이 폭발했다.
퀀텀 몇 층에 물렸다느니, 퀀텀은 스캠 코인이라느니, 앞으로 대세는 다른 코인이 될 거라느니.
선동과 비방이 오고 가는 아수라장을 남보원은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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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완아, 큰일 났다! 우정2 포지션 줄어들었다!
……
하나의 채팅글이 남보원의 눈을 사로잡았다.
“뭐? 우정2 포지션이 줄어들었다고?”
코인 폐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 소리는 남보원에게 있어서는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의 지갑이 출금되었다는 소리만큼이나 거대한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