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꼭 갚겠습니다
정우의 말에 탁세훈이 만류했다.
“이미 사내 복지 시스템이 있지 않습니까? 교육비, 상조비, 의료비, 결혼비 모두 지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더 지원하시려구요?”
“그건 성운이노베이션 시절부터 내려온 복지 시스템이라 대기업에 비하면 미미하지 않습니까?”
“그건 맞습니다만, 저는 그런 퍼 주기식 지원 정책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탁세훈 본부장의 태도에 정우가 설명했다.
“흠, 무언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도 퍼 준다는 건 아닙니다. 사정을 보고 정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한 직원들을 돕고 싶거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그 모듈팀의 박상구 과장님이었나? 그 어머니가 치매라서 모시느라 힘들게 회사 다니시잖아요. 그런 분들 돕고 싶다는 겁니다. 뭐 막말로 도박 빚이 생겼다느니, 유흥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느니, 이런 막 나가는 직원까지 도울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그저 선의에서 우러나온 즉흥적인 발상이었지만, 나름의 판단이 서 있었다.
정우의 진지한 얘기에 이해한다는 듯 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요?”
“누군가를 지원해 줬다고 합시다. 지원을 받지 못할 다른 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박탈감?”
“예. 지원이나 혜택을 받지 못한 직원들은 차별 대우라고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에이, 설마요. 지원금이 병원비 같은 거로 들어갈 텐데, 그걸 질투한다고요?”
“기존에 질서가 마련된 상태면 모두가 납득하고 따랐을 테니 박탈감을 느끼진 않겠죠. 하지만 대표님은 그냥 불쌍한 직원을, 적절히 마련된 기준도 없이 도와주신다는 거 아닙니까?”
“음…….”
“대표님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거기서 더 지원하려면 새로운 기준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저 대표님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가슴 아픈 사연이면 돕는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런 그냥 퍼 주기식 복지는 위험합니다. 정확한 기준이 마련되어야 해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기준이요.”
“음…….”
날카롭다. 확실히 탁세훈 본부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평소에는 유쾌하고 장난스럽지만, 역시 일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예리하고 타협하지 않는 면모.
“……제가 이래서 탁 본부장님을 뽑았죠.”
“예?”
“본부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제가 너무 즉흥적으로 얘기했나 봅니다. 조언해 주셔서 고마워요. 사내 복지에 대한 건 좀 더 논의해 보도록 하죠.”
정우의 태도 변화에 탁세훈이 눈을 크게 떴다.
“오, 벌써 수긍하신다구요?”
“왜요? 맞는 말인 것 같아서 그대로 하겠다는 건데?”
“이야- 그게 보통 대표님 정도 위치에 오르면 인정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탁세훈이 감탄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강한데, 그래서 이를 부정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게 되면 보통 거부하고 반발하게 되거든요. 그 생각과 에고는 나이가 들거나, 경험을 많이 쌓거나, 어떤 분야에 정점에 이를수록 강해집니다. 그런 생각해 보신 적 없으세요? 왠지 어릴 때보다 내 주관이 굉장히 뚜렷해진 것 같은 느낌이요.”
“음……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쵸? 보통 사람도 그럴진대, 근데 대표님은 이미 한 분야에 정점에 오르셨습니다. 그것도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사업에서 말이죠. 사업가로서 정점에 이른 인물이 다른 누군가의 의견을 수용한다? 쉽지 않죠. 왜냐하면 그 정도 위치에 오르기까지 얻은 경험을 절대적이라고 믿게 되거든요. 그만큼 자신만의 가치관, 기준, 이런 자의식이 강해져서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기 어려워집니다.”
“음…… 그래요? 전 맞는 말인 것 같으면 그냥 받아들여지던데.”
정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탁세훈이 웃었다.
“그게 재능이라는 거죠. 하하하, 제가 이걸 아는 이유는 저도 그런 고집이 있거든요. 그런데 발전하려면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겠더라구요. 나보다 잘된 사람, 더 잘나가는 사람, 성공한 사람은 세상에 모래알처럼 많으니까요. 물론 그냥 어중이떠중이의 말은 걸러 듣는 자세가 필요하겠지만요. 그런 점에서 대표님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탁세훈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이정우 대표.
일개 개발자에서 이제는 세계를 뒤흔드는 거대한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그것도 아직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 할 수 없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가히 세계 1위라 자부할 정도로 대단한 회사의 대표가 말이다.
따라서 그만큼 자부심과 에고가 단단할 게 분명했는데, 그런 사람이 같은 동급의 대표나 회장이 아닌, 일개 부하 직원의 조언을 듣는다?
‘쉽지 않지.’
단순한 겸손에서 나오는 겉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수용하는 그의 태도에서 탁세훈은 이정우 대표의 대단함을 몸소 깨닫고 있었다.
“아무튼, 복지 부분에 대해 재고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경호팀 지원 건도 없던 거로 하는 건가요?”
“아뇨. 그건 그냥 지원합시다.”
“네? 아까랑 말씀이 다르신데요? 그냥 지원하면 반발할 겁니다.”
“법인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제 사비를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사비를요?”
생각지도 못한 정우의 대답에 탁세훈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를 보며 정우가 되물었다.
“본부장님, 지금 제 목숨값이 220만 달러보다는 비싸겠죠?”
“예? 그거야 당연하죠. 200만 달러가 뭐야. 수십조 원, 아니 수백조 원은 훌쩍 넘겠죠. 근데 그게 왜요?”
“저분들이 언젠가 제 목숨 한 번은 구해 주실 것 같은 느낌이라서요. 고작 2백만 달러로 목숨 하나 산다고 치자고요.”
정우의 말에 탁세훈이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해했습니다. 근데 한두 푼도 아니고 2백만 달런데, 안 아까우세요? 강 팀장이 이끄는 팀이 스펙이 꽤 화려하긴 하지만, 아직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좀 오버페이 같은데…….”
“오버페이 아니에요. 어차피 지금 구할 수 있는 경호팀 중에 저 사람들이 최고잖아요. 그럼 저한테는 최고인 거고, 저는 최고에게 지불하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음…… 당장의 최고라…… 대표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듣고 보니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쵸? 제 개인 돈이라 형평성에도 문제없고, 아픈 아이도 빨리 나을 거고. 물론 제 돈을 받을지 여부는 경호팀장과 얘기해 봐야겠지만요.”
“겸사겸사 강철준 팀장과 같은 인재한테 빚도 지워 놓고요? 나쁘지 않은데요?”
“음?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요?”
“뭐라구요? 하하하.”
계산하고 행동한 줄 알았더니, 그냥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던가.
“역시 대표님답네요.”
“예? 저다운 게 뭔데요?”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좋습니다. 지원 건 바로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부장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선뜻 강철준 팀에게 2백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탁세훈도 그렇고, 정우도 몰랐다.
강철준 팀장과 그의 팀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팀이었고, 그들이 정우를 경호하게 된 데에는 굉장한 운이 따라 줬다는 것을 말이다.
* * *
경호 교대를 마친 강철준 팀장은 로버트와 휴식에 들어갔다.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로버트는 원래 꽤 활달한 친구였다.
하지만 딸이 아픈 이후로 그는 많이 조용해지고 침울해졌다.
오늘도 호텔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딸의 사진을 보고 있는 그를 보며 강철준이 입을 열었다.
“로버트, 그만 보고 잠 좀 자 둬. 이따 교대하려면 체력 좀 비축해 놔야지.”
“괜찮습니다. 이라크의 사막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하루에 2시간만 자도 충분해요.”
“고집은. 알았어. 피곤하면 이따 눈 좀 붙여 두라고.”
강철준이 따로 떨어진 싱글베드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로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캡틴,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뭐가. 그 얘기는 그만하기로 했잖아.”
“제 고집 때문에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모두한테 미안해서요.”
실제로 이들이 이곳에 있는 데는 로버트의 말대로 그의 고집이 컸다.
강철준이 이끄는 블랙호크 1팀은 여러 가지 임무를 성공리에 성공한 굉장한 팀이었는데, 그래서일까.
팀원들 모두를 가족 같이 여겼고, 실제로 가족처럼 지냈다.
그러다 팀원 로버트의 딸 로나가 아픈 바람에 로버트가 먼저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나중에 강철준의 팀도 귀국하여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
로나가 앓는 게 척수성 근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이라는 소식에 강철준과 팀원들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치료비를 벌어다 주겠다고 결의했다.
“그러게 우리가 제안했을 때 받아들였으면 이렇게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잖아. 한 달이면 끝나는 일인데 왜 고집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고작 2백만 달러야. 로나를 봐서라도 지금이라도 결정해. 우린 당장 아프리카로 떠날 수 있으니까.”
사실 강철준의 팀에게 있어 2백만 달러는 그리 큰돈은 아니었다.
한두 달만 바짝 고생하면 벌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6개월짜리 임무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최전방이 아니라는 이유와 로버트의 고집 때문이었다.
로버트가 아픈 딸 로나를 자주 보길 원했기에 최전방 국가에 할당된 임무는 당연하게도 수행할 수 없었던 것.
그렇다고 로버트를 두고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니, 그가 자기 딸 치료비를 구하려다가 팀원들이 다치거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면목이 없다면서 극구 반대했다.
결국, 로버트도 포함해서 다 같이 할 수 있는 임무를 고를 수밖에 없었고, 최전방이 아닌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계약 중에서 그나마 네뷸라 대표를 경호하는 임무가 페이가 가장 높았기에 이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9개월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지 않았고 길었다.
딸이 계속 아파하고 있었기에 처음 고집을 부렸던 로버트는 슬슬 흔들리고 있었다.
“……캡틴, 지금이라도 저 혼자 개인 경호를 맡는 쪽으로 계약 내용을 변경해 볼까요?”
“이 대표 경호 건 말이야? 얘기해 봤지만, 네뷸라에서 요구한 조건은 최상급이야. 팀 전체가 아니면 안 돼.”
“으음…….”
“그냥 계약 파기하고 아프리카로 가자. 너는 미국에 남아서 딸을 돌봐주고.”
“하지만, 캡틴. 우리 블랙호크 1팀이잖아요. 단 한 번의 임무도 실패한 적 없는! 근데 계약을 파기한다고요? 최전방도 아닌 곳에서요? 제 자존심이 용납 못 합니다.”
“뭐 어때. 가족이 제일 중요하지.”
“하지만……!”
로버트가 소리쳤지만, 강철준은 담담할 뿐이었다.
“됐고. 아무튼, 결정한 것 같네.”
“……죄송합니다.”
“고집 때문에 좀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라도 바른길로 가니 다행이지. 알겠다. 내가 이 대표한테 얘기해 볼게. 조만간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도 하고.”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말 안 듣는 부하의 고집이 꺾였다.
결국, 그도 아버지였던 것이다.
미안한 듯 고개를 들지 못하는 로버트를 보며 강철준이 피식 웃어넘기고는 잠을 청하려 했다.
아마도 내일 바빠질 것 같다 여기던 그때였다.
우웅- 진동 소리와 함께 스마트폰이 울렸다.
오랜 세월 에이전트로 활동하면서 정보는 생명이라는 걸 최우선 원칙으로 삼고 있던 강철준은 그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곤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XXXXX Bank]
-Deposit: 2,200,000USD
-Depositor: Lee JungWoo
─────────
거기엔 220만 달러라는 믿기지 않는 금액이 입금되어 있다는 내역이 찍혀 있었으니까.
“도대체 누가……?”
“캡틴, 무슨 일 있어요?”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이미 강철준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입금자명에 적힌 Lee JungWoo라는 이름.
그가 아는 이정우는 한 명뿐이다.
“……이 대표!”
* * *
당연하게도 갑자기 2백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입금하자 강철준 팀장이 곧장 정우를 찾아왔다.
“……아니, 220만 달러를 그냥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사정을 들었습니다.”
“……어떤 놈입니까? 어떤 놈이 그걸 떠들어 댔습니까? 로버트? 피터? 데이비슨? 대표님 움찔하는 거 다 보입니다. 딱 보니 피터 같군요. 이놈 자식을 그냥……!”
강 팀장의 눈빛이 일변하며 싸늘해졌다.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정우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게 중요한가요. 애가 아프다는 게 중요하지.”
“그건 맞습니다만…… 좀 부담스럽군요. 아니, 부담이 된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저희가 2백만 달러를 벌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자존심이 있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강 팀장님과 팀원들의 실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진짜죠.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하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줄 의도는 없습니다. 그냥 우리 하나만 생각합시다. 아이가 아프니 치료를 서둘러 받게 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냥 제가 드린 2백만 달러로 바로 애 치료제 비용으로 쓰시고 영수증만 첨부해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뭐 바라는 건 없습니까?”
“있긴 하죠. 저는 강 팀장님과 경호팀이 6개월 단기 계약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근로 계약하면 좋겠네요.”
“……정규 계약은 좀 어렵습니다. 제 소속 회사인 블랙호크 컨트랙터와 얘기해 봐야 합니다.”
“뭐 정 안 되면 1년으로 계약 연장하는 것도 괜찮구요. 최대한 편의는 맞춰 드릴 테니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정우의 설득에 결국 강 팀장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음…… 그래도 이런 전례가 없어서 팀원들과 논의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해합니다. 충분히 얘기해 보고 오세요. 긍정적인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강 팀장은 곧장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피터, 이 입만 산 똥 덩어리 같으니라고. 내가 쓸데없는 말 하고 다니지 말랬지?”
그가 눈에 불을 켜고 피터를 노려보자, 피터가 기겁했다.
“예? 캡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니가 로나에 대해서 얘기했다는데 오리발 내밀 거야?”
“아…… 그 본부장이라는 인간 입 더럽게 싸네.”
“피터!”
“죄송합니다, 캡틴. 하지만 뭐 어때요. 어차피 우리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로버트 딸 위해서 좋은 일 하는 건데. 안 그래? 너희들도 입이 있으면 말 좀 해 봐.”
피터의 선동에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피터 말이 맞아요, 캡틴.”
“맞아요. 굳이 숨길 필요가 있겠어요?”
“근데 그건 왜요? 위에서 뭐라고 해요?”
팀원들이 궁금해하자 강철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라고 한 건 아니고…… 이정우 대표가 치료비를 내줘서 말이야.”
“예?”
“치료비라면…… 로나 치료제 비용 2백만 달러요?”
“어. 이미 받았어. 그래서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강 팀장의 말에 팀원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세상에! 2백만 달러를 그냥 줬다고요? 미스터 리가 부자라고 소문은 들었는데 겁나 쿨한데요?”
“이거 고민할 게 있나요? 그냥 무조건 땡큐죠!”
“모여서 회의를 할 사항도 아닌 것 같은데요?”
팀원들의 말에 강철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돈을 쓰게 되면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게 돼. 말은 공짜지만, 이 대표한테 빚을 지게 된 거고, 네뷸라에 묶이게 될 가능성이 커. 그래도 받겠다는 거야?”
“뭐 어때요. 로나가 아픈데 하루라도 빨리 치료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죠.”
“맞아요. 최전방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여기서 저희가 먹을 거 안 먹고 아껴 가며 2백만 불 모으려면 9개월인데, 그 시간 동안 로나가 얼마나 아프겠어요. 전 그냥 받는 게 낫다고 봅니다.”
“로버트, 니 생각은 어때? 아빠 생각이 제일 중요하지.”
팀원들의 시선이 로버트로 불린 용병에게 향했다.
볼까지 덮은 수염이 인상적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캡틴, 저는 가능하다면 바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간절함이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강철준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모두의 의견이 그러하니 쓰도록 하지. 대신 우리 계약 조건이 바뀌게 될 거야.”
“어떻게요?”
“블랙호크에 얘기해 봐야겠지만, 6개월짜리 단기 계약에서 장기 고용으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커. 이 점은 염두에 두라고.”
“휘유- 맨날 최전방에서 언제 총알 구멍이 날까 조마조마하던 때에 비하면 맨날 천국인데요? 전 오히려 좋습니다.”
“최고급 뷔페에 멋진 잠자리, 그리고 페이까지 좋잖아요. 전 여기서 평생이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VIP 경호는 언제라도 환영이에요.”
“저도요.”
“저도요, 캡틴.”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던 강철준 팀장은 좀 놀랐다.
“이거 물어볼 필요도 없었군. 알겠어. 나중에 딴소리하지나 마라.”
그 길로 정우를 찾아간 강 팀장은 그들의 결정을 전했다.
“그 돈…… 사용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대표님.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뭐가요?”
“저희를 왜 돕는 겁니까?”
그 말에 정우가 피식 웃었다.
“이야, 그 질문 얼마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뭐, 대답하자면 가족이니까요.”
“가족이요?”
“예. 한번 우리 회사 직원이 된 이상 다 같은 가족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가족의 고충을 모른 체할 수가 없어서요.”
가족이라.
그의 블랙호크 1팀도 가족과 같은 관계였기 때문일까.
정우의 말에 강철준 팀장의 눈빛이 묘해졌다.
“음…… 이상한 대답이지만, 알 것도 같네요. 알겠습니다. 감사히 사용하고,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고 빚이라 생각하고 2백만 불도 꼭 갚겠습니다.”
“은혜랄 것도 없어요. 그냥 비즈니스죠. 저는 돈으로 강 팀장님의 팀을 고용했으니까요. 그러니 최고의 서비스로 갚아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빚이라…… 그렇게 해서 마음의 부담이 덜어진다면 갚으셔도 상관 없구요. 아무튼 부담 갖지 마시고, 아이 잘 치료해 주세요. 아, 그리고 로버트 씨랬나요? 로버트 씨한테도 안부 전해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이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잠시 경호팀을 떠난 로버트가 딸 로나를 데리고 신속하게 입원을 마쳤고, 미리 입금받았던 220만 달러로 딸이 앓는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제인 졸겐스마 처방을 의뢰하였다.
치료제 제작 기간은 2주.
-캡틴, 치료 성공률은 거의 100%라고 하네요. 이제 진짜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고생했어, 로버트.”
-아닙니다. 캡틴이 고생하셨죠. 아, 그리고 미스터 리한테 고맙다는 말씀 좀 꼭 전해 주십시오. 급하게 오느라 인사도 못 드렸네요.
“알겠어. 꼭 전해 줄게. 치료 잘하고 로나랑 건강하게 돌아와.”
-네, 캡틴!
딸의 치료제 시술을 앞둔 로버트와의 기쁨에 겨운 통화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일 처리는 마무리되었다.
팀원의 딸을 치료하기 위한 거의 1년짜리 장기 프로젝트가 정우의 지원으로 인해 허무하게 끝나 버리자 강철준은 좀 허탈한 기분이었다.
“……정말 부자라는 족속들은 이해할 수가 없군.”
강 팀장은 그들의 변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다행히 치료는 잘 마무리되었고, 로나의 희귀병은 놀라운 속도로 치유되어 갔다.
묘하게 일그러져 있던 아이의 얼굴이 정상 아이들처럼 밝아졌고, 그 영상은 정우에게도 전해졌다.
-로나, 저분이 너를 도와주신 미스터 리야. 인사해야지?
-대… 땡스……!
-하하하, 로나가 고맙다고 하네요. 미스터 리,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아이가 빨리 나을 수 있게 되었어요. 다음에 또 영상 보내 드리겠습니다.
로버트가 보낸 영상을 보며 정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귀여워.”
“네? 뭐가 그렇게 귀여우십니까?”
퍼스트 클래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서현이 물었다.
그 둘은 지금 한국행 항공편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거? 로나 영상 보고 있었어.”
“아, 대표님이 도와주셨다는 그 아이 말씀이십니까?”
“응. 이제 5살이라는데, 진짜 인형 같이 생겼어. 자, 봐봐. 이쁘지?”
“오…… 너무 귀엽습니다.”
“그치? 이래서 애를 갖나 봐. 나도 이런 딸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저도요.”
무심코 대답한 그녀.
그러다 이내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헛기침을 내뱉으며 스마트폰을 보느라 가까이 붙었던 몸을 바로 했다.
““흠흠!””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치료제라는 게 대단하더라고. 척수성 근위축증이라는 게 엄청 희귀한 질병인데, 유전자 구조를 뒤바꿔서 그걸 해결한다더라. 서현 씨는 이게 믿어져?”
“저희는 전고체 배터리도 상용화했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대표님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만.”
“뭐야, 그렇게 비행기 태우니까 쑥스러워지는데. 어쨌든 이 유전자 치료제도 진짜 대단하더라고. 그래서 좀 관심이 생겼어.”
“관심이라면……?”
“제약 회사 쪽에 한번 투자해 볼까 싶어.”
“제약이요?”
처음 듣는다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구상 중이던 계획 중 하나긴 해. 앞으로 제약 회사는 더욱 주목받을 거라 생각하거든.”
제약 회사 투자 건, 이는 회귀 직후 정우가 구상해 오던 계획 중 하나였다.
2019년 12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발발한다.
이후 2020년 2월에 전 세계에 패닉을 가져오는데, 그 과정에서 백신 생산을 주도한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의 제약 회사들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취하게 된다.
‘화이자 21년 매출이 400억 달러였지 아마?’
회귀하기 전 주식에 투자하면서 제약주 쪽으로도 관심이 있었던 정우였기에 화이자의 기업 정보를 분석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즉, 화이자의 2021년 매출액은 400억 달러, 무려 50조 원 가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정우가 제약 회사를 키워 화이자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매년 수십조 원씩 쓸어 담는 건 일도 아니겠지.’
다만 문제가 있었고, 이를 지서현이 지적했다.
“저는 좀 우려가 됩니다. 제약 회사는 원천 기술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초기 투자 비용과 기간이 매우 오래 걸리고요.”
“맞아. 그래서 기업 설립으로는 답이 없지. 인수 쪽으로 고민 중이야.”
“인수라면 어디를……?”
“글쎄. 괜찮은 매물이 있는지는 이제 알아보는 단계라서.”
“네뷸라의 사업 분야와 전혀 동떨어진 분야인 만큼, 신중히 접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 제약 회사는 내 관심목록 중 하나일 뿐이지, 진짜는 플랫폼 사업이지.”
“중장기 프로젝트 말씀하시는 거군요.”
“어.”
코인선물 포지션 익절 후 정우는 막대한 현금을 쥐게 되었다.
평생 써도 마르지 않을 무지막지한 양의 자금.
하지만 정우는 여기에 안주하며 이를 그냥 놀릴 생각이 없었다.
회귀하기 전 단순히 10억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그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그는 이제 없으니까.
세계 최고의 부자.
세계에 혁신을 가져오는 발명가이자 사업가.
전 세계를 선도하는 경영인.
이런 이상적인 목적들이 정우의 가슴을 뛰게 하고, 앞으로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수익실현한 현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자 했고, 마라톤 회의 끝에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코인거래소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네뷸라라는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 거야.”
하나의 플랫폼을 통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에서 출발하여 플랫폼 사업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래서 말인데, 서현 씨 친구 호경 씨랑은 연락해 봤어?”
“예. 조만간 미팅 한번 하자고 언질해 놨습니다.”
“잘했어. 한국에서 스케줄 끝나면 바로 가 보자고.”
그 일환 중 하나로 정우는 진호경의 ‘라이프’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전 세계 계정을 하나로 통합하는 사업이었는데, 사실 정우가 아는 미래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바가 없었다.
즉, 실패했을 가능성이 큰 사업이지만, 만약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그 파급력은 대단하리라.
그리고 정우에게는 이를 성공시킬 만한 자금이 충분히 주어진 상태다.
“호경 씨의 라이프 사업에 우리 코인거래소를 접목시키는 거지. 전 세계에 통합된 표준 계정을 사용하는 이들이 우리 거래소를 통해서 검증된 코인을 자유롭게 거래하는 거고. 그 코인으로 생필품도 사고 주식이나 부동산도 투자도 할 수 있다면? 장난 아니겠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신나서 말하는 정우를 보며 지서현이 미소 지었다.
“멋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해 보자고.”
“저도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해 주고 있는데 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또다시 흐르는 묘한 분위기에 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지나가듯 얘기를 꺼냈다.
“그…… 서현 씨, 이번에 한국에너지대상 시상 끝나고 어디 놀러 갈래?”
“시상식 끝나고요?”
슬쩍 던진 정우의 데이트 제안에 지서현이 그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그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오랜만에 한국 왔는데, 관광도 좀 해 줘야지. 맞다. 강원도에 스키장 한번 갈까? 겨울 되고 스키장 한 번 못 가 봤네.”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이는 그의 말에 지서현이 살포시 웃었다.
“저는 좋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바로 예약 잡을게. 시상식 끝나고 바로 그날부터 상관없지?”
“네. 근데 제가 예약해도 됩니다만.”
“아냐. 대표인데 직원 거는 내줘야지. 부담 가지지 말고 즐겁게 다녀오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예약 알아봐야겠다. 어디 보자…… 오, 좋은 방 많은데? 여기 온천도 있네. 겨울 스키 타고 온천이라…… 재밌겠다.”
정우가 신나서 호텔을 알아보고.
그런 그를 지서현이 그윽하게 쳐다봤다.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이 비행 내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달콤함도 잠시.
비행기가 한국 땅에 착륙함과 동시에 밀려 있던 전화와 메시지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그중 하나의 메시지가 지서현의 스마트폰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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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서현아, 서울에 온다고 들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얼굴 한번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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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정에 떠오른 미묘한 이름으로 저장된 이한테서 온 문자를 보자 지서현의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