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제 입장에선 겨우일 뿐입니다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공과대학교.
이름 그대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이 학교에 도착하자, MIT공대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거대한 반구 형태의 건축물 그레이트 돔(Great Dome)이 보였다.
“이야…… 장난 아닌데요? 강 팀장님은 이런 거 많이 보셨어요?”
“그리 자주는 못 봤습니다. 대단하네요.”
“올 때마다 느끼지만, 미국은 진짜 클라스가 다른 것 같아요. 무슨 크기가… 워후…….”
세계 제일의 천재들이 모인다는 유서 깊은 학교에 도착하자 감회가 새로운 건지 정우가 연신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떡대를 자랑하는 강철준 팀장과 함께(경호팀원들은 거리를 두고 경호 중이었다) 유색인종이 한가득인 MIT공대에서 감탄사를 남발하는 동양인이라.
그런 그들의 모습은 꽤나 진귀하며 독특한 것이었고,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저기 저 사람들 봐. 우리 학교 처음 왔나 본데?”
“그러게. 촌놈들인가.”
“어? 저 남자 얼굴 낯익지 않아?”
“누구? 저 드웨인 존슨 같은 덩치?”
“아니, 그 보디가드 같은 남자 말고, 그 옆에 사람 말야. 네뷸라 대표 닮지 않았어?”
“어? 정말 그러네?”
몇 명이 네뷸라 대표인 정우를 알아보았지만 확신하지 못할 때.
눈치 빠른 몇몇은 이미 정우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헤이! 당신 네뷸라 대표 맞죠?”
“미스터 리! 팬입니다! 당신이 만든 솔리드스타는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어, 고마워요.”
“미스터 리! 사인 좀 해 주세요!”
“진짜 미스터 리다!”
“HOLY SHIT!!! 진짜로 네뷸라 대표가 왔어!”
“사진 하나만 찍어요, 미스터 리!”
“와!!! 나 미스터 리랑 눈 마주쳤어!”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이 정우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그에게 달려드는 MIT공대생 팬들의 열렬한 구애가 이어졌다.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갑자기 달려드는 사람들에 정우가 당황할 때,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경호팀원들이 정우를 둥글게 에워싸 인의 장벽을 형성했다.
“비상이다! 빨리 대표님 안으로 모셔!”
“밀지 마십시오! 접근하지 마십시오!”
“피터, 릭슨! 뭐 하고 있어! 강제로라도 길 터!”
“예, 캡틴! 비키십쇼! 저리 나와요! 그러다 다칩니다!”
경호팀원들은 무식한 떡대를 들이밀어 강제로 길을 텄다.
그 덕분에 정우는 어떠한 접근도 허용치 않은 채 학교 건물 안으로 피신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MIT공대생들도 눈치는 있는 듯 경호원들을 보자 접근하지 않았기에 간신히 숨을 돌리게 되었다.
“후아- 장난 아니네요.”
“대표님, 어디 다치신 데 없습니까?”
“어…… 그런 것 같은데요?”
“일단 눈에 띄는 찰과상이나 외상은 안 보이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 몸에 이상 징후 느껴지면 바로 말씀하십시오.”
“하하, 강 팀장님과 경호팀 덕분에 터치조차 안 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그야 모르는 일입니다. 전투 중에는 칼에 맞아도 아픈 것도 모르는 게 인간의 몸이거든요.”
“……섬뜩한 얘기를 하시네요. 그나저나 그 똑똑하다는 MIT 공대에도 극성팬들이 있을 줄이야.”
“동양인을 얕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 미국 사회입니다. 그런 미국에서 그것도 최고들이 모여 있다는 MIT의 천재들이 인종을 떠나 감탄할 정도로 대표님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소리죠.”
“하하하, 갑자기 그렇게 띄워 주시다니 강 팀장님도 아부가 많이 늘었습니다?”
“농담 아닙니다만.”
강철준은 진지했다.
그가 보기에도 그의 고용주인 이정우 대표는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업을 벌여 성공시키고 있는 건지.
경호팀이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럼에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어깨너머로 그의 손에서 탄생하는 수많은 혁신의 씨앗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자신이 지금 21세기의 역사 태동의 순간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너무 진지한 그의 얼굴에 정우가 멋쩍은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딱 맞게 도착한 것 같네요.”
그의 말처럼 그들의 앞에는 재료공학과를 뜻하는 사무실이 보였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물었다.
“폴 클레버리 교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클레버리 교수님을요? 미팅 잡아 놓으셨나요?”
“아니요. 약속은 따로 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정우가 여기까지 직접 날아온 이유 중 하나가 이 문제기도 했다.
클레버리 교수가 정우와의 미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얘기로 풀어 보고자 찾아온 것인데, 정우의 얘기를 들은 사무실 직원의 눈에 안쓰럽다는 눈빛이 스쳐 갔다.
“후…… 일단은 알겠습니다. 교수님에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요.”
잠시 후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던 사무실 직원이 안타깝다는 듯 전했다.
“아쉽게도 교수님과 연락이 되질 않네요. 아마, 지금 공강 시간이라 교수실에 계실 것 같은데, 직접 한번 방문해 보시겠어요?”
“그렇게라도 해 주시면 감사하죠. 위치가 어디입니까?”
“A동 꼭대기 층에 가시면 교수실이 바로 보일 거예요.”
“감사합니다.”
다행히 친절한 사무실 직원의 안내 덕분에 폴 클레버리 교수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이 적힌 문 앞에서 정우는 일단 같이 따라온 강철준 팀장을 물렸다.
“강 팀장님,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들어갈 거니까 잠시 대기해 주세요.”
“예.”
무슨 사람 하나 만나는 게 이리 힘든 건지.
정우는 마치 던전에 들어가는 용사마냥 노크를 몇 번 하고는 클레버리 교수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클레버리 교수의 사무실은 그야말로 ‘서고’ 그 자체였다. 책장으로 도배되어 있는 벽에는 당연하게도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책상 위, 바닥 할 것 없이 두터운 전공 서적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저기…… 혹시 클레버리 교수님 계십니까?”
“……누구요?”
그런 사무실에서 드디어 클레버리 교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들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클레버리 교수의 얼굴을 발견하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마냥 반가웠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네뷸라의 이정우 대표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래핀 반도체 기술과 관련하여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예의를 무릅쓰고 불쑥 찾아왔습니다.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그래핀 반도체 기술 관련하여 얘기를 나누고 싶다구요?”
새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깐깐한 얼굴의 노교수가 경계심을 지우지 않은 채 안경 너머로 정우를 노려보았다.
첫인상부터 만만치 않음을 느꼈지만, 클레버리 교수의 깐깐한 인성에 대해서는 이미 강철준 팀장의 보고를 통해 들은바.
예상했던 모습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하하, 맞습니다. 현재 그래핀 반도체 쪽에서 클레버리 교수님이 이끄는 연구진의 성과를 아무도 못 따라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누가 그러던가요?”
“제 아는 분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합니까? 교수님이 기술을 가지셨다는 것과, 제가 거기에 관심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흠, 내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공개할 생각 없으니 돌아가시오.”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클레버리 교수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당황스럽다.
“아니, 교수님 그래도 어떤 사업을 할 건지는 제 얘기를 좀 들어 보시고…….”
“필요 없으니, 귀찮게 하지 마시오.”
더 이상 얘기하다가는 역효과만 불러올 것 같은 경계에 결국 정우는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우가 교수실에서 금세 돌아 나오자 강철준 팀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벌써 미팅이 끝나신 겁니까?”
“……네. 얘기가 잘 안 풀렸네요.”
“거절인가요.”
“거절이라기도 뭐한 게, 제안도 못 해 봤네요.”
“흠…….”
“몇 번 더 끈질기게 미팅을 시도해 보기는 해야겠지만, 아무래도 차선책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차선책이라면……?”
“1인자인 클레버리 교수가 안 되면 2인자라도 물색해 봐야죠. 탁 본부장님 통해서 그래핀 반도체 권위자나 관련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정우의 말에 강철준이 되물었다.
“대표님, 그럴 게 아니라 차라리 이러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떤 거요?”
“지난번에 록히드마틴과 미팅 있지 않았습니까.”
“아, 연락 왔는데 솔리드스타 물량 없어서 거절했던 그거요? 근데 그건 왜요?”
“그쪽 연줄을 이용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록히드마틴 쪽 연줄이요?”
강철준 팀장의 말이 갈피가 잡히지 않는지 정우가 의아해하자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록히드마틴이 아닌 DARPA를 이용하는 겁니다.”
“DARPA요?”
정우도 들어 본 적이 있다.
“DARPA라면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아닙니까? 그 정신 나간 오버테크놀러지만 건드린다는 미친 부서…… 맞죠?”
“예. 맞습니다. 아마 그쪽이라면 대표님이 원하시는 그래핀 반도체 기술력을 이미 확보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침 군수업체인 록히드마틴이라면 국방 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테니 DARPA와 미팅을 주선하는 건 일도 아닐 것 같거든요.”
예리하고 명쾌한 강철준 팀장의 제안에 정우가 탄성을 터트렸다.
“오……! 개쩌는 아이디언데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괜찮은가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최곱니다. 바로 진행해 보죠.”
정우는 곧장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미국행은 잘 진행되고 계신가요.
“그다지요. 그보다 김 비서님, 그때 미팅한 록히드마틴 한국지사장님 있죠? 그분 연락처 좀 알려 주세요.”
-네? 네! 바로 확인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방향을 잃었던 그래핀 반도체 기술 확보에 다시 탄력이 붙고 있었다.
* * *
다행히 록히드마틴의 주선으로 DARPA의 아라티 프라베커 국장과 미팅 스케줄 잡을 수 있었다.
“프라베커 국장은 현 DARPA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렸다고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BTO(Biological Technologies Office: 생물학기술 연구소)와 MTO(Microsystems Technology Office: 마이크로기술 연구소) 등, 현 DARPA를 이루고 있는 7개의 조직을 개편하고 발전시킨 대단한 사람이에요.”
아라티 프라베커 국장과 만난다고 하자 강철준 팀장이 감탄하며 설명했다.
DARPA 산하 연구소 소장급이 아닌 DARPA 자체를 이끄는 국장이 직접 온다니.
정우도 긴장한 사이, 드디어 아라티 프라베커 국장과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리. 드디어 보게 되는군요.”
“하하하, 반갑습니다. 프라베커 국장님.”
다행히 프라베커 국장은 정우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인사치레로 악수하면서 그가 정우의 손을 더듬거리더니 농을 던졌다.
“이거 인공피부가 아니었군요.”
“네? 그게 무슨…….”
“우리 DARPA 연구진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네뷸라의 이 대표는 외계인일 거라고요.”
“네? 하하하.”
“오늘 미스터 리를 만난다고 하니까 부하 직원들이 외계인인지 확인하고 오라고 해서 내기를 했는데…… 이거 꼼짝없이 100달러를 날리게 생겼습니다. 하하하.”
“……제가 외계인일 거라는 쪽에 거신 건가요?”
“아무렴요.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기술력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관리하고 있는 게 우리 DARPA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솔리드스타라는 시대를 뛰어넘은 제품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오죽하면 미스터 리가 외계인일 거다, 솔리드스타가 오파츠OOPArts(Out-of-place Artifacts: 시대를 벗어난 유물들)일 거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습니까. 제가 요새 미스터 리 덕분에 아주 곤란해졌습니다.”
“하하하, 엄살도 심하시네요. 아무리 저희 네뷸라가 커졌어도 DARPA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찾아온 것이기도 하구요.”
농담기를 뺀 정우의 진지한 시선이 프라베커 국장을 향했다.
“국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핀 반도체와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핀 반도체라…… 최근 네뷸라에서 대한전자 스마트폰 사업부를 인수한 건 비밀도 아니지요. 혹시 그것과 관련된 일입니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배터리에 이어 이제는 반도체 사업까지 진출한다니, 미스터 리 당신의 추진력은 정말 미쳤군요.”
“하하하,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허풍만 가득한 떠벌이죠. 아직까지는요.”
“떠벌이라…….”
“절대 성공하지 못할 오버테크놀러지에만 투자한다는 DARPA의 신조. 저는 DARPA에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그래핀 반도체 기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국장님이 저희에게 그 그래핀 반도체 기술을 주신다면 더 이상 저는 허풍쟁이가 아니게 될 거예요.”
거듭 부탁하는 정우의 말에 국장이 웃었다.
“하하하, 세상 그 누가 감히 네뷸라의 대표를 허풍쟁이라 몰 수 있겠습니까? 미스터 리, 당신은 이미 증명된 천재이자 성공한 기업가입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저도 제 주제를 압니다. 이번 그래핀 반도체 사업에 있어서는 확실히 초보라는 걸요. 그러니 도움 좀 주시지요? 이번만 도와주시면 제가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허참, 은혜랄 것까지야…….”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프라베커 국장.
하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습니다. 알아보지요.”
“정말입니까?”
“국장의 자리를 걸고 약속드리죠. 그런데 기술 특허 사용 계약 권한을 원하는 겁니까? 아니면 개발자와 미팅을 바라는 겁니까?”
“둘 다요.”
“하하하, 욕심도 많으시네. 알겠습니다. 추진해 보지요.”
너무나도 흔쾌히 수락하는 프라베커 국장의 태도에 오히려 정우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이렇게 쉽게 원하는 바를 얻어 낼 수 있다고?
“그게 전부입니까? 뭐 따로 요구하시는 건 없습니까?”
“오히려 되묻고 싶네요. 저희 DARPA가 어디인지를요.”
“미국의 국방을 위해 신기술을 연구를 지원하는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이지요.”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맞습니다. 저희 DARPA는 기술을 직접 개발하는 게 아니라, 해당 사업 분야가 발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는’ 정부부처입니다. 이 모든 일이 미국에 이득이 되는 일인데 따로 요구할 일이 있나요.”
“……아!”
그제야 정우는 프라베커 국장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국장이 미소 지었다.
“하하, 이제 아셨나 보군요.”
“예. 그렇다면 저희 기술력이 추후 미국 국방력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지원하는 개념입니까?”
“정확합니다. 그저 이번 일을 잊지 말아 주시고, 추후 솔리드스타를 원하는 자국 기업이 있으면 공급에 대해 고려해 주십쇼.”
정우로서는 대환영할 조건이다.
“흠, 그런 일이라면 오케이입니다. 다만 저희가 미국지역에 대해서는 테슬라가 독점 계약 중이라…….”
“그건 자동차 쪽이라고 들었습니다. 다른 사업 분야면 상관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분야라면……?”
“항공, 해양 산업은 테슬라도 간섭하지 못할 겁니다. 특히 국방과 관련된 일이라면요.”
자신만만한 프라베커 국장의 미소를 보며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리.”
환한 미소와 함께 일어난 두 사람의 손이 힘차게 맞물렸다.
정우가 DARPA의 지원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 * *
폴 클레버리 교수를 직접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정우는 폴 클레버리 교수를 설득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인가 싶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DARPA에서 압력을 넣은 건지 아니면 어떻게 달콤한 당근으로 회유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클레버리 교수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돌변한 것이다.
-그래핀 반도체 기술과 관련하여 논의할 게 있으니 내일 점심 내 사무실로 오십시오.
폴 클레버리 교수의 호출에 정우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다시 마주한 클레버리 교수가 그를 노려봤다.
“미스터 리라고 했나요. 당신, 인맥이 꽤나 넓더군요.”
“……하하, 어쩌다 보니 제가 친구가 좀 많아진 것 같습니다.”
“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연구비를 대폭 삭감한다니 어쩔 수 있나. 알겠어요. 그쪽의 제안, 받아들이죠.”
“그 말씀은……?”
“우리가 가진 ‘폴그래파인’ 기술에 대해 공유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거 이제 보니 DARPA에서는 클레버리 교수를 단순히 회유한 게 아니라 연구비로 협박한 모양이다.
원하는 답을 이끌어 냈지만, 정우는 살짝 미안해졌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하네요. 괜히 저 때문에 압박받으시고.”
“연구라는 게 항상 이런 식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고 기술만 공유하는 것일 뿐, 저작권은 저한테 있고 로열티도 톡톡히 받을 거니 은근슬쩍 넘기려는 생각도 하지 마시오.”
“그건 당연한 거고요. 미안해서 보답은 해야겠네요. 연구비 얼마죠?”
“……설마 로열티에 더해 연구비를 추가로 지원해 주겠다는 소리요?”
“왜 아니겠습니까.”
선심이라도 쓰려는 듯한 정우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클레버리 교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매년 국가에서 우리 연구진에 지급하는 장학금 및 연구지원금이 2,000만 달러요.”
“……2,000만 달러요?”
“무지막지한 액수지. 어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클레버리 교수가 정우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비웃음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정우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2,000만 달러밖에 안 돼요?”
“음?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니, 지원금이 겨우 2,000만 달러밖에 안 되냐구요.”
“겨우라니……! 2,000만 달러면 우리 연구소 산하 소속 대학생들 전부 장학금 주고, 프로젝트 연구비용으로 써도 예산으로 남겨 먹을 수 있는 액수인데……!”
흥분하는 클레버리 교수를 보며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교수님, 아무래도 탁상에서 연구만 하다 보니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듯싶었다.
“제 입장에선 겨우일 뿐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사과의 의미에서 그 2배에 달하는 지원금을 MIT공대에 기부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뭐라구요? 2배라면…… 4,000만 달러?”
“아니다, 이왕 기부하는 거 1억 달러로 할게요.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기술 전수 부탁드립니다.”
클레버리 교수의 두 눈이 흔들렸다.
* * *
<네뷸라, MIT 재료공학부에 1억 달러 쾌척>
자그마한 기사 하나가 매사추세츠주 지역 일간지에 실렸고, 세상에 크게 회자되지는 않았다.
한국이라면 모를까, 미국에서 부자가 기부하는 건 꽤나 흔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1억 달러라는 금액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기에 온라인에서는 다시 한번 네뷸라의 이름이 오르내리긴 했지만 그뿐.
시장이나 경제에 영향을 줄 정도의 반향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그곳에서는 꽤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핀 반도체 기술의 핵심은 전도성이 강한 그래핀을 부도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그래핀만으로 구현이 불가능하고 새로운 소재가 필요한데, 우리가 개발한 소재 기술이 바로 ‘폴그래파인’이라는 놈이지.”
기부를 떠나서 어차피 기술 이전을 해 주려 했던 클레버리 교수였지만, 정우의 1억 달러 기부가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일까.
클레버리 교수는 대한전자, 아니 이제는 네뷸라 일렉트로닉스의 직원들이 된 스마트폰 사업부 연구개발팀 핵심 직원들 앞에서 열성적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먼 미국 땅까지 날아와 재료공학의 권위자인 클레버리 교수에게 연수를 받는 직원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는데, 그런 그들에게 전해지는 클레버리 교수의 그래핀 반도체 핵심 기술은 ‘폴그래파인’이라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폴그래파인은 밴드갭Band Gap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재입니다. 밴드갭이 뭔지 다들 아시리라 생각하는데, 혹시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밴드갭이라면 물질 속에 전자들이 모여 있는 부분과 전자들이 전혀 없는 부분 사이에 있는 일종의 장벽으로, 실리콘 반도체에서 주로 활용되는 성질 아닙니까?”
“잘 알고 있군요. 맞아요. 실리콘 반도체는 이 밴드갭을 이용해서 평소에는 전류가 통하지 않는 밴드갭 장벽으로 두어 부도체 상태로 만들고, 스위치를 켜면 밴드갭에 자유전자들이 돌아다니게 하여 전기를 통하게 하여 도체 상태로 만듭니다. 여기서 뭐가 떠오르는 게 없습니까?”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네뷸라 일렉트로닉스 연구원들을 보며 클레버리 교수가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설명을 이어 갔다.
“바로 밴드갭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그 말씀은……?”
“우리는 그래핀 구조에 구멍을 뚫어 밴드갭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폴그래파인Pole Graphyne의 기본적인 뼈대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