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통화를 마친 마이클 해리 팀장은 곧장 NSA 폴 나카소네 국장에게 다이렉트로 보고했다.
“네뷸라 대표가 중국 상무부 소속 공산당 고위간부와 접촉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흠…… 알겠어.”
나카소네 국장 역시 부하의 보고에 안색이 경직되었다.
“…… 이런…… 이거 요인 마크 못 했다고 또 한 소리 듣겠구만.”
도대체 공산당 간부 한 명을 만난 게 무엇이 문제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비상용으로 마련된 백악관 핫라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화이트 하우스입니다.
“나카소네 국장입니다. 대통령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핫라인으로 연락을 준 겁니까?
“얼마 전 내려온 ‘CHIP4 프로젝트’에 대해 변수가 발생하였습니다. 자세한 건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스케줄 확인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나카소네 NSA 국장은 백악관으로 소환되었다.
계급만 따져도 현직 사이버사령관이자 베테랑 군인인 그로서도 한 나라의 대통령, 그것도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
개인 몸수색 후 나카소네 국장이 긴장한 기색으로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섰다.
“왔습니까, 나카소네 국장.”
“예. 한시가 급한 사한이라 바로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찾아뵈었습니다.”
“보고 사항이 무엇입니까? ‘CHIP4 프로젝트’에 변수가 생겼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네뷸라 정우-리 대표가 중국 상무부 고위 간부와 접촉했습니다.”
“……뭐요?”
나카소네 국장의 보고에 트럼프 대통령의 안색이 굳었다.
“설마 미국을 배신하고 중국으로 넘어간 겁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워낙 예상 밖의 미팅이라 감청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거 하나 못해서 원…… 세금 먹으면서 일을 그따위로밖에 못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죄송한 거고, 그래서 미스터 리가 중국에 넘어간 것 같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네뷸라의 그래핀 반도체가 중국에 넘어가면 ‘CHIP4 프로젝트’는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요? 하…… 답답하구만.”
“……죄송합니다.”
쩔쩔매는 NSA국장을 노려보던 트럼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건 알았어요. 수습은 내가 할 테니까 나가봐요.”
“예.”
나카소네 국장이 퇴장하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이 부관을 불러들였다.
“지금 바로 네뷸라 대표와 미팅 추진해 봐.”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럼 지금 당장이지 내년이겠어? 헛소리할 시간에 빨리빨리 움직여!”
“……옙!”
부관이 허둥지둥 나가고.
트럼프 대통령은 답답한 얼굴로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미스터 리……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그가 계획하여 추진 중인 CHIP4 프로젝트에 있어서 네뷸라의 그래핀 반도체는 너무나도 큰 변수가 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 그래핀 반도체 하나만으로도 그의 CHIP4 프로젝트는 완전히 무산될 터.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정우를 만나야만 했다.
생각에 잠긴 미대통령 집무실에는 숨 막히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 * *
중국 공산당 간부와의 미팅에서 원하는 바를 이끌어 낸 정우는 기분 좋게 출국하러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 일련의 무리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뜻밖의 상황에 강철준 팀장을 비롯한 경호팀이 재빨리 정우를 보호하고 나설 때, 수상한 무리의 선두에 선 남자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뷸라의 미스터 리 맞으십니까?”
“……그런데요?”
“무례를 범하여 죄송합니다. 근데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잠시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행이요? 어디로요?”
“WH입니다.”
“WH면…… 화이트하우스White House요?”
“예. 급해서 소속을 밝힌다는 게 잊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런데 화이트하우스에선 왜……?”
“대통령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시간 좀 내어 주십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정우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잠깐이라면 좋습니다.”
“예. 그럼 이동하시죠. 비행기 티켓은 저희가 준비해 뒀습니다.”
어차피 공항이었던 터라 백악관 비서실에서 준비한 항공편을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백악관에 들어선다니.
철저한 몸수색과 마치 미로와 같은 백악관 통로를 지나, 그냥 벽처럼 생긴 문을 통해 접견실에 들어섰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동시에 싱숭생숭한 묘한 기분으로 접견실에서 대기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우는 그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을 때, 마침내 그의 순서가 다가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예.”
접견실 한쪽에 놓인 비밀 통로를 통해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청와대에서 보았던, 가발(?)이 인상적인 트럼프 대통령이 묘한 미소와 함께 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프레지던트.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리. 코리아에서 보고 몇 달만인 것 같은데, 잘 지냈습니까?”
“하하,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자고 하셨던데, 무슨 일인 겁니까?”
정우의 물음에 트럼프 대통령의 안색이 굳었다.
“중국 공산당 간부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예?”
“상무부 부장조리 뤼우첸이라고 하던가요. 그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눈 겁니까?”
마치 취조하듯 묻는 트럼프 대통령의 물음에 정우는 당황스러웠다.
“어……그러니까 제가 중국 공산당 간부와 만난 게 오늘 이 자리로 불려 온 이유인 겁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얼마를 약속받았어요? 한번 얘기해 보세요.”
“……무엇을요?”
“그래핀 반도체 말입니다. 중국과 협약한 거 아닙니까? 다 알고 부른 겁니다.”
“……아니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끝까지 오리 발이시구만. 뭐 좋습니다. 경영인이라면 이윤을 좇는 건 당연한 일이고 어차피 그걸 문제 삼으려고 한 건 아니니까요. 다만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내가 미스터 리를 얼마나 챙겨 줬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칩니까?”
“아니, 뒤통수가 아니라…….”
“어쨌든 그건 그거고, 우리 비즈니스를 얘기하자구요. 중국 측이 약속한 지원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그깟 푼돈은 잊어버리게 해 드리죠. 대신 우리가 지원해 주겠습니다.”
“저 좀 말을…….”
“그쪽에서 제안한 조건의 2배면 어떻습니까?”
“……2배요?”
속사포처럼 밀어붙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기세에 휘말려 정우는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2배를 지원해 준다는 제안은 솔깃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오해를 이용해서 덥석 막대한 지원을 약속받을 것인가.
‘아니. 곧 들통날 오해인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상대는 바보가 아니다. 무려 세계 1위의 초강대국 미합중국이다.
지금은 어떤 오해 때문인지 정우가 중국과 손을 잡았다고 착각한 모양이지만, 나중에라도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알면 트럼프 정부와 큰 척을 지게 될 터.
결국, 정우는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결정했다.
“2배 지원은 감사하지만,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네뷸라는 중국 측에 어떠한 지원도 약속받은 바가 없습니다.”
“……뭐라구요? 그럼 중국 공산당 간부는 왜 만난 거요?”
“그게 사실은…….”
정우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테슬라의 중국 진출과 관련하여 중국 측에서 솔리드스타 공장을 중국에 세워 달라고 압박했던 것을 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 나는 그것도 모르고…… NSA 놈들 안 되겠네.”
“……NSA요?”
“사실 미스터 리가 중국으로 넘어갔다고 설레발을 친 게 NSA 놈들이거든.”
“아아…… 안 그래도 저희 경호팀장님이 그때 호텔에 NSA요원들 있다고 했는데…… 그때였나 보네요?”
“참나- 이제는 신분까지 들켰어요? 가지가지 하는구만.”
답답한 듯 짜증이 잔뜩 서린 트럼프의 얼굴을 보며 정우가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하하…… 최근에 NSA 힘이 많이 약해지지 않았습니까? 이해하시는 게…….”
“NSA 기밀자료 폭로사건(NSA Prism leak) 말하는 거요? 하긴 스노든 그놈 때문에 NSA의 힘이 많이 축소되긴 했지. 하지만 이건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예요. 세금 받아먹으면서 일 처리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원……!”
“하, 하하…….”
NSA 기밀자료 폭로사건(NSA Prism leak)이란 2013년에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NSA계약요원이 NSA를 비롯한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전 세계 일반인들의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 및 사찰해 온 사실을 폭로한 내부고발 사건이다.
이로 인해 NSA의 권한과 힘 역시 대폭 축소되었으며, 애국자법(USA PATRIOT ACT/테러대책법Anti-terrorism legislation)은 헌법 위배의 이유로 폐기되고, 국가기관의 자국민 감청을 제한하는 자유법이 제정되는 등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정우가 백악관에 초빙된 것은 전적으로 NSA 측의 오해로 빚어진 일인 셈.
그제야 오해가 풀린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이 완화되었다.
“어쨌든 솔리드스타 공장을 거절한 걸 보면 미스터 리도 중국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 것 같군요?”
“호불호를 떠나서 기술유출 문제는 심각한 게 사실이니까요. 저희 네뷸라의 기술이 유출되는 건 절대 사양이기에 거부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이거 말이 잘 통하네. 미스터 리도 중국 놈들의 흉악함을 드디어 깨달은 거구만. 그럼 앞으로도 중국 쪽에서 사업할 생각은 없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중국 측의 사업 의식이나 문화가 개선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렇겠죠? 대신 솔리드스타만 수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솔리드스타를 수출한다…? 흠…….”
정우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트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솔리드스타 건은 우리 쪽이 조치하면 될 거고…… 알겠어요. 아무튼 중국과 연결고리가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저야말로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야말로 한시름 놓았지. 사실 미스터 리가 중국으로 넘어가면 큰 프로젝트 하나가 무산될 뻔했거든.”
“큰 프로젝트요?”
“흠…… 이걸 얘기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잠깐 고민에 잠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CHIP4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미스터 리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니 말해도 상관없겠지.”
CHIP4 프로젝트?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하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되물었다.
“CHIP4 프로젝트요? 그게 뭐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다음 주에 미중무역전쟁이 발발할 거요.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 거거든.”
“……예?”
정우의 눈이 커졌다.
아직 7월이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미중무역전쟁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놀란 그를 보며 트럼프가 예상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역시 몰랐나 보군요.”
“예. 아니,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라뇨? 그렇게 빨리요?”
“오, 예상했다고요? 미스터 리의 경제를 보는 식견은 대단하군요.”
“아니 뭐…… 요새 뉴스에도 자주 나오잖아요? 미국과 중국 사이가 점점 경색되어 간다고 할까나……. 그리고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미스터 프레지던트 본인도 기자회견에서 공공연하게 중국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기도 하셨구요.”
“하하하, 잘 알고 있네요. 맞아요. 내가 중국놈들을 좀 벼르고 있긴 했지. 그래서 다음 주에 큰 거 한방 터트릴 예정인데, 아마 무역관세를…….”
“잠깐만요. 거기까지 듣겠습니다.”
무역관세 얘기가 나오자마자 정우가 트럼프의 말을 끊었다.
아마도 그가 하려던 얘기는 중국에 대한 무역관세를 대폭 올린다는 이야기일 터.
뻔하게 예상되는 말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을 끊다니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정우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주식이랑 선물에 투자해 놓은 게 있어서요. 아무래도 정보를 들으면 내부자거래Insider's Trading가 되어서 불공정거래 행위가 되니 들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아- 이해합니다.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군요.”
주식시장에서는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회사의 주요주주나 임직원 및 일정 관계가 있지 않은 사람이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이용하여 주식거래를 하면 ‘내부자거래’라고 하여 처벌을 받게 된다.
다만 이 미공개 정보라는 것을 어떻게 얻었느냐에 따라 합법과 불법이 갈리는데, 정보수령자와 달리 정보를 직접 만든 정보 생성자는 규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우가 네뷸라 케미컬의 솔리드스타가 성공할 것을 예상하여 주식시장에 내연기관 주식들에 대해 공매도를 치는 것은 합법이다. 왜냐하면 정보 자체를 생성한 정보생성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정보를 수령하는 순간 내부자거래에 위반되어 정우가 기껏 투자해 놓은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제가 먼저 투자해 놓고 미스터 프레지던트가 나중에 얘기해 준 거긴 하지만, 멀리서 본 여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의 야합이나 무언가 야료가 있을 거라고 여겨서 여론의 뭇매를 맞겠죠. 그러니 애초에 빌미를 줘서는 안 됩니다.”
“하하, 내가 하겠다는데, 그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래도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좋습니다. 미스터 리의 판단대로 그 얘긴 거기까지 하죠.”
역시 마이웨이 트럼프 대통령답게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근데 미중무역전쟁이 발발한다는 점과 그 ‘CHIP4 프로젝트’란 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간단해요. 우리는 중국을 국제 반도체 시장에서 고립시킬 겁니다.”
“반도체 시장에서 고립시킨다…? 아……!”
그제야 정우는 CHIP4를 어디서 들어 봤는지 기억났다.
“미국, 일본, 대만, 한국, 이 4개국의 반도체 동맹…… 맞습니까?”
“음? 맞아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트럼프도 놀랐는지 되물었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을 반도체시장에서 고립시키려면 다른 반도체 강국들의 협조가 필요하죠. 그리고 반도체 강국은 이 4개국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미스터 리의 눈치가 상당하군요.”
“사업하면서 늘어난 게 눈치뿐이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CHIP4에 대해서는 회귀하기 전에 뉴스를 통해 접한 정보 중 하나였는데, CHIP4는 실제로 그가 과거에 회귀하기 전에 미국이 추진한 외교 프로젝트로, 말이 CHIP4지 사실상 중국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퇴출하기 위한 미국의 큰 그림이었다.
미국이 설계, 장비,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일본은 소재와 부품, 대만은 비메모리반도체 생산을 담당하며,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은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강점이 있는데, 세계시장을 주무르는 이 반도체 강국들이 중국만 빼놓고 동맹을 맺어 중국을 고립시키는 정책이었다.
실제로 CHIP4가 발표되기 한참 전부터 중국은 퀄컴 AP칩의 금수조치를 당하고, 화웨이는 구글 안드로이드 OS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등 엄청난 제재 조치를 당하게 되어,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당히 상실하게 된다.
이 어마어마한 역사의 흐름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니.
아니, 사실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정우로서는 이 사실을 기억해 낸 것만으로도 대견스러울 정도긴 하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 CHIP4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나와 있었다.
“이제야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저희가 개발한 그래핀 반도체가 CHIP4 프로젝트의 단단한 동맹에 구멍을 내리라 생각하시는 거군요?”
“정확합니다. 미스터 리의 예상대로예요. 기껏 중국을 고립시켜 놨는데, 그래핀 반도체로 중국이 활로를 찾아 버리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역시나 정우의 예상대로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모르는 걸까?
그래핀 반도체에 문제가 있어서 아직 양산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해.’
NSA가 감청 감시를 하는 세상이다. 게다가 이미 DARPA를 통해서 그래핀 반도체의 해법을 찾았던 정우였기에 그들이 현재 네뷸라 일렉트로닉스의 그래핀 반도체 개발현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물었다.
“그래서 저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까?”
“절대 중국 측에 그래핀 반도체를 넘기지 마십시오. 그것을 경고하고자, 그리고 만약 이미 넘어갔다면 회유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한 거요.”
“미스터 프레지던트도 아시겠지,만 아마도 지금으로선 저희가 먼저 중국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걸로 답이 되었습니까?”
“하하,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이 안 되는군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비즈니스에서 단순한 구두협약은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지론이거든.”
“그렇다는 말씀은……?”
“계약 하나 하십시다. 정부 지원사업으로 네뷸라의 그래핀 반도체 개발에 지원금을 투자하죠. 규모는 100억 달러. 어떻습니까?”
“100억 달러요……?”
화끈하다.
역시 미국 대통령의 클라스는 다르다 싶었는데, 트럼프의 제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희야 좋긴 하지만…… 안 그래도 네뷸라 편애한다 뭐다 언론에서 떠들던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어차피 기레기 놈들이 나불거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 네… 하하…….”
“그리고 추가로 네뷸라 일렉트로닉스였나요? 그래핀 반도체 공장을 세울 수 있게 부지도 알아봐 주죠. 대신 공짜는 아니고, 우리 미국 시민들을 대거 고용하는 조건이 붙긴 할 텐데, 어떻습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그 조건을 거절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조건 하겠습니다.”
“그럼, 협상은 잘 해결된 것 같군요. 잘해 봅시다, 미스터 리.”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잘 부탁하긴, 오히려 내가 잘 부탁해야지. 내가 미스터 리 때문에 지지율 좀 올랐는데, 앞으로도 혜택 좀 보게 열심히 해 봅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신뢰를 담아 굳게 악수를 했다.
그렇게 중국 공산당과의 만남이 불러온 스노우볼은 네뷸라에 100억 달러라는 거액의 지원금과 트럼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막대한 배경을 안겨 주었다.
* * *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약이 마무리되고.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트럼프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중국에 대해 관세 25%를 부과하면서 미중무역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트럼프 중국에 기습 25% 관세 폭탄>
<1차는 시작에 불과했다, 트럼프 223조 2차 관세 폭탄 투하 예고>
<미중 무역전쟁 시작되나>
<시진핑 미국에 25% 관세 폭탄으로 맞불>
<보복에 또 보복…… 미중무역전쟁 시작에 세계 경제 ‘출렁’>
<요동치는 주식 선물 시장, 현금은 어디로 향하는가>
드디어 진짜 미중무역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솔리드스타 공장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정우는 태블릿을 들어 투자해 놓은 종목들을 살폈다.
“……아직 다 매집도 못 했는데 아쉽네.”
7월로 생각했던 정우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미중무역전쟁이 발발한 까닭에 생각보다 매집을 많이 못 했다.
그래도 주가는 미래가치를 반영하는 기대심리로 움직인다는 말처럼, 고작 기사 몇 개 터진 것에 불과한데 선물시장, 특히 원자재 선물시장은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덕분에 선물에 투자해 놓은 거의 100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은 그의 예상대로 순조롭게 순항 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웃고 있는 반면에 울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대표님, 이겨서 좋으시겠습니다……?
“예?”
바로 탁세훈 본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