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때였다.
태건은 큼지막한 서순영이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
“엇, 선……. 윽!”
터억!
물러서기도 전에 서순영의 굵은 팔이 태건의 목을 둘렀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는 건 덤이었다.
“강태건, 또 설쳤냐!”
“설친 게 아니라…….”
“시끄럽고, 계속 그렇게 멋대로 굴래?”
“아악, 선배. 선배.”
탁탁.
태건이 팔을 두드리며 고통스러워했지만 서순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태건을 오광휘 팀장이 중재해 줬다.
탁탁.
“서순영이, 애 그만 괴롭히고 놔줘.”
“1팀장님. 또 나댔다잖습니까.”
“맞아. 그런데 태건이가 그렇게 나서서 요구조자 한 명 구했어.”
오광휘 팀장은 정확한 사실로 변호해줬다.
그래도 서순영의 미심쩍음은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야, 막내. 진짜야?”
“팀장님하고 유정 선배가 뒤따라와 주셔서……. 문제없이 구조했습니다. 윽!”
“잘했다만, 계속 이런 소식 들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
“서 선배는 원래 재미 없었……. 윽. 알겠습니다.”
태건은 괜한 말을 했다가 목이 조여와 얼른 정정했다.
서순영은 곧 태건을 풀어줬지만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쟤 어쩜 좋아.”
팀이 달라져 바로 옆에서 챙기지 못해 씁쓸해했다.
그 사이 태건은 목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힘은 엄청 좋다니까.”
그런 푸념이 끝날 즈음이었다.
오광휘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1팀. 고생들 했고, 3팀 근무 방해 말고 얼른 퇴근들 해버려!”
“퇴근이다.”
“집에 가자!”
“고생하셨습니다. 3팀, 고생하십시오!”
퇴근이란 소리에 화재1팀은 금세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태건도 이내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조용하네……. 어?”
무심코 날짜를 확인한 태건이 순간 크게 멈칫했다.
그리고 서둘러 채팅 앱을 열었다.
‘혈육 투.’란 독특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열어본 태건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선물 대신 부탁이나 들어줘. 저녁에 한국 도착하는데…….
메시지 중 날짜만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그런 태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젠장, 오늘이었어!”
내일인 줄 알고 여유로웠던 태건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터더덕!
재빨리 가방을 챙긴 태건은 사무실 문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내일 뵙겠습니다!”
“어? 같이 저녁 먹으려고…….”
“내일이요!”
쌩.
태건은 대답과 동시에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다들 그렇게 서두르는 태건의 모습을 낯설어했다.
“뭔 일이래?”
“여자 친구 생일인가?”
“기념일 까먹은 거면……. 쯧쯧.”
유부남 선배들은 어떤 결말이 예상되는지 특히나 안타까워했다.
한편 태건은 흡사 맹수라도 쫓아오는 듯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시간이…….”
째각, 째각.
흘러가는 1초가 무정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집에 도착한 태건은 샤워실부터 뛰어들었다.
손가락과 목덜미 등.
거친 손길로 시꺼먼 출동 흔적을 지우기 급급했다.
벅벅!
“왜 하필이면 그런 약속을 해서!”
공연히 자신만 급해진 이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건은 서둘렀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는 게 당연한 탓이다.
* * *
한 시간 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호자 번호판이 부착된 승용차 한 대가 다급히 들어섰다.
끼이익.
거칠게 멈춰선 승용차에서 태건이 내렸다.
캐주얼한 옷차림에 말끔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소방 기동복을 입고 있을 때와 분위기도 상당히 달랐다.
그런 태건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이내 안도했다.
“휴, 다행히 먼저 왔네.”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지각이잖아.”
뒤에서 들려온 친숙한 목소리에 태건이 화들짝 놀랐다.
휙!
바로 뒤를 돌아보자 굵직한 기둥 옆으로 스튜어디스 세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릉 그릉.
자그마한 캐리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중 가운데 승무원은 1킬로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막내 강주미였다.
척.
이내 도착한 강주미는 태건에게 바짝 다가와 몰래 옆구리를 찌르며 으르렁거렸다.
“왜 늦었어. 왜.”
“빨리 온 거야.”
“솔직히 말해, 까먹었지.”
“아니라니까.”
“아니기는, 생일 선물 대신 운전기사 좀 해달라는데, 그걸 까먹……. 킁킁. 이 냄새, 좀 씻고 오지.”
강주미는 있는 힘껏 째려봤다.
태건은 피하긴커녕 더욱 당당하게 나갔다.
“씻고 왔어. 이 개코야.”
“뭐어? 우씨.”
“주미야. 여기 공항이야, 그리고 친구들이 보네.”
“……끄응.”
울컥한 강주미는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짜증을 억눌렀다.
그 틈을 이용해 태건이 먼저 다른 승무원들에게 인사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주미 둘째 오빠, 강태건입니다.”
샤라락.
정중한 인사를 마친 태건이 살짝 빛나 보였다.
아니, 동료 승무원들 눈에 그렇게 비쳤다.
준수한 외모에 적당히 도드라진 근육들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억지 미소를 짓던 승무원들 표정이 어느새 진짜 부드럽게 변했다.
“아니에요. 저희도 회의 때문에 방금 도착했는걸요. 김채연이에요.”
“어머머?”
“주미 오빠시구나. 전 주미랑 가장 친하게 지내는 황유리라고 해요. 반가워요.”
“얼라라?”
강주미는 동료들의 사근사근한 모습에 어이없어했다.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빠로써 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다들 아름다우시네요. 주미는……. 뭐. 하하.”
“오호호. 농담도. 주미가 젤 예쁜 걸요.”
“맞아요. 사내 인기투표에서도 주미가 항상 1등이에요.”
승무원들이 좋게 말하자 태건도 예의 좋게 응대했다.
“제 눈엔 철없어 보이는데, 다들 예뻐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말씀을요.”
그렇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그때 강주미가 중간에 끼어들어 어이없어했다.
“저기요. 여러분들, 지금 소개팅 자리 아니거든요?”
“알아.”
“대체 오빠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절하셨다고 그러세요?”
“훗. 녀석.”
태건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런 반응이 강주미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왜 그런 미소를 짓지? 맨날 인상 쓰면서 발로 물 떠와라, 채널 돌려라 하던 분은 어디가고?”
“얘, 주미야. 오빠 험담하고 그럼 안 되지.”
“맞아. 우리 주미는 오빠한테 깍쟁이구나.”
동료들이 만류하자 강주미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어머머, 니들은 또 왜 이러세요.”
“우리가 왜?”
“우리 오빠 소방관이라니까. 향수 냄새가 아니라 탄내 나고 그러잖아.”
강주미가 강조해 알렸다.
태건은 쓴 미소를 지으며 얼른 설명에 나섰다.
“막판에 출동이 걸려서요. 씻는다고 씻고 왔는데, 냄새가 좀 덜 빠졌나 봅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그 소리에 동료들 반응이 더 진하게 변했다.
“어머머, 위험하진 않으셨어요? 다친 데는 없으시고요?”
“주미야. 탄내라니,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을 오간 분인데 그런 말 하면 실례야.”
그렇게 동료들은 태건을 두둔했다.
그 반응에 강주미는 너무 황당해 입만 뻐끔거렸다.
“하, 어, 와, 뭐, 뭐지?”
그때 태건이 다시 나서서 말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네요. 짐은 저 주시고 타세요.”
“어떻게 그래요.”
“오늘은 그래도 됩니다. 자, 어서요.”
스윽.
태건은 아예 손을 뻗어 승무원들의 캐리어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곧 태건이 자동차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그런 태건의 옆에 강주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가왔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절하셨어?”
“동료들 앞에서 평소대로 해달라면 얼마든지.”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혹시라도 우리 애들보고 딴생각하는 거 아니지?”
“전혀. 생일 선물 대신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않아?”
탁.
여유롭게 대답한 태건은 트렁크를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곧 차를 몰아 공항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내비게이션이 알려주고 있어 그대로 따라가면 될 일이었다.
부우웅.
한참 달리던 중 태건은 고요함을 느꼈다.
“…….”
스윽.
옆을 바라보니 강주미가 잠들어 있었다.
뒷좌석에 자리한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태건의 관심은 오직 강주미에게만 쏠려 있었다.
아웅다웅해도 하나뿐인 동생이다.
그래서 곯아떨어진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녀석, 많이 고됐나 보네.”
부웅.
태건은 운전을 신경 써서 더욱 안전하게 이어갔다.
강주미가 조금이라도 피로를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 *
물론 소방서에서는 태건이 여전히 골치덩어리였다.
이번엔 선배들이 술집으로 데려갔다.
“내일 오프니까 넌 오늘 죽었다.”
“형들이 쏜다. 일단 마셔. 아주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
“다 잊자. 마시고 잊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런다고 돌아가신 분들이 좋아하겠냐. 자자, 마셔.”
쭈루룩.
그리고 정말 태건이 뻗을 때까지 술잔은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소용없었다.
결국 구슬리던 선배들도 한계에 다다랐다.
“강태건, 너 정말 언제까지 이럴래.”
“이쯤에서 멈춰. 멈추지 않으면 출동에서 빼버릴 거야.”
“우리 생각만 그런 게 아니야. 말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공갈·협박까지 동원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태건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선배들은 답답하고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반면 태건은 점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출동 횟수가 누적될수록 의구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간 탓이다.
“이건 이채용 팀장님 경험이야. 확실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1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 소방관의 현장 노하우.
그건 고작 반년도 안 된 초임 소방관이 따라하고 싶어도 따라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짜릿한 느낌이 계기였던 거 같다.
이젠 확신이 섰다.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하면?
‘하얀 병원은 별로.’
이상한 취급 받아도 골백번 받을 터였다.
태건도 알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현장을 출동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들었다.
불귀신의 노하우와 함께였다.
남들이 보기엔 위험해 보일지 몰라도 태건에겐 최고의 나침반이었다.
태건으로선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람을 구하는 그 맛을 알아버린 탓이다.
이젠 어느 누가 뜯어말려도 그 맛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태건은 그저 결심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채용 팀장의 경험이 영원하리란 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거짓말처럼 찾아온 현장 노하우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후에 자신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가?
그건 싫었다.
“멈춰 있으면 결국 후진이야.”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이채용 팀장의 경험을 토대로 진정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