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18)화 (18/320)

18화

반대로 정연미의 생각은 조금 다른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괜찮겠어?”

“뭔 소리야. 내려와.”

“응.”

정연미의 대답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태건은 바로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끼익.

현관문을 열자 계단으로 내려오는 정연미 모습이 보였다.

설핏 보인 하얀 바지에 살짝 어깨가 보이는 오프숄더 차림이었다.

이렇게 보면 귀엽고, 또 다르게 보면 지적으로 느껴지는 팔색조 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태건이 먼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안녕?”

“풋.”

정연미의 반응에 태건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안녕이 뭐야.”

“그럼 뭐라고 해?”

태건이 갸웃거리며 묻자 정연미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참 오빠다운 말이네.”

“나야, 항상 나답지. 어서 들어와.”

“청소했어?”

안으로 들어선 정연미 물음에 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확실히 청소는 잘해.”

“칭찬은 앉아서 계속하자고. 커피?”

“응.”

“잠시만.”

태건은 부엌으로 향하고 정연미는 깔끔한 거실을 둘러보며 바닥에 앉았다.

곧 두 사람은 식탁을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았다.

커피는 한 모금씩 마시고 있었고, 분위기는 덤덤한 그대로였다.

정연미가 상큼하게 미소 지으며 슬쩍 팔짱을 꼈다.

“흠. 향 좋다.”

“그래. 오랜만에 이렇게 있으니까 좋네.”

“그러게. 꽤 오랜만이야. 그런데 아직도 힘들어?”

정연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걱정 서린 얼굴이다.

태건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러나 태건은 좀 더 밝게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힘들어 보여?”

“조금.”

“하긴. 완전히 괜찮진 않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정연미가 태건의 상한 얼굴에 대해 그제야 물었다.

현관 앞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지금껏 참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태건 얼굴을 가볍게 쓸며 답했다.

“이제야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

“진짜?”

“물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진짜 좋아지고 있나 봐.”

“…….”

그런데 태건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정연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게 이상했는지 정연미가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왜 그렇게 봐?”

“고민 있어?”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눈썹, 눈꼬리, 입꼬리, 딱 고민 있을 때 표정인데?”

태건은 확신을 보였다.

정연미가 태건을 잘 알고 있듯, 태건도 마찬가지였다.

정연미는 감출 생각이 없었는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실은 아빠가 보자고 하셔.”

“날?”

뜻밖의 말에 태건은 어리둥절했다.

연미 아버지.

그동안 영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신을 봤던 사람이었다. 아니 거의 대부분, 헤어지란 의미의 말을 무수히 뱉어낸 인물이었다.

태건이 연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반년 전에도 만났을 때, 비슷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런데 만나자라.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정연미가 아버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태건에게 조심히 물었다.

“갈 거야?”

“어른이 부르시는데 가야지.”

“정말?”

“내가 아직 정속 주행 중이라서 당당해.”

태건이 조금 진한 농담을 하자 정연미가 바로 째려봤다.

“무슨 뜻이야?”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오빠.”

정연미 표정이 더 날카로워지자 태건이 슬그머니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때 빼고 광 좀 내볼까? 천천히 차 마시고 있어.”

몸을 돌린 태건은 바로 준비에 나섰다.

*  *  *

두 시간 후.

신촌의 어느 커피숍에 태건과 정연미가 들어섰다.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꾸민 태건과 산뜻한 느낌인 정연미의 분위기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2층으로 올라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정연미가 태건을 한 번 훑어보더니 가볍게 먼지를 털어줬다.

“잠깐만.”

툭, 툭.

정연미의 손길에 태건이 바로 물었다.

“먼지 많아?”

“아니, 조금이라도 더 깔끔해 보이면 좋잖아.”

말은 그랬지만 긴장감이 손끝 가득 느껴졌다.

태건은 가볍게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

“그래도…….”

“다 괜찮을 거야.”

태건이 위로하자 정연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크흠.”

조금 멀찍이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년 신사가 있었다.

키는 보통이었지만 눈매가 상당히 날카로웠다. 

그가 정연미의 아버지인 정희성이었다.

입꼬리는 내려가 있는 반면 눈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었다.

태건을 직시하며 다가오는 정희성의 온몸에서 못마땅함이 풀풀 풍겨 나왔다.

그 시선이 익숙한 태건이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척.

정희성이 도착함과 동시에 태건은 인사부터 했다.

“평안하셨습니까?”

“보면 모르나?”

첫 마디부터 곱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반응에 정연미가 울상을 지었다.

“아빠.”

“앉아.”

턱.

정희성은 회피하듯 자리에 앉았다.

태건과 정연미도 같이 착석했다.

순간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때 종업원이 쟁반에 차를 들고 다가왔다.

탁, 탁.

“맛있게 드세요.”

어색한 공기를 읽었는지 종업원은 조용히 말하고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그만큼 무거운 분위기였다.

태건은 그 분위기에 눌리지 않고 예의를 차렸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고. 만나자고 한 이유는 알고 있나?”

“아니요. 주시는 말씀 경청하겠습니다.”

태건이 답함과 동시였다.

정희성이 태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소방대원 그만둬.”

“.......”

“프랜차이즈 옷 가게 하나 차려주지.”

정희성은 통보하듯 말했다.

눈빛, 표정, 말투까지.

태건을 향한 모든 게 불만으로 가득했다.

비단 태건만을 향한 불만이 아니었다.

정연미를 향한 시선에도 못마땅함이 넘쳐흘렀다.

그간 많이 설득했지만 정연미가 꿈쩍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태건을 바꾸려는 듯했다.

꼬옥.

정연미가 테이블 아래에서 양손을 꽉 붙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태건은?

스윽.

그 손을 가볍게 잡아줬다.

그리고 정희성을 마주 바라보며 차분하면서도 우직하게 답했다.

“요새 들어 이 일이 너무 좋습니다.”

“전에는 고민해 보겠다고 했을 텐데.”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끌립니다.”

태건의 대답이 다부졌다.

그게 더욱 마음에 안 드는지 정희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결국 내 딸 고생시킬 생각인가?”

“노력하겠습니다.”

“박봉은 고사하고 툭하면 죽는 것이 소방대원이란 직업 아닌가?”

“…….”

맞는 말이라 태건의 말문이 순간 막혔다.

정희성은 단단히 벼르고 왔는지 더욱 날카롭게 아픈 곳을 헤집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구디소방서에서 소방관들이 죽었다면서?”

“네.”

“그럼 말 다한 거 아닌가?”

그가 쐐기를 박았다.

그 말이 태건의 가슴을 헤집었다.

어른인데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 대하기 어려운 상대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태건에겐 너무도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구우우.

태건의 분위기가 묵직하게 변했다.

그리고 정희성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분들은 그냥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그럼?”

“국민을 위한 순직입니다.”

태건은 단호한 목소리로 정정해줬다.

정희성이 살짝 움찔했다. 아무리 태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단어 선택의 잘못은 수긍해야 했다.

그렇다고 사과의 말을 바로 건넬 인물은 아니었다.

정희성은 태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른 질문을 건넸다.

“왜 그리 소방관에 미련을 못 버리나?”

“처음엔 알고 계신 대로 호구지책으로 택한 직업이었습니다.”

“한 번에 합격할 정도면 됐어. 그러니까 미련 버리고 내가 차려주는…….”

그가 말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태건은 처음으로 찰나의 틈을 파고들어 발언권을 쟁취했다.

“설사 그만두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뭐가 아니지?”

“혹시 사람 살려보셨습니까?”

“뭐라고?”

정희성이 눈을 살짝 치켜뜨자 태건이 해맑게 웃었다. 

“죽어가는 사람 구하는 기분,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지금.......”

“세상에서 타인의 목숨을 구하는 일 몇 개 안됩니다. 그 일을 제가 합니다.” 

태건의 말투에 자부심이 그득 묻어나왔다. 

“단지 그 때문인가?”

“제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 무슨.......” 

“제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란 걸 소방 일을 통해 배우고, 또 느끼고 있습니다.”

“흐음. 위험한 일일세.”

정희성이 고개를 저었으나 태건은 더더욱 굳건했다. 

“아버님 걱정 충분히 압니다.”

“그게.......”

정희성이 말문을 흐리자 태건이 잽싸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자신을 챙기면서 구할 겁니다. 그래도 요구조자들이 있다면 달려갑니다.”

“…….”

“거기 절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대답하는 태건의 눈빛이 맑게 살아있었다.

반대로 정희성 표정은 굳어졌다.

“자네, 위험한 사람이군.”

“지금은 그렇게 보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언젠가 술 한 잔 하자고 하실 날이 올 겁니다.”

“그럴 일은 없어.”

정희성의 단호한 끊음에 정연미가 애처롭게 불렀다.

“아빠.”

“연미, 너야말로 정신 차려.”

“…….”

“이쯤에서 정리 해. 그리고 오늘 이후로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그럼.” 

그릉.

정희성은 그 말을 남기고 일어났다.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는지 쌩하니 걸어갔다.

태건은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은 뭐.’

정희성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일은 모르는 법이다.

잠시 후.

태건과 정연미가 나란히 신촌 거리를 걸었다.

머뭇거리던 정연미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기…….”

“불안해?”

태건이 먼저 묻자 멈칫한 정현미가 우물쭈물 답했다.

“으, 으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오빠, 그러지 말고…….”

“믿고 기다려 줄 수 없을까?”

이번에도 태건이 먼저 질문했다.

오랜 교제로 서로의 생각을 얼추 눈치챌 수 있던 탓이다.

정연미 표정은 시무룩하고 어두웠다.

“그게…….”

“오빠를 믿어.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아.”

“……”

정연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더는 말없이 한참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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