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태건은 정연미의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다시금 느꼈다.
소방관.
누가 뭐래도 이젠 내려놓을 수 없는 삶이 되어 버렸다.
이채용 팀장이나 박성규 때문은 아니다.
자부심.
그 한 단어가 심장을 가득 채운 탓이다.
“원래 제 멋에 사는 거야.”
중얼거리던 태건이 싱긋 웃었다.
* * *
비번이 끝난 태건은 어김없이 출근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언제나처럼 출동이 반복되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막내, 그렇게만 해.”
오광휘 팀장이 칭찬할 정도로 며칠 사이 별문제 없었다. 화재 출동을 몇 번이나 나갔지만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물론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출동연습을 이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태건은 오늘도 어김없이 연습 중이었다.
지금까지 매일 혼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주변에 오광휘 팀장과 조규찬 등, 선배들이 가득 자리해 있었다.
다들 기대어린 표정이었다.
그들의 주목을 받는 태건은 마지막 1,000번째 장비착용을 연습하고 있었다.
착, 착.
숙련된 모습 정도가 아니었다.
집에서 옷을 꺼내 입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속했다.
그렇게 빠르게 착용을 마친 후였다.
번쩍!
“착용 끝!”
태건이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조규찬에게로 향했다.
조규찬도 얼른 초시계를 멈췄다.
띡!
그리고 결과는?
“……1분, 1분…….”
“1분, 뭐!”
오광휘 팀장이 기다리지 못해 다그치자 조규찬이 얼른 이어서 말했다.
“10초입니다.”
“몇 초라고?”
“10초요. 정확하게 1분 10초 54.”
스윽.
조규찬은 초시계를 돌려 모두에게 보였다.
그가 말한 시간 그대로였다.
그 순간 오광휘 팀장을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1분 10초라니.”
“쟤 혹시 이미 누르고 있던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냐!”
“나도 아는데, 아는데…….”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그때였다.
텅.
산소통을 내려놓은 태건이 그 어색한 분위기를 읽었다.
의아한 태건이 조규찬에게 물었다.
“다들 왜 그러십니까?”
“너, 너 뭐야?”
“뭐냐니요?”
태건이 어리둥절해하자 조규찬이 다시 입을 열려 했다.
“너……. 윽!”
“절로 빠져봐. 야, 강태건이. 막내, 인마!”
오광휘 팀장이 번개 같이 다가와 태건을 재촉했다. 그 다그침에 영문을 모르는 태건은 일단 대답부터 했다.
“네, 팀장님.”
“니가 직접 봐.”
척.
초시계가 태건의 눈앞에 떡하니 다가왔다.
태건은 거기 찍힌 숫자를 빠르게 훑었다.
- 00:01:10.54
그걸 본 태건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해냈드아아!”
차고가 들썩거릴 외침이었다.
처음 세운 기록은 아니었다.
마지막 20여회 착용 시간이 얼추 비슷했다.
그런데 유독 좋아하는 건 모두가 지켜본 가운데 세운 기록 탓이었다.
스스로 세운 약속을 모두에게 확인받았으니 기쁜 게 당연했다.
그때 오광휘 팀장이 태건에게 물었다.
“뭐야, 비결이 도대체 뭐야?”
“배운 대로 열심히 예습과 복습 했습니다.”
“잠은 8시간씩 꾸준히 자고, 삼시 세끼 다 챙겨 먹고?”
오광휘 팀장이 째려보며 덧붙여 말하자 태건이 당황했다.
“네?”
“이 자식이, 어디서 우등생 멘트를 카피하고 있어. 진짜 비결이 뭐냐니까?”
“우등생 멘트, 아…….”
그만의 독특한 표현에 태건은 얼떨떨했다.
그러나 오광휘 팀장은 아니었다.
“무슨 맛집 주방처럼 이건 비법입니다. 이러지 말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와, 치사한 자식.”
“정 그러시다면. 비결이랄 건 없지만 그래도 하나 말하자면…….”
“오, 이제 진짜 비결이 나오나?”
오광휘 팀장은 눈빛까지 반짝였다.
그때 태건의 입이 열렸다.
“젊음?”
“그래, 젊……. 뭐?”
“제가 아무래도 나이가 가장 어리다보니까. 하하.”
찡긋.
태건은 가볍게 윙크까지 했다.
기분 좋은 만큼 잔뜩 업 되어 있었다.
반면 오광휘 팀장은 대놓고 노려봤다.
“아, 짜식. 그거 좀 빨리했다고 이젠 맞먹으려고 그러네.”
“네? 아니, 그건 아닌데…….”
“장난이야, 장난……. 그보다 1팀!”
오광휘 팀장이 소리쳐 찾자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네!”
“다들 1초 이상 줄여!”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생한 막내에게 박수!”
다들 예상했단 듯이 태건을 향해 크게 박수쳤다.
짝짝짝.
“고생했다.
“자식, 이제 한 꺼풀 벗었네.”
“그거 잘했다고 현장에서 다시 건방떨면 죽는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곁들여졌다.
순식간에 돌변한 반응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확실한 건 그 어떤 대원의 표정에서도 시기와 질투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 되는지 시선들이 자신의 출동장비 쪽으로 향했다.
그건 순전히 개인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태건에게 건넨 축하는 진심이었다.
한편, 태건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모양이다.
이럴 때가 아니다.
띵!
서둘러 장비를 정리한 태건은 차고 안쪽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캐비닛 안에는 방화복 두 개가 걸려 있었다.
반쯤 타들어간 방화복들이었다.
주인이 없는 아니,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바로 이채용 팀장과 박성규의 방화복이었다.
이렇게 보관하는 건 그들과 함께라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렇게 바라보던 태건이 방화복들에 손을 얹었다.
턱.
“팀장님, 선배님, 저 해냈습니다.”
손을 얹자 차가워야 할 방화복들이 후끈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날 현장의 열기를 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날 모두를 위해 자신을 불 속에 던진 희생정신과 열정이 남아 있었다.
틀림없었다.
태건은 방화복들에 얹은 손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꾸욱.
살포시 얹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많은 연습시간 동안 여기에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가올 용기를 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야 들어올 수 있었다.
이젠 그날의 저린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단지 가슴 한편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야 그대로였다.
태건은 괜스레 착용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젠 그때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란 걸 알면서도 그냥 그러고픈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채용 팀장의 방화복을 열었다.
그때였다.
방화복 안감에 빨간색 실로 수놓인 한글이 보였다.
-불은 살아 있다.
그 문구를 본 태건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반쯤 불타 없어졌지만 태건의 머릿속엔 온전한 문장으로 보였다.
이채용 팀장이 습관처럼 하던 말인 탓이다.
불귀신.
이채용 팀장의 별명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 뜻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요즘은 달랐다.
화재 현장 속에서 그의 노하우를 통해 설핏 엿보고 있었다.
태건은 글귀를 눈에 담고 또 담으며 뇌까렸다.
‘내 걸로 만들어야 해.’
다짐하는 모습에 성숙함이 풍겨왔다.
1,000번의 출동 연습은 육체적인 변화만 만든 게 아닌 모양이다.
자신을 이겨내고 또 이겨낸 시간들이 정신적인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었다.
* * *
그날 이후.
태건은 매사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걸 가까이서 매일 지켜보는 오광휘 팀장과 선배들이 제일 먼저 알았다.
“왜 저러냐?”
“그러게요.”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지?”
말과 달리 그저 흐뭇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에에엥!
출동 벨이 울리자 나름 준비하던 팀원 모두가 차고로 달려 나왔다.
“서둘러!”
그런 선배들 중 태건이 유독 눈에 띄었다.
누구보다 신속하게 펌프차로 뛰어갔다.
“먼저 탑승하겠습니다!”
타다닥!
한 발 뒤처진 선배들은 눈을 끔뻑거렸다.
“쟤 뭐야?”
“……언제 저렇게.”
멍하니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오광휘 팀장이 닦달했다.
“막내한테도 뒤처지고, 니들 뭐하냐!”
“죄송합니다!”
후다닥.
선배들은 얼른 마저 달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현장에서 태건의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과 달리 현장 진입보다는 솔선수범해 현장을 통제했다.
삑, 삑.
“뒤로 물러나세요. 뒤로요.”
호루라기를 불고 경광봉을 휘두르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현장에 진입하려고 호시탐탐 노리지 않았다.
선배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이상해.”
“조짐이 영 수상해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태건의 속마음은 달랐다.
‘요구조자가 없어 보여.’
이미 판단을 내린 터라 느긋할 뿐이다.
* * *
오늘도 역시나 화재 출동이었다.
그것도 밀집된 주택가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
태건은 오늘도 모여든 사람들의 걱정 소리를 들으며 저지선을 지키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선배들의 무전 소리가 들려왔다.
-띠릭. 팀장님, 푸우우. 큰불은 모두 잡았습니다.
-띠릭. 다들 상태 괜찮아?
-띠릭. 최악은 아닙니다만 좀 끈질기긴 했습니다.
지친 목소리가 무전기에 가득 들려왔다.
마침 경찰도 출동해 현장 통제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태건은 경찰에게 다가가 상황부터 설명했다.
“큰불은 잡힌 거 같고 잔화 정리가 좀 남은 거 같습니다.”
“잘됐네요. 아이코, 한시름 놨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선배들이 지쳐서 제가 좀 도울까 합니다.”
“그럼요. 들어가세요. 뒤는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례합니다.”
양해를 구한 태건은 바로 뒤로 움직였다.
그 길로 바로 현장 지휘 중인 오광휘 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잔화 정리를 도와도 되겠습니까?”
“너 요즘 얌전하더니 또…….”
“뒷정리를 돕겠단 겁니다.”
태건은 조금 강한 어조로 의견을 밝혔다.
오광휘 팀장은 조금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지쳐 있어서 들여보내는 거야.”
“감사합니다.”
타닥.
허락을 받은 태건은 곧장 현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