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대각선 끝을 비출 때였다.
뭔가 발견되자 연기투과 플래시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얼음이 녹아 축축해진 방의 구석이었다.
얼핏 보면 작은 보따리 느낌이다.
하지만 태건은 그 물체가 곧 찜질방 옷이란 걸 알아챘다.
혹시?
차자작!
태건은 재빨리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가까이 접근한 태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찜질방 옷을 덮어 놓은 듯한 물체는 바로 아이였다. 그것도 잔뜩 웅크린 채 고개를 다리 사이에 묻고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다.
“얘야!”
바로 자세를 낮춘 태건이 소리쳐 불렀다.
아이의 반응은?
“…….”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발견에 대한 기쁨 따위를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태건은 바로 아이의 어깨를 흔들며 다시 소리쳐 불렀다.
“얘야, 얘!”
“…….”
스르륵. 철푸덕!
아이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자세가 풀려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몽롱한 눈빛, 하얗게 질린 피부, 반대로 입술은 검붉은 느낌이었다.
그걸 본 태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유독가스 중독!”
이건 심각한 문제다.
화염 속에 있던 자체도 문제였지만 유독가스 중독은 성질이 달랐다.
최대한 신속하게 구급대에 인계해 병원으로 후송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건 의식 상태다.
그걸 확인해야 했다.
태건은 바로 아이를 흔들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나 보여? 얘야, 나 보이냐고!”
“흐, 흐으. 쿨럭!”
“더 내뱉어. 뭐든 다 뱉어. 뱉고 나 봐봐. 이 녀석아,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태건은 아이를 쉴 새 없이 다그치고 또 흔들었다.
그런 손길에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최대한 빨리 반응을 끌어내야 했다.
그냥 무작정 흔들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흔드는 사이에도 번개같이 손을 움직여 보조호흡기를 아이 얼굴에 씌웠다.
쎄에엑, 쎄에엑.
호흡하는 느낌이 진동했다.
최소한의 호흡이 이뤄지고 있다.
그건 곧 ‘살아있다.’란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젠장.”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반응을 보겠다고 지체하는 시간만큼 두 사람의 위험수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바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들려던 태건이 멈칫했다.
얇은 찜질방 옷차림인 때문이다.
밖은 불구덩이.
이대로 데리고 나가는 건 구출이 아닌 위험으로 떠미는 거였다.
고민은 짧았다.
손과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부욱!
방화복 상의 지퍼를 내려 펼쳤다.
그리고 아이를 그 속에 품어 안았다. 다시 잠그려 했지만 불어난 부피로 인해 지퍼가 잠기지 않았다.
개의치 않았다.
태건은 양손으로 앞섶을 여미며 아이를 감싸며 일어났다.
이어서 돌아섰다.
이젠 탈출해야 할 때였다.
활짝 열린 철문밖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사정없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탈출할 구멍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막막했다.
어느새 태건의 얼굴에 강렬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품속 아이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스윽.
고개를 내려다봤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호흡기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
한 글자다.
더도 없는 딱 한 글자.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태건은 흐려진 다른 글자가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엄마.
아이는 자신의 보호자를 찾고 있다.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신의 전부를 원하고 있었다.
태건의 눈빛이 달라졌다.
꽈악.
아이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낮게 읊조렸다.
“가자. 엄마한테.”
망설임도, 고민도.
심지어 걱정도 모두 털어버렸다.
이제 태건의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살아나간다.
무조건 이뤄야 할 목적이다.
각오의 절실함은 행동에 비례한다.
그 말이 정답이다.
각오를 세운 태건의 행동은 그만큼 신속했다.
아이를 안은 채 곧바로 아이스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타다닥!
그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막혔다.
들어올 땐 몰랐지만 나가려니 떨어진 천장 마감재가 불타며 허리까지 솟구쳐 올라 있었다.
열기는 방화복으로 막을 수 있다.
숨은 호흡기를 통해 쉬고 있다.
하지만 불길이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진퇴양난이다.
“젠장.”
절로 욕이 나왔다.
그만큼 불의 장벽에 갇힌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촤아악!
폭포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불의 벽을 좌우로 밀어내는 물줄기들이 보였다.
화재1팀이다.
그들이 분명했다.
가장 앞에서 방수하는 오광휘 팀장의 모습으로 더욱 확신을 굳혔다.
대략 20미터 정도 거리다.
서로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눈빛이나 표정을 나누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바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불길이 좀 더 누그러진 후에야 가능할 일이다.
그때 오광휘 팀장이 소방호스를 옆구리에 끼운 채 다른 손으로 무전기를 잡았다. 동시에 무전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띠릭. 강태건이. 이 자식아!
이번엔 태건도 순순히 무전기를 잡았다.
띠릭.
“실종자 아니, 요구조자 구조했습니다.”
태건은 살짝 여민 앞섶을 열어 아이를 보였다.
방수 중인 화재팀원 모두가 적잖이 동요한 모습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하지만 목소리는 오광휘 팀장에게서만 들려왔다.
-띠릭. 너도 요구조자야, 이 새끼야!
“곧 가겠습니다.”
-띠릭. 넘어오기만 해, 아주 그냥……. 잘 쏴, 이 자식들아!
오광휘 팀장이 무전하다 말고 팀원들을 다그쳤다.
그래도 그의 따가운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 걸 보니 걱정이 안도로 바뀐 모양이었다.
태건도 미안함과 뿌듯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문책 받아 마땅한 상황인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구디소방서의 모든 소방관들에게 야단맞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야.’
품고 있는 작은 천사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안도할 때였다.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동시에 뭔가 깨지고 뒤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직!
바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태건의 눈앞에 활활 타오르는 정자의 모습이 가득 잡혔다.
정자의 한쪽 기둥이 크게 갈라져 있었다.
아니, 지금도 갈라지고 있었다.
쩌적!
한 번 더 뒤틀림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곧 무너질 위기……. 아니, 당장 무너질 모습이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오광휘 팀장의 절박한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띠릭. 젠장, 강태건, 뛰어! 이쪽으로 뛰어!
-띠릭. 인마. 빨리!
-띠릭. 어서!
다른 선배들도 뒤따라 재촉 무전을 날렸다.
너무도 위험했다.
또 떠나보내는 일만큼은 죽어도 피하고 싶단 아우성이 무전 속에 가득했다.
물론 태건도 순순히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죽을 생각 따윈 없어!”
살 거다.
이 아이와 함께 꼭 맑은 공기를 마실 테다.
생각도 사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타, 타닥!
태건은 재빨리 완전히 꺼지지 않은 불의 벽을 향해 내달렸다.
한 걸음 내디뎠다.
선배들과의 거리는 18미터.
아직 멀다.
탁!
또 한 걸음 뛰었다.
16미터.
그때였다.
꽈직!
정자의 기둥이 엇갈리는 굉음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선배들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다급한 상황이라 더욱 재촉했다.
-띠릭. 강태건, 더 빨리!
-띠릭. 이 새끼야. 빨리 넘어와!
-띠릭. 어어, 무너진다. 태건아, 어서!
애가 타들어가다 못해 녹아 없어질 목소리들이다.
하지만 태건은 그들보다 더했다.
제발!
속으로 빌며 또 한 걸음.
이제 14미터 남았다.
순식간에 6미터를 줄였지만 아직 멀었다.
단 몇 초다.
그 몇 초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불은 태건의 편이 아니었다.
우지직!
또 한 번의 굉음이 울리더니 기둥이 완전히 쪼개졌다. 동시에 무게 중심이 흔들린 불타는 정자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 모습이 태건의 눈에 생생히 잡혔다.
“이런 제엔장!”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었다.
장비의 무게도 지친 몸도 상관없었다. 솜털까지 바짝 곤두선 상태에서 그런 걸 인지할 틈도 없었다.
그만큼 더욱 다급해진 마음 그대로 땅을 더 거칠게 박찼다.
탁!
한 걸음 더 갔다.
이제 12미터 남았다.
하지만 선배들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쓰러지는 정자와 거리도 좁혀져 갔다.
또 한 걸음.
이제 10미터.
반 왔다.
이제 반만 가면 된다.
태건은 저 멀리 서 있는 선배들만 눈에 담고 내달렸다.
그런 태건의 귀에 무전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띠릭. 더, 더 빨리!
-띠릭. 태건아!
-띠릭. 어어어……. 무너, 무너진다!
-띠릭. 강태건, 다이빙. 앞으로 뛰어!
다급함을 넘어선 선배들의 재촉 소리가 귀에 강하게 꽂혔다.
그중 태건의 귀에 쏙 들어온 건?
‘무너져?’
휙고개를 돌려봤다.
진짜다.
균형을 잃은 정자가 태건 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우르릉!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커다랬다.
그걸 본 태건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동시에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반사적으로 촤르륵 펼쳐졌다.
뒤로 물러선다?
달려가는 중이라 불가능했다.
앞으로 몸을 날린다?
10미터를 날아갈 재주는 없었다.
그럼 옆으로?
그렇게 피할 공간이 없다.
후두둑!
불타는 플라스틱 기왓장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만큼 정자는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삽시간에 오간 생각들 중, 그 무엇도 태건에게 희망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머릿속에 생각이 떠올랐다.
역으로. 무너지는 사이 틈 속으로 꾸겨 넣어.
순간 태건이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불길 속으로 휘발유통 들고 들어가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뚫고 갈 방법도 없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돌아서면?
확신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