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7)화 (27/320)

27화

박청수와 만남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런데 몸만 다녀간 게 아니라 음료수란 선물을 남기고 갔다. 구디소방서의 모든 대원들이 한 잔 쭉 들이켤 수 있는 양이었다.

음료수만 두고 간다는 게 마음에 남는지 미안하단 말을 연신하기도 했다.

태건은 그를 달래며 보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청탁금지법상 그 이상은 곤란한 이유도 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이렇게 찾아와주고 고마워해 준 자체만으로도 그 모든 일이 고생이 아닌 추억으로 남게 됐다.

더불어 태건의 결심도 더욱 굳건해졌다.

다시 한 번 자신의 휴직 철회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배웅을 마친 태건은 곧장 계단을 올랐다.

타다닥!

소방서의 최상층에 위치한 서장실로 향하는 길이다.

다부진 눈빛은 어떻게든 휴직을 철회하겠단 의지를 가득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강태건.”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태건이 멈칫했다.

돌아보자 서순영이 보였다. 지금껏 퇴근하지 않은 이유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단 느낌을 받았다.

태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솔직히 지금 가장 만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서순영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현관은 1층이다.”

“선배, 저…….”

“따라와.”

“…….”

태건은 침묵으로 항의했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서순영이 한마디 더 내뱉었다.

“내가 지금 겁나 피곤해 뒤질 거 같으니까 힘 빼게 하지 말고 따라와.”

“…….”

“할 말 있다고,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라, 이 자식아.”

서순영이 울컥해 으르렁거렸다.

할 말?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냥 부르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제야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태건이 몸을 움직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순댓국밥집 식탁에 마주 앉았다.

구수한 냄새가 가구 곳곳에 스며들 정도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식당이었다. 그리고 소방서와 가까워 대원들의 단골집이기도 했다.

두 사람 앞에 순댓국과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아침부터 소주라니.

근무가 없는 태건과 근무가 끝난 서순영이기에 반주가 가능했다.

끼릭. 콸콸.

소주병을 연 서순영이 태건의 잔을 넘치게 채웠다. 이어 자신의 잔도 채운 그가 바로 잔을 들며 말했다.

“마셔.”

“저 아직 포기 안 했습니다.”

“피곤해 뒤지겠는데, 술 먹이는 나는 안중에도 없냐?”

서순영이 따가운 눈빛으로 질책했다.

정말 안색이 시꺼멓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건 본인 좋자는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런 눈치를 챈 태건도 우선 소주잔을 들었다.

틱!

투박하게 부딪친 서순영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태건도 똑같이 행동했다.

“크으!”

목이 화끈한 느낌에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런 태건이 빈 잔을 내려놓자 서순영이 다시 채웠다.

콸콸.

그러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휴직해.”

“선배, 또…….”

“허송세월 보내라는 거 아니야.”

그의 말속에 깃든 반전에 태건은 귀를 꿈틀거렸다.

아니란 소리에 반발심이 솟구쳤다.

이렇게 된 거 태건도 할 말을 누르지 않고 뱉어냈다. 

“그럼 뭡니까. 대체 왜 전부 절 이렇게 밀어내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거 아니잖아.”

“위험해서 그런다고요. 우리가 끄는 게 가스불입니까. 위험은 모두가 각오하고 하는 일이잖습니까.”

“……거 새끼.”

휙휙.

서순영은 인상을 푹 찡그리며 빈 잔을 흔들었다.

태건은 소주병을 순순히 집어 들다가 돌연 눈빛이 반짝였다.

휙.

자신 쪽으로 끌어온 후 비장하게 말했다.

“확실히 대답해 주지 않으시면 안 따를 겁니다.”

“치사하게 술 가지고 협박하냐?”

“…….”

스윽.

태건은 대답하지 않고 소주병을 최대한 서순영과 멀리 떨어뜨렸다.

그 행동이 바로 답이었다.

서순영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쓰게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현장에서 한 행동들이 전부 아슬아슬했어. 아니야?”

“전부는 아닙니다.”

“일일이 따지지 말고 새꺄……. 태건아. 인마.”

그가 퉁명하게 부르자 태건도 삐딱하게 답했다.

“왜요.”

“지금부터는 술김에 하는 말이다. 그냥 술 취해서 씨불이는 거야. 알았지.”

“…….”

“새꺄. 우리 형제야. 비록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는 한 가족이야.”

퉁.

서순영은 들고 있던 빈 잔을 내리며 말했다.

태건의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늘 강하고 거친 서순영과 사뭇 다른 감성적인 말이었다. 아니, 그날 이후 처음 속마음을 꺼내 보이는 거였다.

태건은 멀리 치워둔 술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웠다.

졸졸.

그러면서 재촉했다.

“빨리 한 잔 더 드시고 마저 말해 봐요.”

“이 술 참 더럽게 비싸네.”

“비싼 술이니까 같이 마셔야지 않습니까.”

칭.

술잔이 부딪쳤지만 서로의 마음 같이 탁한 소리가 울렸다.

둘 다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서순영은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이어서 말했다.

“우리 모두 쭉 지켜봤어. 혼자서도 꿋꿋하게 출동 연습하는 널 보니까 좋더라.”

“…….”

“또, 요구조자 구하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안타깝더라.”

“…….”

쪼르르.

태건은 흐름을 끊지 않고 술잔을 채우는 걸로 추임새를 대신했다.

서순영은 그 잔을 곧바로 비웠다.

연거푸 마신 술 탓인지 얼굴이 급속도로 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어서 정말 술김이란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불만 보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널 지켜보는 우리는 생각조차 않는 거냐.”

“…….”

“누가 너보고 뒤지라고 빽쓰라고 했냔 말이다, 새꺄!”

텅!

서순영은 감정에 못 이겨 테이블을 내리쳤다.

벌게진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만큼 격한 감정을 가감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태건이 죄책감 때문에, 또 주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해 위험을 택했다고 확신한 눈치였다.

태건은 그런 오해는 안중에 없었다.

낮술이라 머리까지 금방 차올랐는지 마주 응수했다.

“현장만 출동하면 다들 절 갓난아기로 봅니다. 아무것도 못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미친놈이 어딨어!”

“요구조자가 거기 있어서, 다신……. 다신 누구도 두고 오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퍼엉!

태건도 똑같이 마음속을 터트려 버렸다.

끝끝내 그걸 꺼낸 태건의 눈시울도 어느새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서순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파르르.

눈꺼풀이 가늘게 진동했다.

“너, 너어…….”

“저 보세요. 세상에 어떤 아기가 이렇게 술 쳐 먹고 있습니까.”

“…….”

침묵하는 서순영에게 태건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이 방법은 과하셨습니다.”

“…….”

“마지막 잔입니다. 좋습니다. 갑니다. 그리고 1년 후에 보란 듯이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콰륵, 콰륵.

태건은 술을 쏟듯이 거칠게 따랐다.

그리고 그 잔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였다.

서순영이 불쑥 한마디 했다. 

“기다릴게 돌아와. 대신 더 성숙해지고 늠름해져서 돌아와라.”

“알겠습니다. 그럼 막잔하고 일어나겠습니다.”

쭈욱!

태건은 서순영을 향해 보란 듯이 술잔을 들이켰다.

술이 쓰지 않았다.

맹물처럼 밍밍하기만 했다.

이어서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대로 일어났다.

“1년, 그렇게 길지 않을 겁니다.”

휙.

태건은 앞서 선언한 대로 순댓국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태건의 눈빛이 강렬했다.

침대가 자신을 손짓했다.

하지만 태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

1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할 때다.

서순영의 충고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태건에게 시급한 건 실전 경험이었다.

어렴풋이 감을 잡은 불의 흐름, 그걸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1년 내내 불과 씨름하는 장소가 있을까?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인터넷부터 뒤적였다.

탈칵, 탈칵.

검색창이 수도 없이 바뀌고 또 변화했다.

그런 변화가 다양해질수록 태건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짙어졌다.

찾았다.

태건의 눈빛이 반짝였다.

“좋아, 목적지는 됐고.”

그 다음으로는 주변을 정리하는 거였다.

복잡할 수도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간단해질 수도 있었다.

태건의 생각은 이미 단순명료하게 굳어져 있었다.

가장 먼저 형인 강태영에게 전화했다.

“형.”

“갑자기 목소리를 왜 깔아?”

“됐고, 부모님 여행 경비 말이야. 내가 앞으로 얼마 보태야 되는지 계산해서 문자로 알려줘.”

태건의 말이 뜬금없었는지 강태영 목소리가 의아하게 변했다.

“뭐 땀시?”

“일시불로 내려고.”

“돈 많아?”

“이 집 보증금 빼면 충분해.”

“보증금? 너 무슨 소리야!”

강태영이 놀라 소리쳤지만 태건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1년 휴직했거든. 해외나 한번 다녀오려고.”

“뭔 해외여행을 집 보증금 빼서 하냐, 너 제정신이야?”

“후후. 이번엔 나도 미친 거 같아. 아무튼 계산해서 보내. 아니면 대충 계산 때려서 보낼 테니까.”

“야, 야!”

“시끄러, 끊어.”

뚝.

태건은 그냥 막 나가 버렸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해를 바랄 생각이 없었다.

왜냐?

“내가 생각해도 이번엔 진짜 미친 거 같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친형은 오죽할까 싶었다.

태건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뒷정리해야 할 게 또 하나 남아 있었다.

그건 연인인 정연미와의 문제였다.

이 부분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뚜루루.

“어, 오빠.”

“나 소방일 1년 쉬기로 했어.”

“으응? 그게 갑자기……. 어머, 그럼 그만둘 준비하는 거야?”

정연미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 소리를 들으니 태건도 조금은 마음이 쓰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데 자꾸 마음고생만 시키는 걸 좋아할 만큼 양심에 큰 털이 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다른 문제였다.

아무튼 결단을 내렸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니, 더 철저하게 준비할 작정이야.”

“어?”

“앞으론 내가 출동할 때마다 네가 불안하지 않게 할게.”

“오빠.”

“내가 준비할 게 있어서 일단 끊을게.”

태건은 조심히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다.

솔직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헤어지자는 건 아니기에 후회는 없었다.

*  *  *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어느 날,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 선 태건의 얼굴이 창백했다.

지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폭풍같이 지나갔다. 그래도 헛된 고생이 아닌 터라 이렇게 출국장에 서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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