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8)화 (28/320)

28화

태건은 손에 쥔 여권을 바라봤다.

가운데 기다란 비행기 표가 꽂혀 있었고, 목적지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미국, 플로리다.

태건이 선택한 건 미국의 의용소방대였다.

미국에선 의용소방대원도 급여를 받고 준소방대원의 대우를 받는다.

“역시 소방관 찬스가 적절했어.”

태건은 소방관이라 가산점을 받아 인턴으로 합격한 케이스였다. 물론 파리 목숨과 같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활약을 인정받으면 계약이 연장된다는 조항이 달려 있을 정도였다.

그런 조건임에도 태건을 채용하는 이유가 있었다.

마이애미는 매년 소방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한 번 산불이 나면 헬기가 아닌 비행기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기타 화재 사고도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실무를 경험한 인력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다.

태건이 선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근무시간도 내 마음대로.”

탄력적인 근무시스템으로 운영 중이다.

그 외에 시간은 공부를 하거나 다른 경험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렇듯 월급, 경험, 배움까지.

태건의 현재 상황에선 가장 이상적인 장소가 틀림없었다. 물론 서류부터 시작해 모든 걸 영어로 진행해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영어에 취약한터라, 그 부분에서 가장 애를 먹기도 했다.

잠시 지난 시간을 회상한 태건이 쓴 미소를 지었다.

“아무렴 어때.”

자신의 손에 비행기 표가 들려 있다.

이미 그에 따른 비자도 받아 여권에 곱게 새겨져 있었다.

그럼 된 거다.

지난 고생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반대로 이제부터 펼쳐질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만이 가득했다.

쉽지 않을 거다.

알고 있다.

그래도 뒷걸음질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곧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태건이 타고 갈 비행기 탑승 소식이었다.

꽈악.

“가볼까.”

여권을 힘껏 쥔 태건은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가는 길이다.

앞을 똑똑히 보고 한 걸음씩 힘차게 내디뎠다.

*  *  *

1년 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자 여러 옷차림의 사람들이 줄지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걷는 선글라스에 가벼운 반팔과 반바지 차림인 청년 한 명이 보였다.

바로 1년 전 홀연히 떠났던 태건, 바로 그 얼굴이었다.

어느새 구릿빛 피부는 더 짙어졌다.

그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는 건 몸매였다.

1년 사이에 몸이 많이 변했다.  

첫눈에 본다면 슬림해 보이지만 옷 사이로 살짝 보이는 잔근육이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모았다.  

스윽.

살짝 선글라스를 매만진 태건이 빙긋 웃었다.  

“돌아왔네.”

말 한마디에도 어딘지 모를 여유가 엿보였다.

1년 전 비장하게 떠난 모습을 지금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태건의 귀를 강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우. 강태건, 개폼 잡지 마라. 우우.”

“…….”

삐끗.

감상에 빠졌다가 한 방 얻어맞고 당황한 태건이 얼른 주변을 둘러봤다.

나지막한 펜스 너머에 태건과 비슷한 인상의 남자가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슈트핏이 똑 떨어지는 나름 미남이었다.

그는 태건의 2살 터울 친형 강태영이었다.

태건이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으며 시큰둥하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사람들 다 보는데 개폼이 뭐냐, 개폼이.”

“몸이……. 혹시 근육에 뻠뿌질 했냐?”

“아, 좀!”

강태영의 커다란 목소리에 태건이 인상을 구겼다.

역시나 태건만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큭큭.”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입을 가리며 잰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태건은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라 수습하기도 힘들었던 탓이다. 

강태영은 연신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얼마 후.

태건과 강태영은 가까운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테이블에 놓인 커피는 세 잔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영 기분이 안 풀린 태건이 톡 쏘아붙였다.  

“쪽팔린 줄 알아.”

“그게 네 쪽이지, 내 쪽이냐?”

“참 어떻게 사람이 늘, 항상, 변함없이 똑같은지.”

절레절레.

태건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강태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계속 깐족거렸다.

“사람이 변하면 끽, 아직 살 날 창창한데 그건 노노.”

“어디 가서 친형이라고 그러지 마.”

“흐응, 흐응. 아무리 그래도 내가 친형이야. 억울하면 엄마, 아빠한테 따져.”

“후우우. 1년 만에 귀국인데, 선샤인이 감싸도 모자랄 순간인데…….” 

쭈욱.

태건은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쭉쭉 들이켰다.

강태영은 입씨름에서 이겼다고 자축하며 빙글빙글 미소 짓고 있었다.

“내 말빨 아직 안 죽었으.”

“…….”

절레절레.

태건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철없어 보이는 형인데도 있어서 좋긴 좋았다.

그렇게 애매한 침묵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또각, 또각.

구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남자들의 나지막한 탄성들이 들려왔다.

“오오.”

“이야.”

그 소리에 형제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강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미 왔나보다.”

“나도 귀 있어.”

짧은 대화가 끝남과 동시였다.

척.

누군가 그들의 테이블 옆에 도착했다.

검은 구두에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검은 스커트가 보였다.

동시에 얇지만 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어디 앉으라고.”

“얘는 왜 나타나자마자 시비야.”

강태영이 대뜸 반박에 나섰다. 

스윽.

태건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거기에는 깔끔한 제복차림의 스튜어디스가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형제와 비슷한 이목구비였지만 훨씬 더 선명하고 또렷한 미인이었다.

막내 동생인 강주미였다.

셋째가 유전자 몰빵이란 속설을 단적으로 증명했다.  

아!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탄성을 자아낼 만했다.

그러나 오빠들의 눈에는 ‘성별이 바뀌는 거울’을 보듯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건 강주미도 마찬가지였다.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 정리를 시도했다.

“큰 오빠가 작은 오빠 옆으로 가.”

“내가 쟤 옆에? 오늘 공항에 유혈사태 날 일 있냐.”

“그럼 작은 오빠가 움직여.”

“뭘 늦게 와서 자꾸 움직이래. 아무데나 대충 앉아.”

강태영이 뚱하니 쏘아붙이자 강주미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허억, 어떻게 남매끼리 나란히 앉을 수가 있어? 그게 가능해?”

“나도 불가능한 거 아는데, 지금 상황상 어쩔 수 없어. 그냥 눈 딱 감고 앉아.”

“어머 어머.”

강주미는 차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투덜거림에 결국 태건이 입을 열었다.

“그럼 서 있던가.”

“뭐? 이……. 공항이다, 공항이야. 주미야 예쁜 생각.”

풀썩!

울컥한 자신을 다독인 강주미는 결심한 듯 강태영 옆에 앉았다.

그 순간 강태영이 질색하며 구박했다.

“왜 여기야. 왜! 저기 태건이 옆에 앉아.”

“여기가 자리가 넓잖아.”

“뭐? 태건이, 이 자식. 너 이걸 노리고 근육 키웠지?”

으르렁.

강태영이 태건을 보며 톡하니 쏘았다.  

태건은 이제 어이없어 할 기력도 없는지 대충 넘겼다.

“알아서 생각하고……. 아무튼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하와이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셔.”

“네가 숙소까지 확실히 안내했지?”

순식간에 강태영이 진지 모드로 변해 묻자 태건이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공항에서 만나서 식사도 하고, 예정에 없던 드라이브도 잠깐 했어. 덕분에 비행기 시간이 아슬아슬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 하와이 리조트 티켓은 어디서 난 거야?”

강태영은 그게 정말 궁금한 모양이었다.

태건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수더분하게 답했다.

“아는 분이 줬어.”

“엄청 유명한 리조트라던데, 객실도 스탠더드가 아니라며.”

그때 옆에서 강주미가 덧붙여 말했다.

“하와이에서도 손꼽히는 데야. 오션뷰가 있는 스위트룸은 진짜 엄청 비싸.”

“거길 보름 투숙권이라니. 그런 숙박권을 대체 누가, 너 써라. 이러면서 주는데?”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둘이 연합해 압박해왔다.

그래도 태건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만 그려져 있었다.

“그건 몰라도 되고, 그보다 주미가 생전 처음으로 애썼어.”

“뭐어? 처으음?”

“내 일정에 맞춰서 비행기 수배하고, 경유 중 체류시간도 꽤 신경 썼더라. 잘 했어.”

태건은 무심하게 칭찬했다.

그런 살가운 말이 오랜만인지 강주미가 새치름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답했다.

“내가 좀 해.”

“그만큼 쳐묵쳐묵 했음, 슬슬 뭘 내놓을 때가 되긴 했지.”

강태영이 분위기를 확 깨자 강주미가 도끼눈으로 변했다. 

“큰오빠아아.”

“왜, 뭐……. 아읏!”

강태영은 괜히 한마디 했다가 스스로 고통을 자처했다.

그런 강태영을 태건이 빤히 바라봤다.

“…….”

그 시선을 느꼈는지 강태영이 옆구리를 벅벅 문지르다 의아하게 바라봤다.

“손은 더럽게 맵네……. 너 또 뭐.”

“뭐 잊은 거 없어?”

“잊은 거? ……뭐가 있지?”

“내놔.”

척.

태건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강주미가 바로 눈치 채고 한 마디 거들었다.

“맞다. 작은 오빠한테 우리가 모은 여행경비 주기로 했잖아.”

“어? 어어. 그게…….”

“빨리 줘. 작은 오빠도 집 다시 구해야 되잖아.”

강주미가 똑소리 나게 말했다.

그 소리에 태건이 기특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가 사회생활을 하더니 뭘 좀 아네. 그런 의미에서 비행기표 값은 내가 줄게.”

“어머머. 내가 뭐 꼭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가 준다는데 거절하지는 않을게.”

“그렇겠지……. 형 들었지?”

태건은 교통정리를 끝내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강태영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으로 물들고 있었다.

“줘, 줘야지. 당연히 줘, 줘……. 야지.”

“뭘까. 왜 느낌이 싸해질까?”

“에, 크흐흠.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첫째 된 입장으로 동생들의 주머니를 풍족하게 해주려고…….”

“핵심만.”

태건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았다.

움찔한 강태영은 고민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딱 한 달만 기다려. 요즘 장이 안 좋아서 그렇지, 뒤집히면 한순간이야.”

“……설마 그걸로 주식 샀냐?”

“왜 형을 째려보고 그래. 자자, 둘 다 잘 들어봐. 이건 정말 고수가 나한테만 알려준 건데…….”

강태영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태건과 강주미는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당장 빼!”

“내 돈 내놔!” 

덕분에 태건은 귀국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혈압약부터 찾게 되는 기가 막힌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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