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저녁 무렵.
태건은 구디소방서 근방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태건은 차 안에 있던 강태영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한 달.”
“아, 짜식. 너 그렇게 형을 못 믿니?”
“응.”
“그래, 냉정한 대답 고맙다.”
강태영이 운전대를 잡은 채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태건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조심해 가.”
“야, 태건아. 잠깐만.”
“또 왜.”
“너……. 설마 복직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강태영의 표정이 어느새 진지해졌다.
이런 순간까지 철부지 형은 아니었다. 어느새 동생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장남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겼다.
태건도 그런 마음을 알기에 차분하게 답했다.
“당연히 복직해야지.”
“설마 너 미국에……. 아니지?”
“알아서 생각해.”
“태건아, 그러지 말고 우리 회사에…….”
“빨리 가.”
말을 뚝 자른 태건은 그대로 차 문을 닫아 버렸다.
텅.
바로 차창이 열리며 강태영이 울컥해 소리쳤다.
“이 자슥이, 형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야, 태건아, 그냥 가냐? 야!”
“…….”
태건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다시 나타난 태건은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슝슝.
차량이 빠르게 앞을 지나갔다.
태건의 시선은 차량들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었다.
-구디소방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너무도 새로웠다.
그럼에도 두 눈에는 미동도 없었다.
굳건한 눈빛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여전하네.’
물론 아직은 찾아갈 때가 아니다.
그 전에 먼저 가야 할 곳들이 있었다.
“…….”
스윽.
몸을 돌린 태건은 어디론가 걸어갔다.
잠시 후.
태건은 경기도 부천으로 넘어와 역곡역 뒤쪽 주택가를 걸었다.
저벅저벅.
여기는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지 예전 느낌을 물씬 풍겼다. 하지만 반대로 곳곳에 우뚝 선 아파트들도 보였다.
그런 전경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태건은 그런 풍경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여기가 바로 이채용 팀장이 살던 동네다.
“…….”
꽉 다문 입술로 묵묵히 걸을 뿐이다.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좀 더 걸어가자 어린이공원이 나타났다.
어둑어둑 해지는 시간이었지만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여럿 놀고 있었다.
태건은 한쪽에 서서 차근차근 살폈다.
그러다 이내 한 무리의 아이들을 발견했다.
몇몇 아이들이 한 아이를 둘러싼 채 괴롭히고 있었다.
그 중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눈에 익었다.
아니, 바로 태건이 찾아온 그 아이다.
이세찬.
이채용 팀장의 아들이다.
한눈에 알아본 태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
쿵쿵.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유치원생들이 이세찬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세찬이는 아빠 없대요. 아빠 죽었대요.”
“흑흑. 하지 마.”
“엄마도 늦게 늦게 들어온대요. 맨날 혼자래요. 아빠는 세찬이가 울보라서 죽었대요.”
“싫어, 흑흑. 그만 해.”
“베에, 베에. 약 오르면 아빠 데려와.”
유치원생들의 놀림은 하루 이틀이 아닌지 끝이 없었다.
바로 그때 유치원생들 뒤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처억.
지체 없이 다가선 태건이 행동에 나섰다.
여러 말 하지 않고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세찬아.”
“흐극, 흐극……. 어? 막내삼촌!”
“왜 울고 있어. 이리와.”
스윽.
태건이 자세를 낮춰 양팔을 벌렸다.
그 순간 이세찬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사암초온!”
경계심 따윈 없었다.
주변 어른들 모두 어린 이세찬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오해가 여기까지 번지지 않아 태건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결국 태건의 품에 이세찬이 푹 안겼다.
“흐어엉!”
동시에 터진 울음이 끝내 서러운 통곡으로 변했다.
태건이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아니 해줘야 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꽈악!
이세찬을 으스러지게 안아줬다.
그리고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뇌까렸다.
‘미안해.’
그날 자신이 구하지 못한 결과가 어떠한지도 뼈 시리게 절감했다.
이채용 팀장은 자신을 구했다.
그러나 자신은…….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버스는 떠났다.
그런 이채용 팀장 아들인 이세찬이 놀림거리가 돼 울고 있다.
내버려둔다면 이세찬에겐 반복될 일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렇게 울 것인가.
그것만큼은 태건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미안해.’
이제부터 시작할 모든 일에 대한 사과를 먼저 읊조렸다.
괴롭히던 유치원생들은 이상한 분위기에 서로서로 눈치를 봤다.
“가, 가자.”
“으응.”
합의를 보고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태건은 이세찬을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며 전혀 그렇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슥슥.
“세찬아, 반가운 건 좀 이따가 다시 하고. 이제 눈물 뚝.”
“흑흑. 막내, 흑흑. 삼촌.”
“……이세찬. 눈물 뚝 하라고 했어.”
태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그 매서운 기운에 놀란 이세찬의 울음이 쏙 들어갔다.
“헉. 히끅. 흑!”
“우리 세찬이 왜 바보처럼 괴롭힘 당하고 있었어.”
“으응?”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그래도 안 되면 싸워.”
“막내삼촌.”
이세찬은 얼떨떨한 얼굴로 불렀다.
태건은 옆으로 방향을 돌리고 유치원생들을 가리켰다.
스윽.
“가서 싸워. 뒷일은 삼촌이 책임질 테니까 싸워.”
“쟤들은 나보다 크고, 또 세 명이고…….”
“이세찬 잘 들어. 네 아버지는 자신보다 수십 배 커다란 불과 매일 맞서 싸웠어.”
“…….”
“불이 크다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불이 많다고 위축되지 않았어.”
태건은 한 마디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아빠……. 맞서 싸워…….”
더듬는 이세찬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이젠 기억에만 존재하는 아버지.
이세찬의 속 깊이 잠든 이채용 팀장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태건은 그런 이세찬을 더욱 거세게 북돋웠다.
“이채용 팀장님은 수백 아니 수천명의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떠난 영웅이었어.”
“…….”
“이 삼촌이 거기서 다 봤어. 보고 말해주는 거야.”
“정말……. 이야?”
이세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건은 비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백 번, 천 번, 아니 평생 똑같이 말할 수 있어. 손가락도 걸 수 있어.”
“…….”
“그런 멋진 아빠를 친구들이 놀리면 되겠어?”
“아니, 안 돼.”
절레절레.
이세찬은 다시금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단호했다.
이채용 팀장이 아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난 게 분명했다.
태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곧장 이세찬의 자그마한 손을 주먹으로 말아 쥐며 말했다.
“다쳐도 되고, 져도 괜찮으니까 맞서 싸워. 다시는 누구도 네 아버지를 놀리지 않을 때까지.”
“…….”
“울고 숨으면 지는 거야. 지면 평생 놀림 받아야 돼……. 세찬아, 그러고 싶어?”
“시, 싫어. 그건 싫어.”
“그럼 이 손으로 세찬이가 아빠 지켜줘.”
꾸욱.
태건은 이세찬의 주먹을 더욱 야무지게 감쌌다.
그 힘이 전달됐는지 이세찬의 눈빛도 독하게 변해갔다.
이내 돌아선 이세찬은 유치원생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놀리지 마, 우리 아빠 욕하지 마. 이 나쁜 놈들아!”
“…….”
“사과해.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해!”
“시, 싫어!”
“이, 이씨. 이야압!”
휙휙.
이세찬은 두 주먹을 휘두르며 유치원생들에게 달려들었다.
“너, 너, 이씨!”
“아빠도 없는 게 까불어!”
우당탕!
순식간에 쌈박질이 시작됐다.
태건은 일절 관여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봤다.
하지만 속은 조금 달랐다.
‘오른쪽, 피하고, 어이쿠, 세찬아, 왼쪽, 발로 거길 그냥 확 차버려!’
치어리딩에 버금갈 정도로 열렬하게 응원 중이었다.
그러나 애들의 막 싸움이었다.
덩치 크고 수가 많은 쪽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얻어터지고 떠밀린 이세찬은 결국 넘어졌다.
쿠당!
“아흑!”
“쨉도 안 되는 게, 어디서 까불어!”
유치원생들은 득의만면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터덕.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이세찬이 악을 쓰며 일어났다.
“이, 이……. 이이익!”
확실히 전과 달랐다.
아버지를 위한 싸움.
독기가 풀풀 풍겼다.
이세찬의 두 눈은 억울하고 분함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데 눈물부터 닦지 않았다.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유치원생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압!”
“또? 우씨, 안 봐줄 거야!”
우당탕.
또 한 번 아이들이 격돌했다.
이세찬은 또 넘어졌다.
쿠당!
“이익, 아직 안 끝났어!”
다시 일어나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그 후로도 또 넘어지고, 또 쓰러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옷도, 얼굴도 엉망이 되어 갔지만 오뚝이처럼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났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에 점점 질려갔다.
아직 아이들이다.
이렇게 독을 품고 덤벼드는 상대가 처음일 터였다.
당연히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 오지 마!”
“그만 해. 하지 마!”
유치원생들이 소리쳐 만류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엉망이 된 이세찬은 꾸역꾸역 그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비틀.
“사과 해……. 우리 아빠 욕한 거……. 미안하다고 말 해!”
“시시시, 싫어!”
“그럼 이리 와, 도망가지 말고 덤벼!”
“흐앙. 무서워. 저리 가!”
급기야 이세찬이 다가가고 유치원생들이 물러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찬 모습에 태건의 가슴에 뭉클함이 솟구쳤다.
‘팀장님 아들 맞습니다.’
이채용 팀장이 지금 이세찬의 모습에서 엿보였다.
불구덩이 한가운데서도 포기할 줄 몰랐던 바로 그 이채용 팀장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