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처음으로 들려주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세찬이 일은……. 고마워요. 인사가 부실해서 미안해요. 내가 못되고 나빠서 제대로 인사 못하겠어요.”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만 돌아가 주세요. 가급적 빨리 떠날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휙.
정지희는 힘든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돌아선 태건은 쫓아가지 못한 채 빌라에 들어가는 걸 지켜만 봐야 했다.
부스럭.
품속에 준비해둔 봉투는 결국 빛을 볼 수가 없었다.
“시기상조였던 걸까.”
다시 걸음을 옮기던 태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오광휘 팀장을 만나 봐야 할 거 같았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오늘 어떤 근무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못 먹어도 고.”
휙!
태건은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바로 몸을 돌렸다.
* * *
잠시 후.
태건은 어느 아파트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찌르릉, 찌르릉.
인터폰에서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십니까?
오광휘 팀장의 목소리였다.
1년 만에 들어도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침 집에 있었다.
‘빙고.’
역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일단 찔러보는 게 정답인 모양이다.
태건은 차분히 인터폰에 자신을 비추며 자신을 밝혔다.
“팀장님, 저 강태건입니다.”
-우, 우와악! 너, 너!
“네, 저…….”
태건이 말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쿠구구궁!
건물 무너지는 발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반쯤 열렸다.
그 속엔 귀여운 캐릭터 잠옷을 입은 오광휘 팀장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야, 너, 와, 야……. 강태건이!”
“팀장님, 재워주세요.”
“1년 만에, 그것도 다 저녁에 찾아와서 갑자기?”
오광휘 팀장의 얼굴에 황당함이 가득 물들었다.
꾸욱.
돌연 현관문을 붙든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뻔히 바라보고 있는 태건이었지만 얼굴에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말도 청산유수였다.
“오늘 돌아왔는데 잘 데가 마땅치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여기가……. 아파트형 숙소로 보이냐? 아니 아니, 그거 따지기 전에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던가?”
“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면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겠네요.”
“어? 어어,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뭐지?”
오광휘 팀장은 너무 갑작스러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그의 이해력을 대폭 상승시켜줄 특효약을 떡하니 들어올렸다.
“귀국 후 첫 방문이라 소소하게 21살로 준비했습니다.”
벌컥!
“……환영한다. 웰컴 투 코리아, 웰컴 투 마이 홈.”
“실례합니다.”
“실례는 무슨, 내 집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들어와.”
떵떵 소리친 오광휘 팀장은 안에서 손짓까지 했다.
태건은 그런 환영을 받으며 들어갔다.
오광휘 팀장의 집은 좋게 말해 부산했다.
나쁘게 말하면 지저분하단 의미였다.
하지만 그런 거 일일이 따질 정도로 태건은 까칠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태건이 사온 양주를 가운데 뒀는데 잔은 소주잔이었다.
언밸런스한 모습이 오광휘 팀장 성격과 은근히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런 모든 건 지금 관심사가 아니었다.
소주잔에 담긴 양주를 들이켜는 두 사람의 표정이 무거웠다.
탁.
똑같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광휘 팀장이 슬라이스 치즈를 한 조각 입에 넣으며 말했다.
“쩝쩝, 네가 거기부터 찾아갔을 줄은 생각 못했다.”
“저도 만나고야 성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휴. 제수씨가 또 모진 소리 했나보네. 속상하겠지. 네가 이해해라.”
톡톡.
그는 쓰게 답하며 소주잔을 두드렸다.
태건은 바로 양주를 다시 채우며 본론을 꺼냈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팀장님은 아시죠?”
“집안 꼴이 말이겠냐.”
“……어렵군요.”
“우리가 슬쩍 찔러주려다가 먹은 욕만 모아도 장편소설 급일 거야.”
턱!
오광휘 팀장도 씁쓸한지 양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한편 태건은 속으로 안도했다.
‘나까지 그랬으면…….’
정말 귀싸대기 얻어맞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씁쓸했다.
가장의 부재로 인해 격변한 생활환경에 정지희도 많이 힘들 거다.
감히 추측할 뿐, 그 스트레스는 상상도 못할 터였다.
쭉!
입안이 까끌해진 태건도 한 잔 힘차게 들이켰다.
이번엔 오광휘 팀장이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넌 미국에서 뭐하다가 왔냐?”
“조만간 알게 되실 겁니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유턴하네.”
“반가운 분과 술 마시니까 술술 들어가네요.”
쭉.
태건은 또 한 잔 들이켰다.
오광휘 팀장은 술잔을 쥔 채 유심히 바라봤다.
“달라졌네.”
뭔가 변했다.
하지만 아직 정확히 뭔지 모르겠단 뉘앙스를 풍겼다.
* * *
다음날 아침.
태건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흐음. 여기가……. 아, 맞다.”
어질러진 거실을 보고야 오광휘 팀장의 집이란 게 기억났다.
잠시 생각한 태건은 손에 닿는 물건부터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밥값은 해야지.”
척. 척.
하나씩 정리하던 태건은 먼지가 내려앉은 장식장에 다다랐다.
한 칸에 엎어진 액자들을 발견하고는 투덜거렸다.
“팀장님도 참, 이렇게 쓰러진 것도 모르고 그대로 놔두셨네.”
스윽.
중얼거리며 가장 큰 액자를 들었다.
액자 속 사진을 본 순간 태건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결혼사진이었다.
오광휘 팀장이 독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삭막한 집안 분위기와 엎어진 결혼사진.
느낌이 대번에 왔다.
“아……. 실례.”
척.
액자를 다시 엎어놓고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시간 후.
퉁퉁 부은 오광휘 팀장이 식탁에 뚱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캐릭터 잠옷은 다시 봐도 압권이었다.
깨끗해진 집안이 아직 적응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게다가 지금 식탁에는 수저와 김치가 조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이게 뭔 일이래.”
그가 중얼거릴 때였다.
태건이 김치볶음밥이 담긴 커다란 접시를 내려놓았다.
척.
“맛은 보장 못하지만 먹은 만을 하실 겁니다.”
“너 왜 그러냐?”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고요.”
“거참.”
“일단 드시죠. 잘 먹겠습니다.”
터억.
태건은 보란 듯이 크게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이?
“으음.”
끄덕끄덕.
자신이 기대했던 맛보다 괜찮자,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곁들였다.
오광휘 팀장은 그런 태건을 묘하게 바라봤다.
식사는 순식간이었다.
식탁 위에 빈 접시만 가득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치울 테니까 출근 준비하십시오.”
그릉.
태건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때 오광휘 팀장이 손짓해 만류했다.
“잠깐, 다시 앉아봐.”
“하실 말씀이라도?”
“어제도 그렇고,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능글맞아진 거야?”
“그건 이따가 저녁에 식사하면서.”
찡긋.
태건은 눈짓을 더해 대충 넘겼다.
그런 모습이 확실히 1년 전과 차이가 있었다.
잠시 후.
오광휘 팀장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었다.
어느새 다가선 태건이 인사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왜 나만 가냐, 여기 내 집인데?”
“저도 좀 이따가 나갔다가 올 겁니다. 아차, 현관문 비번은 문자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계속 뭔가 이상하지 않아?”
오광휘 팀장은 도무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더분하게 배웅했다.
“제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고 하셔서요.”
“갈 데도 없다는데……. 에휴, 모르겠다. 놀고 있어라.”
오광휘 팀장은 생각하기 귀찮단 얼굴로 현관 밖으로 나갔다.
턱.
문이 닫히자 태건이 옅게 미소 지었다.
“설마 빈털터리로 알고 계시나?”
굉장한 오해였지만 굳이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
-현관비번, 10004.
오광휘 팀장의 문자에 태건은 빵 터졌다.
전부터 만사형통을 강조하더니 비번까지 만사일 줄은 몰랐다.
“하하하. 하여간 팀장님.”
예측불허의 성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 *
몇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태건이 나타난 장소는 경기도 화성의 어느 시장 주차장이었다.
삐빅.
렌트카의 문을 잠근 태건은 곧 시장 입구를 바라봤다.
동시에 입꼬리가 일자로 바뀌었다.
“…….”
부스럭.
품에 넣어둔 봉투부터 다시 확인했다.
박성규와 술에 취해 걸으며 나눈 대화가 지금도 선명했다.
그걸 위해 준비한 봉투였다.
태건은 더 지체하지 않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취 가득한 시장 속.
몇 개의 점포를 지나치자 포목점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시장 특유의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옷들이 가득했다.
반면 태건의 긴장감은 깊어져만 갔다.
“후우.”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갔다.
띵동.
센서 벨이 울리자 안쪽에서 파마머리의 중년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어서오세요……. 어, 어?”
“어머님, 안녕하셨습니까.”
꾸벅.
태건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멀리 화성까지 찾아온 곳.
거기에 자리한 그녀는 박성규의 어머니였다.
태건이 그렇듯, 그녀도 한 눈에 알아봤다.
“어떻게……. 오랜……. 만이네요.”
터덕터덕.
힘없이 걸어온 박성규 어머니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태건은 깊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늦게 와서 송구스럽습니다.”
“흐으음. 흐으으음. 먼, 먼 길이었을 텐데…….”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눈에 훤히 보이는 하얀 거짓말이었다.
박성규 어머니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런가보다 했다.
태건의 손을 잡아 안쪽으로 이끌었다.
턱.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이내 안쪽 카운터에 자리했다.
말이 카운터였지 작게 누울 수 있는 공간뿐이다.
박성규 어머니는 태건을 대하는 게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