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지금 이런 상태입니다.”
“헐. 너 방화복에 뭔 짓을 한 거야. 불똥 떨어뜨려서 내구성 실험이라도 했냐?”
“그래서 언제 바꿔주실 겁니까?”
“나도 모른다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그때까지 뭐 입고 출동하라고요.”
태건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때였다.
공손히 전화하던 소방장비회계팀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 자식들아, 서장님하고 통화 중인데 왜 시끄럽게 떠들어!”
“강태건이 방화복을 교체해 달랍니다.”
“뭐? 강태건, 소방서에 방화복이 굴러다니는 줄 알아? 시끄러우니까 나중에 얘기해!”
소방장비회계팀장은 대놓고 밀어냈다.
태건은 지금 상황이 너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화차이가 아직 몸에 와닿지 않아 더더욱 황당했다.
“소방관이 방화복 바꿔 달라는 게 이렇게 어려워야 될 문젭니까?”
“너 대체 어느 별에서 사세요. 원래 어려운 거야.”
“어이가 없네요.”
“내가 할 소리거든? 나 일 해야 되니까 그냥 좀 가라.”
휙휙.
이영수는 손짓으로 밀어내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태건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든 걸 떠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저기, 선배님…….”
“아, 진짜. 적당히 좀 하자.”
휙!
이영수는 귀찮단 듯이 한 번 더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순간 태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없다면 답니까. 기능 저하된 방화복 입고 불 속에 뛰어드는 건 우린데, 없다면 끝이냔 말입니다!”
“뭐, 인마? 어디 화재팀 막내가 행정실에서 큰 소리야!”
“큰 소리 안 치게 생겼습니까. 없다, 모른다, 안 된다. 그 말밖에 안 하는데요.”
태건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목숨과 직접 연관된 일이라 더더욱 화가 났다.
반면 이영수도 수그러들리는커녕 더더욱 핏대를 올렸다.
“우리가 일부러 안 준다는 거야, 뭐야!”
“최소한 알아보겠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르릉.
태건은 사무실이 진동할 정도로 대놓고 따졌다.
분명 태건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행정실 직원들이 보기에 태건은 그저 화재팀 막내일 뿐이었다.
“화재팀 안 되겠네. 막내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1년 쉬고 오더니 개념도 늘어졌나.”
이죽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때 장비회계팀장이 수화기를 내리며 소리쳤다.
“강 대원, 알았으니까 내려가 있어.”
“부탁드립니다.”
“……후우. 가보라니까.”
“그럼.”
휙.
태건은 그대로 몸을 돌려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뒤에선 100만 볼트짜리 눈빛이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찌리릿!
뒤통수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
저벅저벅.
하지만 태건은 눈곱만큼도 동요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당당히 걸어 나갔다.
마침 당직 날이었다.
어두운 밤 시간.
끼익.
사무실 문이 열리며 오광휘 팀장이 방화복 세트를 들고 들어왔다.
무심하게 바라보던 태건은 새로운 방화복에 눈빛을 반짝였다.
“그거 혹시 제 껍니까?”
“……그래. 니꺼 맞아. 장비팀장님이 서울재난본부까지 가서 애써서 구해왔다더라.”
“장비팀장님 끗발 좋으시네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쑥!
태건이 웃는 얼굴로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두 손에 뭔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오광휘 팀장이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한 태건이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나도 알아. 너보다 10년 넘게 이 짓을 했는데 모르겠냐.”
“......”
“당연한 요구지만 말이다……. 행정실에서도 현장 애들 챙겨주려고 진짜 엄청 애쓰고 있어. 위에서 내려오는 게 없어서 그렇지.”
“별별 게 다 문제네요.”
태건은 어이가 없어 쓴소리를 했다.
그 소리에 오광휘 팀장은 숨을 툭 내쉬었다.
“푸우. 그럼 어쩌냐.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럼 방화복 안 받겠습니다.”
“또 왜?”
“그냥 사비로 사죠, 뭐.”
태건이 시큰둥하게 말하자 오광휘 팀장은 골머리가 지끈거리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럼 이건 어쩌라고.”
“팀장님 꺼 바꾸시면 되겠네요.”
스윽.
태건은 대답하고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진짜 받지 않겠단 의미였다.
오광휘 팀장은 손에 든 방화복을 찢어버릴 듯 노려보며 짜증을 부렸다.
“아으으. 아으!”
답답함이 가득 느껴졌다.
기본 중에 기본 장비인 방화복이 여러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태건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했다.
그런데 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말했다.
“헬로, 미스터 칼. 잇츠 미……. 하하. 롱타임노씨, 나띵 벗…….”
쏼라쏼라.
조금 투박한 발음이었지만 통화를 유연하게 이어갔다.
다음 날 아침.
당직 근무를 마친 태건은 집으로 돌아왔다.
“후, 밤새 큰 화재가 없어서 다행이야.”
안도하며 작은 방으로 직행했다.
방화복이 너덜너덜하니 출동해도 불안해서 뭘 할 수가 없었다.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니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그런 태건을 뒤에서 오광휘 팀장이 불렀다.
“태건아, 우리 얘기 좀 하자.”
“왜 그렇게 심각하십니까?”
“오라니까, 피곤하니까 간단하게 목만 축이지 뭐.”
처억.
오광휘 팀장은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캔을 식탁에 올렸다.
태건은 의아해하며 맞은편에 자리했다.
치직, 턱.
동시에 맥주 캔을 따고 한 모금 크게 마시는 모습이 이젠 자연스러워 보였다.
“크으.”
“휴. 좋다.”
짤막한 탄성도 주고받았다.
곧 오광휘 팀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사무실에서 못다 한 대화를 이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어젯밤에 그 태도 뭐야. 1년 사이에 한국 실정에 대해선 다 까먹었어?”
“언제까지 위에서 주길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나도 알지. 아는데…….”
“알면 바꿔야죠. 목소리를 내고 쟁취해 내야 할 거 아닙니까.”
“다 떠나서, 너 혹시 미국에 방화복 주문했냐?”
오광휘 팀장이 다그쳤지만 태건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쟁취하겠다고 쌩으로 버티다가 몸에 불붙으면 저만 손해 아닙니까?”
“그럼 아까 새 방화복은 왜 거절했어. 어쨌든 구해다줬잖아.”
“무슨 동냥하는 것도 아니고, 바꿔줄 거면 다 바꿔줘야지. 저만 바꾸는 건 또 무슨 경우입니까.”
태건이 인상을 푹 쓰며 항의했다.
꿀꺽!
그리고 맥주를 다시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오광휘 팀장도 똑같이 맥주 캔을 내리며 따졌다.
“크으. 그렇게 말하는 너도 하나만 주문했잖아.”
“아니요. 10세트 주문했습니다.”
“……뭐? 그거 좀 비싸지 않아?”
“미국에서 돈 좀 벌어 왔다니까요.”
태건은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 허세처럼 보일 뿐, 건방지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광휘 팀장의 표정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아니,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와우, 대체 얼마나 벌었는데 저래?”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정도입니다.”
“그게 뭔 소리야.”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고요. 후후.”
“저 얄미운 여유를 보아하니 적지는 않은가 보네. 그런데 미국에선 소방관도 그렇게 벌어?”
오광휘 팀장은 말하다 궁금해졌는지 질문으로 전환했다.
태건은 맥주 캔을 입가로 가져가며 답했다.
“근무 장소와 환경, 시간에 따라 달라서 무조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꿀꺽!”
“어째 너는 그걸 충족시키는 조건이라 많이 벌었다고 하는 거 같다?”
“크으, 빙고.”
찡긋.
태건은 가볍게 윙크하며 상큼하게 답했다.
그러나 오광휘 팀장의 눈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눈에 뭐 들어갔냐?”
“……아무튼 넉넉하게 구매했으니까 팀장님도 입으세요. 브랜드라 성능부터 다르단 걸 느끼실 겁니다.”
“이 자식, 어디 외국 물이 들어서. 그럼 못써 인마!”
“좋은 걸 좋다고 하는 겁니다.”
태건은 당차게 의견을 밝혔다.
쭈욱.
맥주를 마시던 오광휘 팀장이 흘겨봤다.
“사람들이 흉봐, 인마.”
“써보시면 압니다.”
“……짜식이. 할 말 없게.”
“아무튼 한 번 써 보십시오. 망가지기 전에 또 사놓을 거니까 아껴 입지 마시고요.”
꿀꺽, 꿀꺽.
대화를 마친 태건은 남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며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화재팀 사무실에 거대한 상자가 몇 개나 배송되어 왔다.
“오호. 왔나.”
사락.
태건은 바로 내용물을 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나온 건 여러 벌의 방화복 세트였다. 통관 문자를 어제 받았는데 오늘 온 걸 보면 확실히 한국은 배송의 천국이었다.
불쑥.
방화복 한 벌을 들어 올린 태건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쭉쭉 늘려보기도 했다.
엄청 질기고 오밀조밀한 소재라 태건의 힘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이거야, 전통답게 이름 값은 한다니까.”
너무도 익숙하단 뉘앙스였다.
태건은 두고두고 입으려고 여러 벌을 주문한 게 아니었다.
우선 한 세트를 챙겨 오광휘 팀장 책상에 올렸다.
터억.
“여긴 됐고.”
그 다음으로 선배들에게 한 세트씩 들고 다가갔다.
“방화복, 이거 입으시죠.”
“우리 몫 까지 샀냐?”
“묶음배송이 저렴하거든요.”
태건은 넉살 좋게 말했다.
요즘 훈훈해진 분위기로 이 정도는 용납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선배들 반응은 태건의 예상을 깼다.
“됐으니까 너나 많이 입어.”
“방화복도 방화복인데, 이거 방화장갑은 쇠갈퀴로 두드려도 끄떡없는 겁니다.”
“톱으로 썰어버릴까 보다.”
“톱도 안 듣습니다. 제가 실험해봐서 압니다.”
태건이 해밝게 화답했지만 선배들 표정은 더 굳어졌다.
“누가 말 장난하재? 받았다가 위에 미움 사.”
“정균 선배.”
“됐다. 너랑 뭔 소리를 하냐. 에잉!”
휙.
최정균이 먼저 몸을 돌렸다.
휙휙.
뒤따라 다른 선배들도 모두 태건과 등졌다.
졸지에 새가 된 태건은 눈을 끔뻑거렸다.
“대체 왜?”
그때 오광휘 팀장이 사무실에 들어오다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뭐야……. 이게 왜 내 책상에 올라와 있어?”
“팀장님. 그때 말씀드렸던 그겁니다.”
“이제 도착했나 보네. 오오, 이거 나쁘지 않아……. 잘 쓸게.”
톡톡.
만져보고 두들겨본 오광휘 팀장이 만족해했다.
태건의 얼굴도 그제야 다시 밝아졌다.
“별 말씀을. 그런데 선배들은 싫다는데요.”
“냅둬. 저러다 불에 데여봐야 기능 저하가 뭔지 실감하겠지.”
“비치는 해두겠습니다.”
“그래. 알아서 돌려 입든, 다른 팀 애들이 입든, 알아서 할 거야.”
오광휘 팀장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선물 받은 자신의 새로운 방화복만 가득 눈에 담으며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