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공포를 느끼기에 차고 넘치는 높이였다.
떨어지면?
두 다리 박살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믿을 건 두툼한 방화벨트 하나뿐이다.
젠장. 젠장.
속으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긴장감에 온몸이 굳어지는 거 같았다.
“후우우, 후우우우.”
숨을 내쉬고 또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5층의 현관문들이 열렸단 환희어린 소식이 인이어에서 울리길 바랐다.
아니, 좋은 소식은 이미 들려오고 있었다.
-띠릭. 101호 불길 잡았습니다!
-띠릭. 구조대 202호, 요구조자 모시고 나가!
-띠릭. 내부 소화전 확보, 소방호스 늘립니다!
분명 귀가 즐거운 소식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태건의 현재 상황과 별개 내용들뿐이었다.
기다림이란 여유가 있을 때나 즐길 수 있는 감정이었다.
지금은 그런 사치를 부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젠 행동해야 했다.
꽈악.
태건은 다시금 얇은 로프를 말아쥐었다.
지금이다.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번쩍!
“으으, 으자자자!”
태건은 마지막 남은 한 톨의 공포마저 기합으로 밀어내며 뒤로 몸을 날렸다.
같은 시각.
지상에서 누군가 그런 태건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 저기 뭐야!”
“뭐가……. 저 사람 미쳤어!”
“끼아악!”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얼른 두 손으로 눈을 덮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후두둑 지상으로 떨어졌다.
숨죽인 사람들은 기다려도 예상(?)되는 소리가 없자 슬금슬금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501호의 널찍한 베란다 창문이 깨진걸 보고야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말, 말도 안 돼.”
“고작 저 줄에…….”
옥상부터 이어진 얇은 로프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보고 하라면?
…….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데 그 심정은 주민들만 느끼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구조대장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띠릭.
“화재팀, 옥상에 대체 누구야!”
-띠릭. 팀장님 수신이……. 조규찬입니다. 팀장님 아니면 막내인 거 같습니다.
“미친개나 꼴통이나. 미치고 환장하네, 제발 부탁이니까 말 좀 하고 지랄해라. 대비할 시간은 줘야 될 거 아니야!”
-띠릭. 수, 수신양호.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또 조규찬이 무전을 받았다.
툭.
구조대장은 허탈하게 무전기를 내렸다.
그가 화내는 이유는 가슴이 미어진 탓이었다.
왜 저래야 하는지 알지만 너무도 잘 알지만, 그게 안타까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쓰디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부탁이니까 잊지 좀 말자. 우리도 사람 새끼들이다.”
“…….”
“에이씨, 구조대 니들은 뭐하고 자빠졌어. 쳐들어가서 요구조자들 다 뺏어와. 저 미친놈들한테 언제까지 맡길 거야!”
“가, 가자!”
타다닥.
구조대원들은 움찔하며 빌라로 돌진했다.
그들이라고 넋 놓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들락거린 탓에 주황색 기동복이 꺼멓게 변해 있었다.
땀과 뒤섞여 땟국물처럼 흘러내린 흔적도 가득했다.
불과 직접 대면하지는 않지만 연기와 열기를 고스란히 얻어맞은 탓이다.
변변한 방화장비도 없이 현장에 뛰어드는 그들 또한 못지않게 노력 중이었다.
한편.
태건은 501호 베란다에 안착했다.
정확히는 베란다인 줄 알았는데 확장되어 있어 거실에 도착한 거였다.
말이 안착이지 거의 굴러 떨어지다시피 유리 파편과 나뒹굴었다.
터덩!
“크으으!”
산소통이 무사한지 걱정될 정도였다.
정말 그거부터 확인했다.
후아, 후아.
다행히 숨이 잘 쉬어졌다.
“끄응.”
호흡을 확인한 태건은 욱신거리는 몸부터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거실을 보자 불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화르르!
검은 연기와 빨간 화염이 태건을 집어삼킬 듯 거칠게 몸부림 쳤다.
“큭!”
이제야 느껴지는 열기에 숨이 턱 막혔다.
현관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와 연기로 인해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벽지부터 천장 마감재까지 모두 불타고 있었다.
TV, 장식장, 소파.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게 없었다.
오만 군데서 쏟아내는 열기에 머릿속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거 봐. 새 걸로 바꾸길 잘했지.’
구멍 난 방화복을 입고 왔다면?
벌써부터 뒷머리가 쭈뼛하고 올라섰다.
그때였다.
번뜩!
태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여기 요구조자가 있을까?
더 정확하게 말해 살아있을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만큼 절망적이었다.
태건은 얼른 정신을 다잡았다.
“짜샤,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무조건 있는 거야!”
턱.
주먹으로 방화헬멧을 때리기까지 했다.
자신은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행동하는 사람이다.
생존자가 있다면 갈 뿐이다.
삶, 그리고 죽음.
어떤 경우도 속단하지 않고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때 빨간 불길 속 어딘가에 태건의 시선이 확 빨려 들어갔다.
화장실?
지금까지 들은 집안 구조의 정보로 판단해보면 확실했다.
그쪽으로 시선이 향한 이유가 있었다.
콰르르.
물소리다.
화재 시 가스는 잠가도 수도는 절대 잠그지 않았다.
닫힌 문이 화염에 휩싸여 있지만 그 안에선 분명 물소리가 들려왔다.
대번에 두 눈이 가늘게 변했다.
‘진짜일까? 내 희망사항일까?“
착각일 수도 있다.
절실함에서 들려오는 환청일 수도 있다.
화장실까지 거리가 현관보다 더 먼 상황이다.
불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돌아다닐 여유가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냉정해야 할 순간이다.
당장 인기척이 없다면 수색을 후순위로 미루고 502호로 이동해야 했다.
태건은 지금 그 갈림길에 선 입장이다.
스윽.
재빨리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두툼한 방화장갑이 감각을 무디게 했지만 무언가 잡혔다.
그건 인명구조경보기였다.
엄청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기계로 소방대원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구조를 요청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반면 그걸 응용하면 누군가에게 자신을 알리고,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다.
태건은 화장실 문을 주시하며 안전클립을 살짝 뺐다.
툭.
“…….”
그 순간 인명구조경보기에서 귀를 때리는 소음이 울렸다.
빼애액, 빼애액!
“큭.”
인상을 팍 찌푸린 태건은 재빨리 다시 클립을 끼웠다.
역시 고막테러용으로 개발됐단 낭설이 과하지 않은 기계였다.
그보다 화장실에서 반응이 있을까?
…….
귀를 활짝 열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쿨럭……. 사람…….”
들었다.
분명히 들렸다.
태건의 두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당장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호흡기 커버 탓에 소리쳐봐야 화장실까지 닿지 않았다. 대신 한 번 더 인명구조경보기를 작동시켰다.
빼애액, 빼애액!
똑같이 두 번만 울렸다.
당신의 존재를 확인했단 의미다.
상대도 옳게 알아들었을까?
귀를 기울인 순간 좀 더 확실한 신호가 들려왔다.
깡, 깡.
화장실 타일 두드리는 소리였다.
통했다.
분명 상대도 알아들었다.
“됐어, 있어, 살아있어!”
찌르르!
희열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거 같았다.
그 기세를 몰아 그쪽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화장실 문부터 불타는 중이었다.
심지어 거실은 불덩어리다.
방화복을 입고도 버티기 어려울 지경인데 화장실 문을 개방한단 건 요구조자를 죽이는 행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 인이어에서 오광휘 팀장의 무전소리가 들려왔다.
-띠릭. 야, 막내. 치직……. 안에 무슨 일이야……. 치직. 인마!
누적된 열기에 인이어도 이상을 보였다.
태건은 개의치 않고 일단 무전기를 더듬었다.
진입하기 직전에 이미 방화복 안쪽으로 감춰둔 상태였다. 불룩 솟은 어깨를 강하게 쥐기만 하면 된다.
꾸욱.
“요구조자 확인, 바로 문 따겠습니다.”
-띠릭, 막내, 치직, 대답 치익…….
다른 무전소리가 이어서 들려왔지만 점점 흐려졌다.
이젠 무전기마저 말썽이다.
상관없었다.
“그럼 내가 열어야지.”
시선을 돌려 불과 연기에 가려진 현관문을 꿰뚫어봤다.
저 현관문 너머엔 오광휘 팀장과 소방호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 문만 열면 된다.
태건은 결심과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일단 출입구 확보부터!”
휙!
태건은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현관문 방향으로 움직였다.
눈앞에 불이 일렁인다.
자신은 소화기조차 없는 맨몸이었다.
무모하다.
알고 있다.
하지만 돌아갈 길은 없었다.
이대로 현관까지 강행돌파다!
태건은 요구조자만 머릿속에 가득 채웠다.
태건은 불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현관문으로 향했다.
곧 태건의 몸은 본격적으로 불길 속으로 진입했다.
넘실거리는 화염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자신이 점령한 공간에 날아든 침입자를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
치지직!
불이 훑고 지나가자 방화복에 그을음이 생겼다.
내부에 침습한 열기는 화끈함을 넘어 따가울 지경이었다.
“크으으으!”
신경질적인 탄성이 절로 쏟아졌다.
거실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스무 걸음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 짧은 거리가 1킬로미터처럼 느껴졌다.
뛰어가면 정말 금방이다.
하지만 급속도로 퍼지는 열기는 신체기능마저 제한했다.
터억, 터억.
한 걸음을 떼기도 사실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깨진 유리창으로 달려가 몸을 식히고 싶었다.
불을 뚫고 간다는 건 미련을 넘어 무모한 짓이었다.
그걸 태건이 모를 리가 없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방화복이 견디지 못해 빨간 불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태건도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지금 걸어가는 길은 불길의 흐름상 그나마 피해를 덜 입는 방향이었다.
이미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다.
화염의 티끌만한 변화도 주시하고 있었다.
방향도 모른 채 경험이 시키는 대로 일단 움직였다.
“으으으. 외, 왼쪽.”
터억.
옆으로 한 걸음을 내딛음과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