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건 아주 잠시였다.
태건은 빙글 미소 지으며 전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반가워. 요즘 학교생활은 어때?”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졸려서 자고 있었는데……. 네?”
“여자 친구는 있고?”
“아, 아니요. 그런데 지, 지금 밖에 불이…….”
유정현이 더듬거리며 심각성을 일깨우려 했다.
그럴수록 태건은 더욱 여유롭게 반응했다.
“별 거 아니라니까. 아차, 잠시만.”
양해부터 구했다.
이어서 태건은 방화복 속에 걸어둔 무전기 버튼을 누르며 보고했다.
띠릭.
“팀장님, 강태건입니다.”
-띠릭. 너 어디야. 지금 너 어디서 뭐하고 있어!
“또 빡빡하게 구신다. 소방관이 뭐하고 있겠습니까.”
-띠릭. 너 미쳤냐, 정신없어?“
오광휘 팀장의 질문에는 당혹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말은 인이어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즉, 태건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태건은 현재 상황과 심각성을 유정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엉뚱한 말로 돌려 무전했다.
띠릭.
“글쎄 말입니다. 302호에서 멋진 신사 분을 만났지 뭡니까.”
-띠릭. 요구조자? 같이 있다고, 애를 찾았다고?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띠릭. 말투가……. 너 진짜 머리에 열 먹었냐?
오광휘 팀장이 알아듣지 못하자 이젠 태건이 답답해졌다.
‘아, 눈치 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엉뚱한 말투를 밀어붙였다.
띠릭.
“알았어요. 알았어. 한숨만 돌리고 내려간다니까요. 여기 뜨끈하고 좋은데, 공기도 나쁘지 않고.”
-띠릭. 너, 너 혹시……. 반어법. 아! 애라고 했지. 오케이. 퇴로 막혔고, 불은 득세 중이고, 연기도 상당하다는 거지. 맞으면 당근.
“하하, 말밥입니다.”
이제야 알아듣자 태건의 억지 미소가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오광휘 팀장은 틈도 주지 않고 무전을 이어갔다.
-띠릭. 지금 재진입 직전이야. 금방 올라갈게 기다려.
“알아서 내려간다니까요. 빡빡하시기는, 그게 다 당 딸려서 그런 겁니다.”
-띠릭. 당은, 당분……. 에너지! 기력 딸려?
“네네. 그래요, 이따가 상황 끝나면 달달구리한 구름라떼 한 잔하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태건은 사담을 가장해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이젠 오광휘 팀장도 익숙해졌는지 눈치껏 때려 맞췄다.
함께 지낸 기간만큼 서로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있기에 가능했다.
오광휘 팀장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띠릭. 안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에어매트 깔아놨어. 그리고 그 아이가 마지막이야. 애 엄마가 무사하단 소식 듣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기도 해.
“또 보채신다. 알겠습니다. 슬슬 일어날게요.”
-띠릭. 그래, 서둘러. 지금 당장 거실로 물총……. 젠장. 안방 창문만 열려 있어. 지금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환장하겠네!
“갑니다. 가요. 무전 끝!”
태건은 뚱한 목소리로 무전을 끝냈다.
재진입을 막은 건 선배들 몸 상태가 좋지 않단 걸 알고 있어서였다.
‘부실한 방화복으로 어딜.’
지금 들어오면 통구이 되기 딱 좋았다.
무엇보다 지쳐있을 터였다.
출동 후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40킬로그램이 넘는 장비를 착용하고 소방호스의 압력을 버텨낸 시간이 상당했다.
지치지 않았다면 그게 거짓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한 재진입은 부상만 야기시킨다.
그건 아무도 바라지 않았다.
이내 태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유정현에게 말했다.
“우리 팀장님이 농땡이 그만 피우고 내려오래.”
“네? 풋. 아……. 죄송해요.”
“웃는 게 좋은 거지. 그럼 우리 이제 슬슬 내려갈까?”
“쿨럭, 쿨럭. 네.”
“여기 공기가 좀 탁하긴 탁하네. 그럼 이거 한 번 써볼까?”
스윽.
태건은 자연스럽게 보조호흡기 커버를 내밀었다.
열기를 심하게 두드려 맞아 호스가 약간 쭈글쭈글하게 변해 있었다. 기능에는 문제가 없단 걸 벌써 다 확인하고 건넨 거였다.
유정현은 어느새 경계심과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거리낌 없이 보조호흡기를 뒤집어썼다.
척.
“후우, 하후, 이거 좋아요. 목이 간질간질한 게 사라졌어요.”
“다행이다. 그럼 우리도 이제 슬슬 움직이자. 밑에 어머니가 기다리신대.”
“엄마요?”
찔끔.
유정현의 몸이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의아한 태건이 얼른 물었다.
“왜 그래? 엄마 만나기 싫어?”
“그게 아니라……. 사실 제가 여기 유리창을 깼거든요. 엄마가 나쁜 짓이라고 했는데요.”
“혼날까봐? 뭐, 할 수 없지.”
“…….”
유정현은 좀 더 의기소침해졌다.
그런데 태건은 한 술 더 떴다.
“기왕 혼날 거, 나쁜 짓 좀 더 해볼까?”
“네?”
“야단맞는 건 한순간이지만 즐거운 추억은 오래오래 기억되지 않겠어?”
“어, 어……. 그런가요?”
꼬드김에 살살 반응이 왔다.
놀람과 공포에 숨어 있던 개구쟁이 기질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거 같았다.
물론 태건은 단서를 달았다.
“대신 이번 한 번만 하는 거야. 나중에 혼자 몰래하면 디지게 맞을 수도 있어.”
“뭔데요?”
“그건……. 후후, 준비 좀 해볼까?”
태건은 눈썹을 들썩이며 개구진 미소를 그렸다.
잠시 후.
태건은 호흡기 커버와 방화헬멧을 다시 착용했다.
뚝뚝.
물이 흥건히 젖어 떨어질 정도로 물을 옴팡지게 뒤집어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유정현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얇은 이불에 온몸을 꽁꽁 둘러싸고 있고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태건이 한 번 더 체크해주며 만족해했다.
“어머니가 빨래를 아주 적시에 하셨네.”
“그런데 아저씨, 진짜 할 거예요?”
“이제 와서 물리기야?”
“재미는 있을 거 같은데……. 진짜 디지게 맞을 거 같아서요.”
아무래도 유정현은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나약해지는 유정현의 각오를 다시 곧추세웠다.
“정현아, 그냥 아쌀하게 즐기고 얻어터지자.”
“진짜 재밌긴 해요?”
“또 해달라고 해도 두 번은 없어.”
까딱.
방화장갑의 두 번째 손가락이 좌우로 희미하게 움직였다.
유정현은 이내 고민을 마치고 결정을 내렸다.
“……알았어요. 해요.”
“좋아, 그럼 앵겨.”
착!
태건이 두 팔을 활짝 벌리자 유정현은 거리낌 없이 몸을 의탁했다.
그대로 안아 든 태건은 뒤 베란다 문으로 향했다.
이내 거실이 보였다.
잠깐 지체한 사이 불이 번질 대로 번져 부엌까지 넘보고 있었다.
화륵, 화륵.
짧지만 강렬한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길 또 가로질러가야 할 판이다.
‘인생 뭐 같네.’
아무리 각오를 했다지만 푸념이 절로 곱씹어졌다.
그때 열기를 느꼈는지 힐끔 뒤를 돌아본 유정현이 경악했다.
“흐억.”
“별 거 아니야.”
“저, 저……. 저게요?”
“원래 모험이란 위기를 뛰어넘어야 제맛인 법. 바로 간다. 한 번에 훅 간다. 준비 됐지?”
꾸욱.
태건은 장난스런 목소리와 달리 유정현을 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목적지는 앞 베란다 창문이다.
이대로 쭉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기회는 딱 한 번이다.
넘어져서도, 지체해도 안 된다.
유정현이 화염에 노출되는 순간 끝이다.
솔직히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훨씬 더 무겁다.
‘내 목숨도 하나야.’
태건이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았다.
그때 유정현의 대답이 들려왔다.
“준비됐어요.”
“좋았어. 그럼……. 돌격!”
타다닥!
태건은 두 다리를 박차며 앞으로 내달렸다.
동시에 두 눈에 집중력도 끌어올렸다.
지잉, 틱.
커지던 동공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불길의 흐름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어디로 어떻게 피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건 계산에 없던 순간이다.
‘칫.’
쓴소리를 속으로 꾹 눌렀다.
어느새 부엌을 지나고 거실에 진입했다.
화륵, 화륵.
불길이 좌우에서 사정없이 덮쳐왔다.
태건은 주춤거리지도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어딜!’
하지만 불도 이들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불에 휩싸인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투두, 투두, 뚝!
결국 지탱하고 있던 얇은 쇠줄이 녹아 끊어졌다.
그 타이밍은 너무도 절묘하게 태건이 지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태건도 발견했다.
방향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었다.
자칫 안고 달리는 유정현이 다칠 수 있었다.
생각?
없었다.
소방관으로서 본능이 먼저였다.
태건은 달리면서 최대한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에잇!”
터엉!
불타는 샹들리에가 태건의 머리와 어깨에 떨어졌다. 그 충격에 녹은 유리들이 튀어 방화복에 들러붙어 불꽃을 피웠다.
화르륵.
태건의 방화복 어깨와 방화헬멧에 불이 생겨났다.
충격과 열기가 상당했다.
입에서 저절로 고통의 외마디가 튀어나왔다.
“크윽!”
비틀.
애써 이끌고 있는 균형이 무너지지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저씨!”
유정현이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제야 태건은 자신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단 걸 인지했다.
이러면 안 된다.
안 돼.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으허헙!”
태건의 찌푸린 두 눈에 거짓말처럼 힘이 팍 들어갔다.
그리고 무너지려는 균형도 간신히 유지했다.
터더덕.
그런 내색은 일절 없이 유정현에게는 여유만 보였다.
“어때, 흥미진진하지?”
“그런데 어깨에, 아아……. 아저씨. 아프죠. 미안해요.”
“눈물 뚝. 넌 그냥 즐기면 돼!”
파박!
다시 두 다리를 더 강하게 굴렸다.
아프죠. 미안해요.
그 걱정과 사과의 말에 태건은 없던 힘이 불끈 솟구쳤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가슴이 찡했다.
이어서 몇 걸음 더 뛰어 앞 베란다 근처까지 접근했다.
이제 다 왔다.
마지막 스퍼트를 할 순간이다.
태건이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이제 하이라이트야.”
“네, 다 왔어요. 진짜 다 왔어요!”
“그럼 우리……. 날아보자!”
촤악!
소리친 태건은 뛰어오름과 동시에 몸을 180도 돌렸다.
단단한 산소통이 넓은 거실 창을 직격했다.
와장창!
산산이 부서진 유리를 뚫고 나온 두 사람은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부웅 뜬 이 해방감.
뜨거움에서 벗어난 이 시원함.
최고다.
“이야호!”
“이야!”
태건과 유정현은 함께 호탕한 비명을 내질렀다.
한편.
지상에선 소방관들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 대기 중이었다.
2호 라인 밑엔 에어매트가 정말 산더미처럼 펼쳐져 있었다.
모든 소방관들이 모조리 끌어 모은 에어메트였다.
오광휘 팀장은 무전기를 으스러지게 쥐며 302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진짜 됐는데…….”
초조함을 중얼거림으로 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