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들의 대화가 들렸지만 우석진 정책과장은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추가 설명을 해줬다.
“그 스모크점퍼 중에서도 닉네임이 붙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방금 말씀하셨던, 에……. 더 라면?”
“THE LAST, 어떤 현장이든 마지막으로 탈출하는 어느 소방관에게 붙여진 별명이야.”
“마지막이요?”
“그가 나타나야 상황종료라고 하더군. 그만큼 스모크점퍼들에게선 절대적으로 신뢰받는 인물이네.”
우석진 정책실장은 말하는 내내 태건을 바라봤다.
“…….”
태건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오광휘 팀장은 머릿속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함께 출동한 걸 차례로 그려보다 이내 멈칫했다.
“그럼 앞뒤가 맞지. 그렇다면 이해가 돼.”
“불 끄고 사람 구하는 건 어디든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할 기회는 많았어.”
“안 물어보셨잖아요.”
태건이 넉살을 부리자 오광휘 팀장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때를 기다렸단 듯이 우석진 정책과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내 설명에 오류가 있나?”
“없습니다.”
“원래 수긍이 빠른 편인가?”
“와튼 국장을 만나셨다면 뭐. 참, 입이 가벼운 분이죠.”
태건의 담담한 대답에 우석진 정책과장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FLFD의 수뇌부를 수다쟁이라니.”
“아, 말실수를 했네요.”
“그만한 친분이 있다는 거겠지.”
“죄송합니다만 전 지금 대한민국 소방관입니다.”
태건은 이쪽에 관한 대화만 나누고 싶단 의중을 밝혔다.
하지만 우석진 정책과장은 아직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왜 이 얘기를 굳이 꺼내는지 감이 오지 않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명확히 묻지. 거기서 내려놓은 명예, 여기서 다시 이뤄볼 생각 없나?”
“그 말씀은 설마…….”
촉이 서자 태건의 미간이 단숨에 좁혀졌다.
그 촉이 옳은 모양이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새롭게 ‘특수소방단’을 기획 중이야.”
“특수소방단이라.”
“한국의 스모크점퍼. 모든 상황에 대응이 가능한 멀티소방관들. 어떤가. 구미가 당기지 않나?”
우석진 정책국장은 흥미를 유도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태건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자네가 밀어낼 줄은 몰랐네만.”
“다 떠나서 예산 감당 안 되실 겁니다.”
태건은 경험을 상기시키며 쓴 미소를 지었다.
방화복 하나도 구하기 힘든 대한민국의 현실.
솔직히 웃겼다.
그 순간 우석진 정책국장의 표정이 싹 변했다.
아픈 곳을 찌른 태건의 말 탓이다.
“그게 일개 소방사가 걱정할 성질의 문제인가?”
“…….”
“걱정을 해도 내가 걱정하고, 내가 풀어 갈 일이라고 보네만.”
대번에 말투부터 변했다.
안 그래도 민감한 예산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날카로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태건은 긴장하기는커녕 눈썹 한 번 꿈틀거리지 않았다.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입부터 축였다.
이어서 받침대로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달칵.
“와튼 국장이 저에 대해 불만 잘 끈다고 하던가요?”
“뭐라.”
“스모크점퍼 역사상 닉네임이 두 개였단 말은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두 개라니?”
“더 라스트, 그 전에는 이렇게 불렸습니다……. 크레이지 건.”
순간 우석진 정책과장의 두 번째 별칭을 곱씹었다.
“크레이지 건?”
“인명구조를 위해선 헬기도 추락시켰습니다.”
“…….”
태건의 한 마디에 우석진 정책과장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난 지금 전출명령서 한 장이면 될 일을 굉장히 번거롭게 여기까지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야. 그런 성의는 알아줬으면 싶네만.”
“그러게요. 왜 번거롭게 이러십니까.”
“아직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나. 스스로 대한민국 소방관이라 하지 않았나?”
우석진 정책과장이 현실을 말했다.
하지만 태건은 그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허리를 바짝 펴며 당당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특수소방대를 만드시려면 그에 맞는 예산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
“왜냐고 물으신다면, 한마디로 말씀드리죠. 그건 목숨 내놓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
“부디 기획하시는 일이 잘 진행되시길 집에서 마음 편하게 응원하겠습니다. 소방복 하나 제때 못 주는 곳이라면 전 사양합니다.”
태건이 아예 못을 박았다.
상당한 뒤끝이기도 했다.
박민석 서장과 오광휘 팀장은 너무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
뻐끔뻐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곧 몸을 돌려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문 앞에 다다른 그때였다.
예상외로 우석진 정책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훗.”
그륵.
태건은 코웃음 치며 그대로 문고리를 돌렸다.
정책과장의 부름에 무조건 응해야 한다?
그가 자신의 다른 이름을 들먹인 순간 그런 기대는 가당치도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부름에 태건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태건아. 얀마.”
오광휘 팀장의 목소리였다.
…….
태건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야 했다.
스윽.
“네. 팀장님. 부르셨습니까.”
“이리 빽. 일단 돌아와서 와서 앉아. 짜샤.”
오광휘 팀장은 눈짓콧짓까지 하며 난처함을 표현했다.
참 사람관계란 심오했다.
정책국장의 강력한 협박보다 일개 화재팀장의 질책이 더 무섭게 다가왔다.
아니, 그동안 들은 정이 무섭게 느껴지게 했다.
……저벅저벅.
태건은 내키지 않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내 태건은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
물론 시선을 멀리 두고 입을 꽉 다무는 걸로 심정을 대신했다.
우석진 정책과장의 고민은 더 짙어졌다.
태건의 요구?
솔직히 합당하긴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있다.
사실 소방청은 검찰이나 경찰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다.
당연히 태건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힘이 없었다.
하지만 태건이 필요한 건 자신과 소방청이었다.
한국 유일의 스모크점퍼로써 특수소방단 영입 0순위란 걸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한 우석진 정책과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뭘 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 나에게 먼저 제시하라는 건가.”
“과장님은 말씀으로 하시지만 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지원은 꼭 필요합니다.”
태건은 강경한 태도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우석진 정책과장은 준비한 게 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자신이 밀릴 거라고 예상조차 못한 게 틀림없었다.
“으음. 으으음.”
고민으로 앓는 소리가 틈틈이 들려왔다.
후릅.
태건은 다 식은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기다렸다.
결국 우석진 정책과장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났다.
“……선약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지.”
“국장님.”
“박 서장, 또 보세.”
그리고 그 길로 쌩하니 돌아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간부가 같이 나가며 태건을 매섭게 노려봤다.
턱.
문이 닫힘과 동시였다.
박민석 서장이 기운 빠진 얼굴로 주저앉았다.
“젠장. 힘드네.”
“에휴. 저는 이제 숨이 쉬어집니다……. 그나저나 태건아. 너 대체 뭐냐.”
오광휘 팀장이 두 눈을 댕그랗게 뜨며 물었다.
스윽.
박민석 서장이 손을 뻗어 막았다.
그리고 태건을 향해 사과의 말부터 건넸다.
“우선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미안해.”
“왜 사과를 하시는지……. 혹시 험담 많이 하셨습니까?”
“뭐? 하하.”
태건의 농담에 박민석 서장이 실소를 머금었다.
집무실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줄곧 듣고 있던 오광휘 팀장은 그제야 첫 마디를 꺼냈다.
“그러니까 강태건이 우리가 알고 있는 꼴통 막내가 아니란 거 아닙니까.”
“팀장님?”
태건은 너무 충격적인 별칭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광휘 팀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박민석 서장에게 사뭇 진지하게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그게 다 사실이면 이름 좀 날린 정도가 아니라 미국 소방계의 아이돌 아닙니까?”
“나도 그건 오늘 처음 들었어.”
“이거 일이 묘하게 흘러가네요.”
스윽.
오광휘 팀장이 턱을 쓸었다.
박민석 서장의 눈에는 그게 더 불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일단 함구해.”
“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를요?”
“알려서 뭐할 거야. 화젯거리를 얹어서 뭐하겠다고.”
박민석 서장은 단호하게 만류했다.
가만히 듣던 태건은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진급식은 끝난 거죠?”
“그래. 둘 다 일어나 봐. 나도 머리 좀 식혀야 할 거 같으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스윽.
태건과 오광휘 팀장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곧 두 사람이 소방서 옥상 난간 앞에 나란히 섰다.
오광휘 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구나.”
“뭐, 그냥 조금이요. 그런데 여긴 왜 오자고 하신 겁니까?”
태건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광휘 팀장은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말했다.
“너, 그거 해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언제까지 이 상태로 붙어 있을 거야. 너희들 지금 위태위태해.”
“…….”
옳은 지적이라 태건도 답할 말이 없었다.
오광휘 팀장은 저 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장에서도 슬슬 삐꺽거리는 게 보여.”
“흐음.”
그건 오광휘 팀장의 말이 옳았다.
불과 싸움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순간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때 등 뒤가 불안하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
태건이 침묵하자 오광휘 팀장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네가 그랬지. 소방관으로써 사람 구하고 살리는 거 말고 뭐가 필요하냐고 말이야.”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특수소방단은 여기보다 판이 클 테니까 너에겐 좋은 기회 아니야?”
“방금 그 사단을 냈는데요?”
“널 필요로 하는 이상, 이렇게 끝내진 않을 거야.”
오광휘 팀장의 판단력은 역시 꽤나 예리했다.
태건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반박했다.
“제가 수락한다면 조건 중에 하나는 꼭 팀장님을 데려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나?”
“더 라스트는 자신이 인정한 지휘관의 말만 따르거든요.”
“자식.”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 정도 끗발은 있습니다.”
태건은 당당히 어깨를 펴며 답했다.
오광휘 팀장은 이내 싱긋 미소 지어보였다.
“그건 미국에서 통하지, 여기선 막내인 주제에 말이야.”
“이제 막내도 졸업했습니다.”
“잘 났다……. 아무튼 돌아가는 상황 보면서 다시 얘기하자.”
“가시죠.”
태건과 오광휘 팀장은 나란히 옥상 난간과 거리를 벌였다.
지금 아무리 얘기해봐야 왈가왈부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