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태건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어떻게 될 진 정책과장님에게 물어보면 답을 주실 겁니다.”
“…….”
“마침 오신단 소식 듣고 그분에게 편지 한통 썼습니다. 전달 좀 부탁합시다.”
척.
태건은 여유롭게 봉투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겉면에 적인 글씨를 본 고희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사직서?”
“전해드리면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생사람들 그만 잡읍시다.”
“…….”
“그럼 더 궁금한 거 없으시죠. 고생하세요.”
그릉.
태건은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밖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미련 따윈 한 방울도 없었다.
쉽게 결정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고민하고 곱씹은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내가 없으면 트러블 날 게 없잖아.’
선배들도 이런 자신의 결정을 좋아할 거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시청각실을 나서는 태건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태건은 곧 복도로 나왔다.
걸어가는 사이 소회의실 문이 열리며 오광휘 팀장이 나타났다.
“너도 벌써 끝났어?”
“때려쳤습니다.”
“때리고 쳤단 말은 아니지?”
“제가 사람은 신중하게 팹니다. 그보다 팀장님은 왜 벌써 나오셨습니까?”
태건이 묻자 오광휘 팀장이 슬쩍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사실 나도 때려쳤어.”
“네?”
“내 목 줄 테니까 애들 건들지 말라고. 어째 너도 그럴 거 같더라니.”
“아, 그건. 팀장님이 제멋대로 하라고 하셔서요.”
태건이 어색한 표정으로 궁색한 핑계를 말했다..
반면 오광휘 팀장은 뚱한 얼굴로 변했다.
“넌 꼭 그런 말만 잘 듣더라. 평소에 현장에서 그렇게 말 좀 듣지 그랬냐.”
“그 시간이 후회는 되는데,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거 같습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섭하게……. 크흠. 나 데려 갈 거지?”
오광휘 팀장이 넌지시 떠봤다.
태건은 바로 무슨 소린지 알아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사직서 던지신 겁니까?”
“니가 그랬잖아. 추천장 써주는 건 일도 아니라고 말이야.”
“그건 그렇기는 한데요.”
“내지르니까 시원하긴 하더라. 이래서 사람이 뒤에 뭐가 있어야 한다니까. 뭐하냐, 가서 커피나 한 잔 때리자.”
처억.
오광휘 팀장은 어깨를 걸치며 찡긋거렸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네. 가시죠.”
저벅저벅.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10여 분이 후다닥 지나갔다.
태건과 오광휘 팀장은 소방서 외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중얼중얼.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자 오광휘 팀장이 전화를 받았다.
“네, 오광휘……. 으윽. 네. 맞습니다만……. 네? 아, 네.”
다채로운 표정을 보이다 휴대폰을 내렸다.
의아한 태건이 물었다.
“누구 전환데 그러십니까?”
“서장님. 우리 사표 소식 듣고 극대노 중이셔.”
“크흠.”
“그리고 특별감사 일시정지 됐다더라. 갑자기 오늘은 일단 철수한다는데.”
“그래요?”
그건 의외의 소식이었다.
태건도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그때 소방서에서 특별감사팀이 줄줄이 걸어 나왔다.
태건과 오광휘 팀장을 봤는지 멈칫했다.
“…….”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차를 타고 떠나갔다.
부웅.
그 차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오광휘 팀장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턱.
“어휴. 와서 지랄하는 줄 알았네.”
“저렇게 감사를 하다말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까?”
“그럴만한 누군가가 콜 했겠지.”
오광휘 팀장의 추측이 가장 확실해 보였다.
* * *
곧 두 사람 사이에 박민석 서장이 자리했다.
찌릿!
좌우를 둘러보며 스산한 눈빛을 뿌렸다.
“사직서를 냈다고 바로 처리되는 건 아니야. 우선 내가 처리할 마음이 없어.”
박민석 서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태건이 차분하게 권했다.
“그냥 수리해 주십시오.”
“지금은 머리 복잡한 얘기 그만하자.”
“……알겠습니다.”
“애들은 일이 있어서 돌아간 걸로 알아. 사표 소식은 아예 모르고. 그러니까 뭔가 확실히 결론이 날 때까진 입조심들 해라.”
박민석 서장이 단단히 일렀다.
끄덕.
태건과 오광휘 팀장은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날 저녁.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근길에 올랐다.
오광휘 팀장과 소방서 주차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스윽.
누군가 옆에서 나타나서 보니 장비팀장이었다.
“엇, 선배님.”
“팀장님.”
태건은 좀 껄끄러운 사이였다.
지금도 미국에서 방화복을 직구한 걸 후회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 괜한 스트레스를 준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의외로 장비팀장이 수더분하게 입을 열었다.
“퇴근들 하냐?”
“네.”
“급한 일 없으면 밥이나 먹자.”
“그러시죠.”
얼떨결에 식사 자리가 결정 나버렸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경기도 부천의 번화가 야외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장비팀장이 쭉 둘러보며 말했다.
“어때? 여기가 저녁때만 한시적으로 야외테이블을 펼칠 수 있게 되어 있어.”
“분위기가 친근하네요.”
“그 맛에 오는 사람들이 많지. 여기 족발도 꽤 잘 해.”
소개를 하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음식이 도착했다.
“들지.”
장비팀장의 권유로 일단 식사를 시작했다.
말이 식사였지 반주를 곁들여 술자리가 되어 있었다.
태건이 먼저 팀장들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오광휘 팀장에게 건네려는데 장비팀장 손이 불쑥 다가왔다.
“이리 줘. 내가 따라줄게.”
“감사합니다.”
“그날 깽판치고 간 후로 처음 보는 거니까 한 보름 됐지?”
“네? 어, 하하.”
태건은 멋쩍게 웃었다.
이렇게 시작부터 훅훅 찌르고 들어올 줄 몰랐던 탓이다.
장비팀장은 50대 초반으로 알고 있다.
그런 어른이 먼저 마련한 자리인데 태건도 마냥 뻣뻣하게 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 좀 과하긴 했어.’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팀장님, 그날 제 행동에 사무실 분위기가 안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
“손수 방화복까지 구해 주셨는데 제가 밀어내기도 했고요. 그 모든 부분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말을 마친 태건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때 장비팀장의 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들어. 솔직히 네가 뭘 잘못 했냐.”
“오버한 건 사실이죠.”
“광휘도 그날 나한테 그랬어. 다 태건이 잘못이라고 쳐도 가장 뿌리 깊은, 근본적인 문제는 잘못 없다고 말이야.”
스윽.
장비팀장이 잔을 들어올렸다.
태건과 오광휘 팀장도 같이 들어 부딪쳤다.
챙.
동시에 태건은 오광휘 팀장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가 뚱하니 말했다.
“뭘 쳐다봐.”
“처음 듣는 얘기라서요.”
“넌 나한테 비밀 없냐?”
“……변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건이 인사했지만 오광휘 팀장은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과한 게 맞다니까. 내가 선배님께 말씀드린 건 근본적인 제도 문제였어.”
“제가 따진 게 그겁니다.”
“그래, 너 잘났다. 선배님, 이번엔 제 술 받으세요.”
쪼르륵.
오광휘 팀장은 얼른 그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렸다.
그런데 장비팀장이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광휘가 뒤에서 태건이를 좀 챙기긴 하지.”
“네? 어? 아, 선배님. 그거…….”
그때 태건이 얼른 옆으로 밀어내며 끼어들었다.
“장비팀장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듣고 싶습니다.”
“야, 너 날 이렇게 밀쳐……. 이 자식.”
이익.
오광휘 팀장이 힘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태건이 훨씬 젋고 근육이 많았다.
그런 투덕거림에 장비팀장이 귀엽단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그날 이후에 소방서에 안 좋은 소문 돌기 시작한 거 말이야.”
“네. 많은 오해와 편견들의 집합소 같은 소문이었습니다.”
“그거 행정실 애들 소행이야.”
“으음.”
“그게 절정일 때가 미국에서 직구했을 때였을 거고, 그때 광휘가 팀장들 집합시켰지.”
그 소리에 오광휘 팀장이 펄쩍 뛰었다.
“팀장 집합이라니요. 실무회의라고 하는 겁니다.”
“서장님 빼고 다 불렀잖아. 그게 집합이지.”
“제가 선배님들한테……. 아, 뭐 그렇다고 쳐요. 에잇!”
쭉.
오광휘 팀장은 바로 술잔을 들이켜며 외면했다.
장비팀장은 그래도 꿋꿋하게 이어서 말했다.
“그때 그러더라, 태건이랑 현장 나가봤냐. 아니면 같이 살아봤냐. 아닌데 어떻게 말이 만들어지냐.”
“그리고요?”
“1년 만에 돌아온 애, 이젠 죽으라고 떠미는 거냐. 최소한 같은 서에서 이런 건 하면 안되지 않냐. 뭐 그런 말이었어.”
“그래서 조금씩 조용해졌던 거군요.”
스윽.
태건이 바라봤지만 오광휘 팀장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기도 카페, 저기 또 있네, 여기 코인노래방도 있고, 괜찮네.”
아예 딴소리로 무마하려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곧 장비팀장에게 말했다.
“같이 지내보니까 좋은 점이 더 많이 보이는 거 같긴 합니다.”
“괜찮은 녀석이지. 그 일만 아니었음…….”
장비팀장이 뭔가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오광휘 팀장이 처음으로 정색했다.
“선배, 나 꼭지 돌아요?”
“크흠. 말실수야. 그리고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우리 어제 얘기는 그만하고, 지금 얘기합시다.”
오광휘 팀장이 못내 웃어넘겼다.
장비팀장도 수긍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이 감사 받은 내용 대충 전해 들었어.”
“참 세상에 비밀 없네요.”
“특히 태건이, 행정실 입장도 일부 대변해줬더라. 사실 나도 그 얘기 듣고 이렇게 자리 마련 한 거야.”
“특별감사팀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태건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장비팀장도 수더분하게 받아쳤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아. 자, 한잔 하자. 남은 앙금도 다 술잔에 담아 털어 넘기는 거야. 알았지.”
“알겠습니다. 다 털어버립시다!”
쨍.
힘차게 부딪치고 입으로 확 털어 넣었다.
화끈한 소주의 맛에 쓸려가듯 케케묵은 감정도 씻겨 내려갔다.
* * *
다음날 태건은 신입소방관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음료수를 앞에 둔 네 사람 중 태건이 말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뭐 실수한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좀 차갑네요.”
태건은 늘 똑같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신입소방관들도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슬슬 한마디씩 꺼냈다.
“선배님들께 하나씩 배우다가 이런저런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작년에 큰일이 있었고, 그래서 1년 쉬셨다고요.”
“복귀하신 후로 더 과격해지셨단 소문도 있고 해서…….”
한 문장씩 번갈아가며 말했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같은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