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가만히 들어본 태건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부터 말 좀 편하게 해도 되겠지?”
“네, 그건 뭐…….”
“그럼 하나 묻자. 아무것도 모르는 첫날은 내가 좋은 선배였고, 이런저런 소문을 들은 후에 나는 나쁜 선배가 되는 건가?”
“아니요. 선배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대답 소리가 재깍 들려왔다.
그런데 태건의 레이더망은 생각보다 촘촘했다.
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현장에선 믿지 못할 선배가 된 건가?”
“네? 아, 어…….”
“어떻게 생각해도 크게 신경 쓰진 않아.”
“아, 네.”
더듬더듬 답했다.
태건은 정말 개의치 않고 하고픈 말을 이어갔다.
“그냥 이렇게 말할게. 스스로한테 물어봐. 날 믿어도 좋은 선배인지에 대해서 말이야.”
“…….”
“그럼 여기까지, 이후로 내가 먼저 찾진 않을 거야. 대신 필요해서 찾아오면 내치진 않아. 알아서 결정해.”
스윽.
태건은 그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날 오후.
신입소방관들이 태건을 찾아왔다.
“저…….”
“됐어. 여러 말 해봐야 사족이야. 뭐해, 놀러 가자.”
“네!”
착착.
씩씩하게 그들은 일제히 태건의 뒤를 따랐다.
태건이 도착한 장소는 장비보관함 앞이었다.
휴대폰으로 초시계를 켜며 말했다.
“장비착용, 1분 20초 컷. 시작!”
“노, 놀러 가자고.”
“놀잖아. 이거 이상 재밌는 놀이가 어딨어……. 한가하냐?”
“아닙니다!”
후다닥.
화들짝 놀란 신입소방관들은 다급히 출동장비를 착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태건을 인상 찌푸리게 했다.
“1분 40초가 넘어? 장난해!”
“죄송합니다!”
“장비착용 1초 당기면 현장에 1분 먼저 도착한다. 그 1분은 요구조자의 생명이 오가는 시간이다. 알겠나!”
“네에!”
신입소방관들이 잔뜩 얼어 대답했다.
태건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을 놀렸다.
띡.
“시작.”
“에에? 어츠츠츠!”
우당탕!
예측불허의 시작 신호에 신입소방관들이 뒤엉켜 넘어졌다.
태건은 차갑게 내려다보며 다그쳤다.
“누가 손 내밀어 줄 거 같아. 빨리 털고 일어나!”
“네!”
“움직여. 쉬지 마. 더 빨리!”
“알겠습니다, 끄응. 으윽!”
신입소방관들은 이리저리 몸을 구기며 장비를 억지로 착용했다.
10번, 20번…….
반복되고 또 반복됐다.
신입소방관들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헉헉헉.”
“시작.”
“또오. 허으으.”
주섬주섬.
신입소방관들은 지칠대로 지쳐 현저히 느려진 손길을 간신히 움직였다.
결국 신입소방관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부들부들.
온몸이 근육통에 아우성쳤다.
“으으으.”
일어설 힘도 없었다.
하지만 태건은 인정사정없이 재촉했다.
“시작.”
“…….”
“어쭈, 반항이냐?”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막말로 선배는 1분 20초 끊을 수 있으세요?”
끝내 한 명이 반발했다.
태건은 두 말 없이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언제든 니가 하고 싶을 때 시작해.”
“……시작!”
뜸을 들인 그가 대뜸 소리쳤다.
절대 성공하지 못하게 나름 트릭을 쓴 거였다.
태건은 그 소리를 듣고도 그 자리에 서서 귀를 후볐다.
“룰루루.”
콧노래까지 부르는 게 심상치 않았다.
신입소방관들은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시작도 안 하잖아.”
“지도 못하면서 선배라고 폼만 잡기는.”
“내가 저럴 줄 알았어.”
투덜투덜.
속삭이는 목소리로 힐난했다.
그렇게 시작한지 10초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두둑.
태건이 가볍게 목을 풀었다.
그리고 눈빛이 돌변하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저적!
그 모습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기지 않는 속도에 신입소방관들은 입을 벌렸다.
“우, 우와.”
“허얼.”
“저 속도 뭐야.”
분명 보고 있는데도 두 눈을 의심했다.
이내 장비 착용을 마친 태건이 휴대폰을 턱짓했다.
“눌러야지.”
“네? 아, 네.”
꾹!
화들짝 놀라 얼른 눌렀다.
좌우의 동기들이 시간을 확인하고 또 한 번 입을 떡 벌렸다.
“1……. 1분 19초. 그렇게 늦게 시작했는데.”
“이거 실화냐.”
얼마나 놀랐는지 눈동자들이 허공을 배회했다.
그때 태건이 방화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힘들고, 짜증나고, 내가 이러려고 소방관 됐나 싶지. 그런데 이거 하려고 소방관 된 거 맞아.”
“…….”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소방관들은 불 앞에 설 자격이 없어……. 라고 내 영웅이 말씀하셨다.”
태건이 반전을 걸자 신입소방관들이 궁금해했다.
“그 영웅이 누구 십니까?”
“이채용 팀장님. 그리고 박성규 선배도 계셨다.”
“그분들이 누구신지…….”
“궁금하면 찾아봐. 그럼 이젠 니들끼리 놀아라. 휴대폰은 주고.”
척.
태건은 휴대폰을 회수하고는 소방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태건을 본 신입소방관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언제 장비를 다 벗으신 거야.”
“뭐야. 저 선배 무서워.”
“도대체 이채용 팀장님하고 박성규 선배가 누군데?”
“찾아보자.”
토도독.
신입소방관들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검색했다.
셋이 쪼르륵 기사들을 둘러본 후였다.
스윽.
“끄으응.”
아우성치는 몸을 억지로 잡아끌어 일어났다.
그리고 가운데 신입소방관이 초시계를 켜며 말했다.
“시작.”
“흐읍. 흐흐흡!”
척. 척.
셋은 이를 악물고 자진해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명을 보호하고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기사에 느낀 게 많은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지켜보던 태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맛은 있어야지.”
신입소방관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태건에게도 영향을 줬다.
신입소방관들의 노력이 어쩐지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거 같았다.
그렇게 태건은 저들을 보며 소방관들의 미래가 어둡지 않단 걸 느꼈다.
‘이어질 겁니다. 앞으로도 영원히요.’
앞서 이채용과 박성규가 밟은 길.
지금 태건이 걷고 있는 길.
그리고 후배들이 걸어갈 길.
그건 재난과 맞서 싸우러 달려가는 소방관들의 길이었다.
* * *
다음날 오후.
태건과 오광휘 팀장이 서장실 앞에 서 있었다.
오광휘 팀장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또 우리 둘만 호출인 거냐?”
“사표 수리된 거 아닐까요?”
“그래. 들어가면 알겠지.”
똑똑.
오광휘 팀장은 노크부터 했다.
곧 문을 열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응접소파 상석에 우석진 정책과장이 앉아 있었다.
“…….”
“…….”
태건과 오광휘 팀장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때 박민석 서장이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와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눈빛을 차갑게 식히며 응접소파로 향했다.
이내 태건과 오광휘 팀장이 소파에 앉았다.
휘이잉.
냉랭한 바람이 몰아치는 거 같았다.
그런데 이쪽에서만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그때 그 사람이 맞는지 너무도 태연하게 첫마디를 꺼냈다.
“잘들 지냈나?”
“…….”
“특별감사팀 이야기 들었어.”
그 한마디에 태건과 오광휘 팀장 이마가 구겨졌다.
그런데.
우석진 정책과장의 입에서 예상 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오해는 하지 말게. 내 지시가 아니라 밑에서 움직였어.”
“…….”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개의치 않는지 가볍게 둘러보는 척하며 말했다.
“보고받자마자 특별감사 중지시켰네. 본의 아니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네.”
“.......”
여전히 두 사람 입은 굳게 닫힌 채였다.
그때 우석진 정책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원이 그때 그랬지. 뭘 줄 수 있냐고 말이야.”
“…….”
태건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이번에도 예민하게 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소방청이 별 거 있나. 불 끄고 사람 구하는데 필요한 모든 걸 전력으로 서포트하지.”
“…….”
“그리고 소방관의 위상을 본인 손으로 끌어올리는 게 좋지 않겠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 같습니다만.”
태건이 콕 짚어서 말했다.
오히려 우석진 정책과장이 가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들으라고 한 말 아니었나?”
“흐음.”
“그걸 수용해 줄 수 있다면 찾아오고, 수용하지 못할 거면 사직서 받으란 의미라고 해석했는데, 틀렸나?”
“비슷한데 이렇게 빨리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태건은 씁쓸하게 인정했다.
한편 방금 오간 대화에 박민석 서장과 오광휘 팀장이 더 놀라고 있었다.
‘이거 무슨 소리들이야.’
‘그냥 때려치운다는 거 아니었어?’
그들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면 태건과 우석진 정책과장은 어느새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살벌한 한풍이 약간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이내 우석진 정책과장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녹음 내용조차 불쾌하더군. 하지만 뇌리에 계속 남아 있었어.”
“…….”
“몇 번 들어보고야 강 대원의 아우성을 느낄 수 있었어. 정확히 현장에서 근무하는 대원들의 아우성이라고 해야겠지.”
“그래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태건이 묻자 우석진 정책과장이 쓰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난 강 대원이 필요한 입장이니까.”
“목적지가 꽤 높은가 봅니다.”
“높고 멀지. 그래서 길동무가 필요한 거 아니겠나.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야.”
우석진 정책과장은 결정권을 태건에게 떠밀었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러닝메이트를 바란단 의미일 터였다.
달리 해석하면 특수소방단을 수락한다면 진지하게 임해야 한단 뜻도 담겨 있었다.
그 역시 보통 각오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태건은 섣부르게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 달라질 일이라 깊이 파고들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할 시간은 주십니까?”
“여기 내 명함이야. 언제든 결정 나면 연락 해. 아참, 특수소방단원에겐 상당한 액수의 수당도 지급될걸세.”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보고 단장을 하란 건 아니시겠죠.”
“물론. 후보자는 여기 있잖아.”
스윽.
우석진 정책과장의 말에 태건이 옆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