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거기엔 오광휘 팀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음. 왜, 설마 저요?”
슥.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 태건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단장님 후보자만큼은 인정입니다.”
“더 라스트는 본인이 인정한 지휘자의 말만 듣는다고 해서 말이야.”
“정확하네요.”
“그럼 이제 차 좀 들지.”
달칵.
우석진 정책과장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만큼 우석진 정책과장도 특수소방단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고 볼 수 있었다.
‘흐음.’
후릅.
머릿속 가득 찬 생각에 차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우석진 정책과장과는 별다른 대화 없이 자리를 마무리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태건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만두게 될 줄 알았는데.’
사직서를 내민 건 사실 그 의미가 더 컸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그걸 보기 좋게 뒤집기 한판으로 엎어 보였다.
이후 태건은 결정을 위한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
퇴근한 모두가 치킨 집에 둘러앉았다.
바로 회식 날이었다.
예약을 한 덕분인지 테이블 위에 치킨과 맥주가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다들 잔에 맥주를 채우자 오광휘 팀장이 입을 열었다.
“요즘 다들 답답한 거 알아. 그래서 이렇게 치맥 때리러 온 심정도 이해하고.”
“…….”
“에이, 뭘 더 말하냐. 마시자!”
“위하여!”
쨍.
힘껏 부딪친 모두가 동시에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 *
며칠후.
태건이 오광휘 팀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팀장님, 저 반차 좀 써도 됩니까?”
“너 내일 오프 아냐?”
“집에 좀 다녀오려고요.”
태건이 미소를 보였지만 눈매는 굳어 있었다.
무슨 고민인지 알고 있던 오광휘 팀장이 주변부터 둘러봤다.
슥슥.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야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릿속 정리하러 가냐?”
“네. 여기선 어렵네요.”
“거리를 둬야 넓게 보일 때가 있긴 하지……. 자, 여기.”
짤랑.
오광휘 팀장은 허락과 더불어 차 키까지 내밀었다.
그걸 본 태건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엇, 그래도 이건 좀…….”
“오랜만에 집에 가는데 뭐라도 사들고 갈 거 아니야.”
“그건 그렇죠.”
“그거 다 이고 안고 어떻게 가냐. 잔말 말고 받아.”
턱.
말이 권유였지 오광휘 팀장은 아예 차 키를 손에 쥐여 줬다.
태건은 그의 배려에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고, 생각 잘 마무리 져라. 어쨌든 지금 네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니까.”
“여기 있거나, 거기 가거나 아닙니까?”
“틀렸어. 거기 가거나, 미국 가거나야.”
오광휘 팀장이 정정해 말하자 태건이 의문을 보였다.
“왜 그렇게 됩니까?”
“정책과장이 그렇게까지 말했어. 그런데도 밀어낸다는 건 그만두겠단 의미 밖에 더 되겠냐?”
“……그럼 팀장님은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길 바라십니까?”
“상관없어. 특수소방단을 택하면 거기서 짱 먹으면 되고, 미국가면 ‘더 라면’ 후광빨 받으면 되잖아.”
오광휘 팀장은 오늘도 별칭을 멋대로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기에 태건은 다른 궁금한 점을 물었다.
“팀장님은 여기 계속 계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기왕이면 나도 큰물 맛 좀 보자.”
“제 결정에 좌지우지 될 텐데 괜찮으십니까?”
“출셋길이 열렸으면 쫓아가야지……. 이제 그만 떠들고 집에 갈 준비나 해.”
툭툭.
오광휘 팀장은 사람 좋은 손길로 밀어냈다.
태건은 떠밀리면서도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참 솔직한 분이야.’
스스로의 욕심까지 내보이는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무한한 믿음을 보였다면 거부감이 들었을 터였다.
잠시 후.
반차를 낸 태건은 오광휘 팀장의 차에 올랐다.
터덕.
“간만에 잡네.”
가볍게 운전대를 양손으로 붙든 태건은 곧 페달을 밟았다.
부웅.
출발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시내운전까지였다.
서울을 벗어난 태건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렸다.
봐아앙!
“이야호!”
오랜만의 드라이브에 속이 뚫리는지 힘찬 환호까지 터트렸다.
답답한 서울시내만 달리던 승용차도 오랜만에 엔진에 열을 내며 묵은 찌꺼기를 던져버렸다.
달리고 달린 목적지는 강원도 횡성군의 어느 산골 마을이었다.
듬성듬성 가옥이 존재했지만 길가엔 수풀밖에 없었다.
지잉.
차창을 내리자 공기의 맛부터 달랐다.
태건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진하게 감탄했다.
“하, 공기 좋다!”
서울과 비교 불가한 청정공기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즐거운 드라이브의 종착지는 산 중턱에 위치한 목조주택 앞이었다.
끼익.
차를 멈추고 내려선 태건이 넓게 둘러봤다.
본채과 별채, 이렇게 두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고 마당도 꽤 널찍했다.
여기가 삼남매가 어렸을 때부터 자란 본가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거였다.
눈이 닿는 곳곳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마당부터 뒷산까지 매일 뛰어다녔던 어린 삼남매가 희미하게 그려지는 거 같았다.
“그때가 진짜 봄날이었네.”
이제와 돌아보니 때 묻지 않았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그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른이 돼보니, 그 시절이 그리웠다.
참 아이러니했다.
그렇게 잠시 감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본채 뒤쪽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른 중년 여인이 바구니를 옆에 끼고 걸어왔다.
곱상하고 단아한 이목구비가 남루한 옷차림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태건은 더욱 환한 얼굴로 얼른 외쳤다.
“어머니!”
“둘째야. 너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
“집에 오는데 일일이 전화하고 오나요.”
“그래도 전화는 한 통해야지……. 어휴, 놀래라. 그런데 차 샀니?”
어머니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태건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선배 찬데 잠깐 빌렸어요.”
“차도 빌려주고 좋은 선배네.”
“뭐, 하하.”
태건은 오광휘 팀장의 엉뚱함이 오버랩되자 애써 웃음을 짜냈다.
태건은 곧 어머니와 본채 안으로 들어섰다.
도시가스도 없는 시골이지만 살림살이는 현대식이었다.
부엌까지 직행한 태건은 식탁에 준비해온 선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기하고 화과자 좀 사왔어요. 어머니 좋아하시잖아요.”
“어머나, 예쁘네.”
슥슥.
어머니는 포장을 쓸며 안에 보이는 화사한 화과자에 극히 만족했다.
태건은 자연스레 물 한 잔을 따르며 물었다.
“하와이 여행은 어떠셨어요?”
“아주 예쁘고 좋더라, 내 평생 그런 호강은 처음이었어. 에구, 예쁜 내 새끼.”
툭툭.
어머니는 어렸을 때 칭찬하던 습관대로 엉덩이를 다독여줬다.
태건은 오랜만에 느끼는 손길이라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덧붙여 물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겠네요.”
“그 양반은……. 얘 좀 앉아봐. 내가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그 훌륭한 호텔요리를 놔두고 설렁탕 먹으러 나가자는 게 말이 되니?”
먼저 식탁에 자리한 어머니가 대뜸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 기세에 태건은 아차 싶었다.
괜히 얌전한 벌집을 건드렸단 걸 직감했다.
혹시나 싶은 태건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산에 가셨죠?”
“이 엄마 말부터 좀 들어 보라니까. 글쎄 네 아버지 하는 말이 김치가 이 김치가 아니라는 둥…….”
어머니의 하소연은 꽤 길게 이어졌다.
쌓인 게 확실히 많은 모양이다.
태건은 꼼짝도 못한 채 듣고 있어야 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한결 스트레스가 풀린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랬단 거 아니니.”
“하하. 그건 아버지가 잘못하셨네요.”
대답하는 태건의 얼굴엔 자그마한 피로감이 걸려 있었다.
그런 쳐짐도 잠깐이었다.
어머니의 하소연이 추가로 이어질 폼을 잡았다.
“그리고 또…….”
눈치를 보던 태건은 서둘러 일어나며 말했다.
“산에 가서 아버지 모시고 내려올게요.”
“뭐가 예쁘다고 모시러까지 간다니.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왔는데 둘러도 좀 보려고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타다닥.
태건은 어머니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집 밖으로 나갔다.
‘살았다.’
하소연 지옥에서 간신히 탈출했다.
좀 더 들어드리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태건으로선 당장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에.
자신의 속이 좀 정리되면 그때 맞장구치며 오래 들어드리겠다고 홀로 다짐했다.
태건은 그길로 뒷산에 올랐다.
경치가 좋긴 개뿔이다.
“헉헉.”
경사진 30여 분의 거친 산길을 오르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주변은 둘러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쯤 되니 평평하게 다진 땅이 나타났고, 벌통이 수십 개 펼쳐져 있었다.
그렇듯 아버지는 양봉업 종사자였다.
고정양봉을 하며 꿀철이 아닐 때는 심마니로 산을 타기도 했다.
태건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평지에 발을 딛자 거친 숨부터 툭 털어놓았다.
“푸하아.”
그 소리에 저쪽에서 양봉을 하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윙윙.
수백 마리 벌이 주변 가득 날아다니는데도 그물 모자 하나 없이 일하는 프로의 면모를 보였다.
삼남매 중 유독 태건의 다부진 인상과 흡사했다.
그런 아버지는 태건을 보고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대신 숨을 들썩이는 태건을 향해 디스부터 날렸다.
“불 끄러 다닌단 놈 체력이 원.”
“아버지가 특별하신 겁니다. 푸우우.”
대꾸한 태건은 얼른 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칠어진 호흡은 금세 가라앉았다.
확실히 태건의 체력도 보통을 훌쩍 상회하고 있었다.
아직도 벌과 썩 친하지 않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의향을 건네 봤다.
“도울까요?”
“아서라. 또 여기저기 쏘여서 울지 말고.”
“그건 어렸을 때입니다.”
“내 눈엔 지금도 어려 보여.”
아버지의 대답이 참 할 말 없게 했다.
태건도 양봉하러 올라온 건 아니기에 슬쩍 수긍했다.
“그럼 저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저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시끄러. 괜히 벌들 자극하지 말고 조용히나 해라.”
“크흠. 그럼.”
본전도 못 찾은 태건은 바위로 향했다.
산기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였다.
처억.
“후웁, 흐으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숨을 들이쉬니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슴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애써 본가까지 찾아온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후우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폐 속부터 차근차근 정화해갔다.
동시에 복잡한 마음도 꺼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태건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