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산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툭툭.
먼지를 털며 다가온 아버지가 태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물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청승이야?”
“여행 잘 다녀오셨는지 문안인사 겸 찾아온 겁니다.”
“귀신을 속여라.”
“…….”
태건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버지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머리 복잡할 걸 기어코 서울로 꾸역꾸역 갔는지.”
“아버지도 이름만 대면 아는 중견기업 다니셨잖아요.”
“진작 때려치우고 여기 들어와 살잖아.”
아버지는 뚱하니 반박했다.
태건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다 머릿속이 번뜩거림을 느꼈다.
띵!
부모님은 원래 도시인들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나름 고위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사회경험은 자신보다 훨씬 높을 터였다.
그런 아버지의 경험에 슬쩍 기대어 볼까 작정했다.
그래서 물었다.
“아버지,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뭘 뜬금없이 어떻게 하면 좋아?”
“그러니까…….”
태건은 천천히 자신의 속사정을 꺼냈다.
한 번 열린 입은 5분 가까이 줄줄 이어졌다.
그나마도 지금 처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추린 거였다.
이윽고 살짝 목이 마르는 걸 느끼며 태건의 말이 끝났다.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회사로 치면 임원이 프로젝트를 따로 하자는 거고, 넌 그거랑 외국계 기업이랑 양손에 놓고 저울질 중이라 이거냐?”
“뭐, 기업적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네요.”
신선한 시선에 태건이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금세 답을 내려버렸다.
“곧 또 미국 간다고 하겠네.”
“그걸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지으시는 겁니까?”
“네가 고민하고 있으니까.”
“네?”
태건은 대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재차 입을 열어 질문했다.
“넌 그 과장에 대한 신뢰가 있니?”
“그건……. 글쎄요.”
“그럼 그 프로젝트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니?”
“흐음.”
“그래서 고민하는 거 아니냐. 뭐 어렵게 생각해.”
아버지는 툭툭 한 마디씩 던졌다.
그 말이 태건의 마음속 가득한 짙은 안개를 휘휘 저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혼란을 거두진 못했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얽혀있는 관계들이…….”
“그것도 같은 맥락이야.”
“어떻게요?”
“프로젝트에 성공할 확신이 있다면 선배들에게 네가 유능한 인재란 걸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겠어?”
“아아…….”
뭔가 알 듯 말 듯 한 느낌에 태건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아버지는 답답하단 시선으로 바라보며 퉁명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넌 그 프로젝트를 통해 뭘 하고 싶은 건데?”
“…….”
“쯧쯧. 목표도 목적도 없다? 내가 보기엔 너보다 차라리 그 과장이 낫다.”
느닷없는 아버지의 우석진 정책과장에 대한 칭찬에 태건이 멈칫했다.
“에?”
“그 사람은 자기 욕심일지라도 확고한 동기부여와 목표가 있는데, 넌 아무것도 없잖아.”
“저도 있습니다.”
태건이 눈에 힘을 주며 답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버렸다.
“그런데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잖아.”
“그건……. 그러네요.”
“그 과장인가 뭔가를 따로 만나서 확신부터 세워. 끝끝내 확신을 세우지 못하면 미국으로 가면 그만인 걸 뭘 고민하고 그러냐.”
아버지는 너무도 쉽게 말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모두 옳은 소리였다.
이제 머릿속 안개가 확실히 걷힌 거 같았다.
태건은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딱 듣자마자 아세요?”
“나는 여기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을까.”
“아…….”
태건은 확 이해가 되는 거 같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 그럴 때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현명해.”
“그럼 어머니를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니들 건강. 그리고 추억.”
“…….”
“부모에게 더 확실한 동기부여와 목적이 있겠냐. 그거면 됐지.”
너무도 확실한 예시라 반박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이해했습니다.”
“네 얼굴 봐도 그래 보인다.”
“그래요?”
스윽.
태건은 멋쩍은 얼굴을 쓸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궁상 다 떨었으면 내려가자. 해 질라.”
“그래도 궁상은 좀.”
“서른도 안 된 놈이 벌써 그런 고민을 하는 게 궁상이지. 내가 네 나이 때는 열정 하나로 죄다 밀어붙이고…….”
척. 척.
아버지는 과거를 들추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마치 평지처럼 내려가는 모습이 대단했다.
반대로 태건은 아버지의 뒤를 반도 따라가지도 못했다.
터덕, 턱.
“아버지. 같이 가요.”
“산타는 법도 다 까먹었냐?”
“오랜만이라니까요.”
“전엔 날다람쥐 같더니, 도시 물 먹었다고 둔해지기는.”
휘휘휙.
아버지는 사정없이 디스하더니 홀로 내려갔다.
그 뒤를 따르는 태건은 쫓아가기 급급해 다른 생각은 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 아버……. 으윽!”
촤작!
미끄러지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도 아버지와 거리를 좁히려 다시 용을 써 뒤따랐다.
움직임에만 집중하다보니 복잡한 머릿속은 텅텅 비어갔다.
어느새 산에 밤이 찾아왔다.
태건은 오랜만에 어머니의 손맛을 제대로 느꼈다.
그리고 담소를 나눈 후 별채로 넘어왔다.
고등학교 때까지 사용하던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끼익.
들어오자마자 응축된 나무 향이 코끝을 찔렀다.
“크으. 이 냄새.”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런 감동도 잠시였고,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윙윙.
낮에 하도 벌 소리를 들었더니 계속 환청이 들리는 거 같았다.
그와 별개로 아버지가 간략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준 고민을 곱씹었다.
우석진 정책과장과의 불신이 가장 걸림돌이란 결론이 섰다.
정확하게는 특수소방단의 알맹이가 어떤지 몰랐다.
“과장님을 따로 만나야겠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당장 내일 아침에 의중을 묻기로 결정지었다.
그러고 나니 확실히 복잡함이 가라앉았다.
허나 바로 잠들지는 못했다.
‘그럼 우선적으로 물어야할게…….’
줄줄줄.
태건은 머릿속으로 질문을 하나씩 떠올려 정리했다.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문제기에 여러 번 머릿속으로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며 신중을 기했다.
그저 머리를 굴리는 걸로 만족하지 못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을 차례로 노트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슥슥.
“자면 까먹어.”
자신의 기억력에 대한 확신보다 더 철저한 방법을 택한 거였다.
그만큼 태건도 특수소방단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태건은 향수가 가득한 방에서 눈을 떴다.
오랜만인데다 자연과 가까운 환경 탓인지 조금 덜 잤는데도 머릿속이 맑았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시간부터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어제 결심한대로 우석진 정책과장에게 전화부터 했다.
뚜루루. 철컥.
“우석진입니다.”
무게 가득한 음성이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태건은 그제야 명함을 내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알렸다.
“강태건입니다.”
“이렇게 전화를 줬단 건, 결심이 섰다고 봐도 되나?”
“여쭤볼 것들이 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부 간의 결정을 확실히 짓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테스트를 받는 입장이 됐단 뜻으로 들리네만.”
“제가 확실히 하고 싶어서 찾아뵙고 여쭈려고 하는 겁니다.”
태건은 그 부분은 확실히 짚어줬다.
그러자 살짝 날카로워지던 우석진 정책과장의 목소리가 다시 평이하게 내려갔다.
“찾아온다라. 세종으로 내려온다는 소리인가?”
“네.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오후에 찾아뵐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기다리지.”
“그럼 내려가면서 한 번 더 연락드리겠습니다.”
태건은 깔끔하게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서 휴대폰을 내려놓고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작성한 질문들이…….’
슥, 슥.
눈으로 재차 확인하고, 몇몇 질문들은 과감하게 수정했다.
그런 시간이 어머니의 부름이 들려올 때까지 계속 됐다.
한 시간 후.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마친 태건은 곧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 계절을 대비해 트렁크에 옷을 챙겼다.
그런 태건에게 다가온 아버지가 거무튀튀한 색의 꿀단지를 건네며 말했다.
“이거 약꿀이다. 선배랑 하루에 한 숟갈씩 퍼 먹어.”
“어라라, 이거 잘 안 내주시는 거잖아요.”
“얹혀사는 주제에 그럴싸한 걸 들고 가야 되지 않겠냐.”
“그게 아니라니까요.”
일단 받아든 태건은 억울했지만 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다 큰 놈이 에이그, 쯧.”
“끄응.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볼일 다 봤으면 가라.”
아버지는 여운도 없이 쫓아내려했다.
그때 어머니가 아이스박스를 들고 나와 태건에게 전했다.
“이거 너 좋아하는 더덕무침하고, 곰취나물하고, 아무튼 있는 것만 쌌어.”
“저 어디 들렸다가 간다니까요.”
“엄마도 다 기억하고 아이스팩하고 같이 넣었지. 하루도 끄떡없으니까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어.”
“그럼 뭐, 반찬 없는데 잘 됐네요.”
“그 고마운 선배한테 잘 보여야 되니까 꼭 같이 먹고.”
“……네. 그럴게요.”
정정할 기운이 쑥 빠진 태건은 그냥 수긍했다.
‘요즘 왜 이렇게 오해만 받는지.’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내 운전석에 오른 태건이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갈게요. 몸조심하시고, 어디 안 좋으시면 바로 연락주세요.”
“잔소리는. 빨리 가.”
“둘째야. 밥 꼭 잘 챙겨먹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부웅.
부모님의 상반된 배웅을 받으며 차가 출발했다.
태건은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달리고 달리던 태건은 남양주 부근에서 잠시 휴게소에 들렸다.
볼일도 볼일이었지만 한 가지 놓친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바로 형, 강태영과의 일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태건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했다.
“……한 달하고도 좀 지났을 텐데.”
“동생아, 이 형이 말이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해.”
“아, 짜식. 좀 들어보라니까. 주식이라는 게 네가 생각하는 거만큼 그렇게…….”
강태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장황해져갔다.
싸한 느낌이 역시 옳았던 모양이다.
빠직!
이마에 힘줄이 돋은 태건이 싸늘하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곧 어머니가 전화하실 거야.”
“야야야야야! 스탑, 스톱, 멈춰, 끊지 마!”
“…….”
“엄마 알면 나 듁어.”
강태영이 애원했지만 태건은 칼 같이 답했다.
“그러라고 전화드릴 거야.”
“넌 하나 밖에 없는 형이 갑자기 집으로 소환돼서 무릎 꿇고 몇 시간씩 잔소리 듣는, 그런 비극을 원하는 건 아니잖아.”
“원해.”
태건의 매정한 대답에 강태영 목소리가 다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