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태건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선배, 정신 안 차릴 겁니까!”
“…….”
터덕, 터덕.
황대산은 말없이 다가오기만 했다.
이젠 태건도 참는 데 한계를 느꼈다.
“에잇, 진짜!”
황대산이 더 날뛰지 못하게 기절시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휙!
황대산이 태건의 손에서 소방호스를 낚아채 갔다.
“어?”
예상치 못한 행동에 태건이 멈칫했다.
터억!
소방호스를 쥔 황대산은 불길을 향해 마구잡이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다 뒤져, 이 빌어먹을 불 새끼들아, 으아아아!”
촤아악!
물이 어지럽게 쏘아져 갔다.
황대산의 심정이 그 물길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태건은 곧 날카로운 눈빛을 거뒀다.
이유야 어쨌건.
‘이성은 있어.’
지금은 그게 중요했다.
그러나 완벽히 안도한 것도 아니었다.
차작.
재빨리 시신부터 한쪽 벽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무전기로 고수현을 호출했다.
띠릭.
“고 선배, 현재 위치!”
-띠릭. 6층 돌고 있어!
“4층 헬프. 이쪽에 요구조자들이 있습니다!”
-띠릭. 여긴……. 일단 알았어. 단장님, 고수현 4층으로 이동합니다!
고수현의 목소리가 따갑게 울렸다.
그에 오광휘 단장 목소리가 바로 반응했다.
-띠릭. 단장, 접수. 그리고 강태건, 4층 상황 어떤데?
“개판!”
-띠릭. 이쪽 정리되면 바로 내려갈게.“
“접수. 탈출로 확보 부탁합니다. 무전 끝!”
태건은 짧게 무전을 마쳤다.
황대산으로 인해 지체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최대로 잡아도 절대 1분이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흘러간 시간임은 분명했다.
“서둘러야 해!”
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촤아악!
황대산이 철천지원수 대하듯 불과 싸우고 있었다.
태건이 할 일은 요구조자 색출이었다.
어디 있을까.
더 늦어지기 전에 그들을 찾아야 한다.
두 눈 가득 힘을 주며 검은 연기로 가득한 로비를 둘러봤다.
황대산이 쏜 물길에 연기가 군데군데 흩어지고 있었다.
태건은 그 순간순간에 집중했다.
“저쪽이 스낵바, 그 옆에 카운터…….”
팽그르르.
머릿속이 고속 회전했다.
내가 요구조자라면.
그 관점으로 추측했다.
거기에 셀 수 없는 현장 출동으로 누적된 경험을 더했다.
화재에 가장 무서운 건 연기다.
그걸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는 장소, 동시에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둘러보던 태건이 어색한 점을 발견했다.
‘정돈되어 있어.’
모든 게 제자리에 위치한 채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면, 안전한 곳을 찾아 부리나케 움직였다면, 이런 모습일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침과 동시였다.
띵!
태건의 머릿속에 한 장소가 떠올랐다.
모든 스포츠 시설에 필수로 존재하는 장소였다.
‘샤워실!’
거기다!
눈빛을 빛낸 태건이 황대산에게 외쳤다.
“황 선배, 탈의실!”
“쓰벌, 거기가 어딘데!”
“그러니까……. 저쪽!”
휙!
태건이 한쪽을 가리켰다.
검은 연기 속 문패가 희끗 보였다.
-탈의…….
그 문패를 다시 시꺼먼 연기가 삼켰다.
하지만 이미 두 눈에 담은 후였다.
황대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줄기를 그쪽으로 옮겼다.
“치잇!”
푸와악!
물줄기에 연기가 흩어져갔다.
태건은 그렇게 열린 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전했다.
띠릭.
“강태건, 남자 탈의실 수색 돌입, 수현 선배는 여자 탈의실로!”
태건이 남자 탈의실로 향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숨을 거둔 중년인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했다.
그는 지키지 못했다.
그가 지키고 싶어 했던 아들만큼은 지키고팠다.
곧 태건은 탈의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얼굴이 확 구겨졌다.
검은 연기가 탈의실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던 탓이다.
칠흑 같은 연기는 그 속을 꽁꽁 숨겨 보여주지 않았다.
“늦었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확신은 금물이다.
그 희망이 좁쌀만 하더라도 결코 먼저 포기해선 안 된다.
“후웁……. 씨블!”
파박!
욕을 터트린 태건은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태건은 탈의실에 들어왔다.
화르륵!
나무로 된 락커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검은 유독가스의 원흉이었다.
“훅훅.”
자신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 정도로 적막했다.
스윽.
자세를 낮춘 채 한 손으로는 벽을 쓸며 이동했다.
시야가 제한된 곳에서 이동하는 요령이었다.
조심을 기해 샤워실을 찾아 더듬더듬 나아갔다.
그러던 중이었다.
텅.
발끝에 뭔가 채었다.
“흡!”
또?
놀란 태건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턱, 터덕.
손에 딱딱하고 원통형 물체가 닿았다.
가까이 보니 사용한 소화기였다.
“허으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감각이 전혀 다른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더는 사상자가 없어야 한다.
더는 귀한 생명을 사고란 이유로 희생시킬 수 없었다.
척. 척.
태건은 그 각오로 나아갔다.
정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씨이.”
슥슥.
더욱 몸을 낮춰 무릎을 쓸면서 이동했다.
연기와 불길을 최대한 피하기 위함이다.
이 열기를 멀쩡히 걸어서 통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우지직!
이상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어긋난 소리. 어디?”
휙휙.
좌우를 돌아봤지만 불길과 연기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생각할 무렵이었다.
후두둑.
하늘에서 빨간 불씨들이 흩날렸다.
이 상황과 맞지 않게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거기 정신이 팔릴 태건이 아니었다.
“불씨가 왜……. 엇!”
아차한 태건이 바로 위를 올려다봤다.
바로 그때였다.
불타던 천장이 무너져 태건에게 쏟아졌다.
우지직, 콰광!
“어, 어어!”
태건은 두 눈 가득 쏟아지는 불길을 봤다.
그러나 피하기에 늦었다.
후두둑!
결국 불타는 건축자재들이 태건을 삼켜버렸다.
탈의실 한쪽 구석.
무너진 건축자재가 싸여 있었다.
화르륵.
빨간 숯과 불이 넘실거렸다.
그런 자재들이 순간 들썩거렸다.
풀썩.
불씨들이 사방으로 흩날릴 뿐, 쌓인 자재엔 큰 변화가 없었다.
잠시 조용했다.
그러다 다시 불타는 자재들이 들썩였다.
풀썩, 풀썩.
몇 번 더 들썩이더니 자재를 비집고 두툼한 방화 신발이 튀어나왔다.
꽈직!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방화 신발이 튀어나오더니 두 다리가 불로 가득한 자재들을 반복적으로 차댔다.
퍼버벅!
차이고 떠밀린 자재들은 결국 공간을 내어줬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멍으로 태건이 불쑥 솟아올랐다.
방화 헬멧부터 모든 게 검게 그을려 있었다.
거기에 방화복과 방화 신발은 여기저기 불타고 눌어붙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크으윽!”
데구루루.
빨간 불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굴렸다.
터덩.
호흡기 탱크가 걸리적거렸다.
그렇다고 벗을 수 없는 생명줄이라 불편함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자재에서 빠져나온 태건은 그대로 누워 있었다.
“후욱, 후우욱. 크윽.”
온몸이 얻어맞은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침투한 열기까지 더해졌다.
“끄응. 큭!”
움직이려 시도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툭.
“젠장.”
어쩔 수 없이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그런 태건의 시선 가득 무너진 천장이 보였다.
휘이잉.
어디론가 통하는지 연기의 일부가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보는 태건은 기가 막혔다.
“이쪽은 뒤질 뻔했는데, 물이라도 쏟아져야 수지타산 맞는 거 아니야?”
정말 아찔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반사적으로 방화 신발을 들어 올려 직격타를 피했다.
그래서 이렇게 살 수 있었다.
화재 현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 또한 어떤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소방관의 숙명이라면 숙명이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었다.
소방관.
그저 물로 불 끄는 사람이 아니다.
불 속에서 목숨을 담보로 싸우고 요구조자를 구하는 이들이었다.
휴식은 너무도 짧았다.
누운 지 10초나 됐을까.
“후우우. 나만 살아서 쓰나. 끄응!”
태건은 몸에 힘을 주며 꾸역꾸역 일어났다.
소방관인 자신이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
요구조자는 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있을 터였다.
그걸 외면할 수가 없었다.
터덕.
끝끝내 몸을 세운 태건이 다시 움직였다.
“가자.”
척. 척.
자신의 아픔을 뒤로 한 채 눈빛을 빛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태건은 한쪽 벽을 쓸며 계속 이동했다.
“끄응.”
온몸이 쑤시는 통증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점차 익숙해지는지 잦아들었다.
“…….”
태건의 입에서 쓴소리가 지워질 무렵이었다.
툭.
무언가 색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이건 문이다.
플라스틱 슬라이딩 도어였다.
반쯤 녹은 플라스틱과 유리창이 엉겨 붙어 있었다.
-밖에 상황이 어때요?
-누가 오는 거 맞아요?
꿈틀.
안에서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순간 태건의 굳은 표정이 환하게 피어났다.
찾았다.
드디어 요구조자들을 발견했다.
없던 기운이 마구 샘솟았다.
“살아있어, 살아있다고!”
드륵!
태건은 재빨리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