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곧 좌우에 나눠져 있던 요구조자들이 한데 모여 피부관리실에 들어왔다.
우글우글.
거의 50여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그 중 몇몇 근육질의 남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인솔한 고수현이 다가와 여자 탈의실 상황을 짧게 알려줬다.
“헬스트레이너들이 같이 있었어. 덕분에 대처를 상당히 잘했었어.”
“어쩐지 남자 탈의실 쪽에선 못 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어?”
고수현이 주어없이 물어왔다.
그때 까까머리 청년이 피부관리실로 들어왔다.
그를 발견한 태건의 눈썹이 축 내려앉았다.
“이제 거짓말하러 가야 합니다.”
“때론 하얀 거짓말도 있어.”
“후. 그럼.”
쓰게 대답한 태건이 까까머리 청년에게로 향했다.
곧 둘이 마주했다.
청년이 먼저 다급히 물어왔다.
“아버지는 찾으셨습니까?”
“네. 첫 번째로 내려가셨습니다.”
“정말입니까?”
“밑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태건은 다소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 차이를 까까머리 청년은 알지 못했다.
“아,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럼 조심히 내려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아버지 찾아주셔서, 또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청년은 밝은 얼굴로 고개 숙였다.
태건은 그 인사를 정면으로 받지 못했다.
스윽.
슬쩍 몸을 돌려 비스듬한 자세를 취해버렸다.
곧 까까머리 청년이 바스켓에 탑승해 하강했다.
지이잉.
내려가는 걸 확인한 태건이 쓴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멱살 안 잡힐까 몰라.”
아무래도 거짓말한 게 계속 마음에 남았다.
아무리 하얀 거짓말이라고 해도 거짓말은 거짓말이었다.
상황이 종료되면 문상을 다녀와야 할 거 같았다.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는가 싶었다.
그때 근육이 우락부락한 헬스트레이너가 다가와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파란 반팔티 입은 트레이너는 먼저 내려갔습니까?”
“아니요.”
“이상하네, 아까 헬스장에서 대피할 때 분명 봤는데.”
헬스트레이너는 흘리듯 말했다.
그러나 태건의 귀는 그 발언에 온통 집중하고 있었다.
“헬스장이요?”
“네. 5층이 헬스장입니다.”
대답과 동시였다.
이번엔 몸매를 강조한 옷차림의 여자 트레이너가 다가왔다.
“김 쌤, 혹시 유나 씨 못 봤어요?”
“남자 탈의실 쪽에 있던 거 아닙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저쪽엔 여자분이 한 명도 없었대요.”
대화 내용이 점점 태건의 촉을 잡아당겼다.
“두 분이 없다고요?”
“먼저 내려가셨으면 모를까.”
“전화해 보세요.”
“해봤는데 락커 안에서 울렸어요.”
여자 트레이너의 표정이 안 좋게 변해 갔다.
태건은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물었다.
“그 두 분 성함 좀 다시 요.”
“김유나, 왕성남이요.”
“잠시만.”
스윽.
돌아선 태건은 바로 김위영에게 전화했다.
김위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조금 전에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출발했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탈출하신 분들 중에 김유나와 왕성남, 두 분 이름이 있습니까?”
“잠시만.”
김위영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잠깐의 기다림 후에 다시 들려왔다.
“아니, 없어.”
“없다고요?”
“상황실에서 취합 중인데, 없다더라……. 뭐야, 요구조자가 또 있는 거야?”
김위영도 불길함을 감지한 모양이다.
물론 태건만큼은 아니었다.
쭈뼛.
뒷머리가 바짝 곤두섰다.
“일단 끊겠습니다.”
탁.
전화를 끊은 태건이 트레이너들에게 말했다.
“저희가 찾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려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냥 내려가라고요?”
“대신 도움 좀 주십시오. 헬스장의 구조에 대해서요.”
“그건 제가, 그러니까…….”
슥슥.
바닥 가득한 검뎅이를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줬다.
덕분에 태건은 대번에 머릿속에 담았다.
“감사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고 선배!”
휙!
돌아선 태건이 묵직하게 외쳤다.
그 순간 고수현이 떡하니 나타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벌써 직감한 모양이었다.
“느낌이 썩 안 좋더라니.”
“가시죠.”
태건은 바로 두 다리를 움직였다.
황대산은 바스킷에 요구조자를 태우는 중요한 구조 활동 중이라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불쑥.
두 명의 소방관들이 나타났다.
옥상에 있던 오광휘 단장과 이지성이었다.
둘 다 조금 지쳐 보였다.
그러나 태건과 고수현을 본 순간 눈빛부터 달라졌다.
“뭔 일이야?”
“두 명 실종 상태입니다.”
“예상 지점은?”
“헬스장입니다.”
태건은 바로바로 대답했다.
오광휘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뭐하냐. 시간 없다.”
“네!”
타다닥!
네 명의 단원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스포츠센터 로비의 화재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화르륵!
피부관리실을 나오자 다시 열기가 몰려왔다.
“크윽!”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게다가 연기도 짙게 드리워 시야가 제한됐다.
그럼에도 태건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쪽으로!”
“알고 가는 거야?”
오광휘 팀장이 묻자 태건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트레이너에게 들었습니다!”
“그럼 확실하네. 뭐해, 빨리 가!”
오광휘 팀장은 얼른 보챘다.
타다닥.
앞서 내달리던 태건이 돌연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수현 선배, 소방호스!”
“맞다. 이쯤이었을 텐데……. 찾았어!”
푸와악!
물줄기가 머리 위를 넘어 쏘아져 갔다.
좀 더 달려가던 태건은 오광휘 단장을 찾았다.
“단장님, 저쪽에 옥내소화전이 있습니다!”
“당연히 내 꺼!”
파바박!
오광휘 단장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고.
푸와악!
또 하나의 물줄기가 더해졌다.
양쪽에서 지원사격을 해주니 불길과 연기가 빠르게 밀려났다.
슈슈슈.
그제야 연기에 감춰져 있던 내부 계단이 드러났다.
그 계단조차 아직 불씨가 남아 있었다.
꽈직.
태건이 내디딘 발이 첫 번째 계단의 불씨를 부숴버렸다.
푸시식.
신발 밑창에서 후끈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멈출 순 없었다.
이 기세 그대로 간다.
기합을 내질렀다.
“이야압!”
“조용히 좀 가자!”
이지성이 차갑게 면박을 줬다.
파바박!
그러나 뛰어 올라가는 기세가 태건과 엇비슷했다.
태건과 이지성은 한달음에 5층에 도착했다.
여긴?
한 층의 대부분이 헬스클럽이었다.
그런 특성 탓인지 불길이 강하게 일진 않았다.
대신 천장과 바닥재가 부분부분 타들어 가고 있었다.
후두둑, 꽈직!
어딘가의 천장에서 커다란 불꽃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다행이라면 연기가 심하지 않단 점이었다.
“여기도 역시.”
“어디 숨을 데가 있나?”
휙휙.
태건과 이지성은 등진 채 주변을 샅샅이 둘러봤다.
그때였다.
-우리 좀……. 제발 우리 좀 살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건이 귀를 꿈틀거리며 활짝 열었다.
동시에 이지성을 불렀다.
“선배.”
쉿.
검지를 입에 대며 사인을 더했다.
이지성의 눈치는 단원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
곧장 입을 다물고 귀를 집중시켰다.
그렇게 둘이 침묵한 순간이었다.
“저기……. 끙, 아무도……. 없어요?”
목소리다.
띵!
태건과 이지성의 눈빛이 동시에 빛났다.
“선배.”
“나도 들었어.”
“저쪽!”
타다닥!
태건과 이지성이 부리나케 내달렸다.
각종 운동기구가 장애물같이 서 있었다.
“에라, 통과!”
파바박!
누구라고 할 거 없이 그대로 밀어붙였다.
빙 돌아가는 길은 있다.
시간이 없을 따름이다.
“에잇!”
“칫!”
휙휙.
위로 뛰어 넘고, 허리를 숙이는 등.
묘기처럼 방해물들을 뛰어넘었다.
그 사이 오광휘 단장의 무전이 들려왔다.
-띠릭. 나랑 수현이 5층 도착!
“요구조자로 추정되는 목소리 포착, 추적 중!”
-띠릭. 우린 탈출로 확보할게!
오광휘 단장은 욕심내지 않고 서포터를 자청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번개같이 달리던 태건과 이지성이 우뚝 멈췄다.
눈 앞에 펼쳐진 모습 탓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장난해?”
보고 있음에도 두 눈엔 불신이 가득했다.
거기엔 바벨 플레이트들과 주변 운동기구가 쓰러져 엉켜 있었다.
문제는 그 아래였다.
어떤 남자의 뒷머리가 보였다.
그 밑에 20대 중후반의 여자가 있었다.
실종자 두 명일 터였다.
“제기랄!”
파박!
태건이 반 박자 빨리 남은 거리를 좁혔다.
자세를 낮춰 도착한 태건이 단단한 목소리로 알렸다.
“소방관입니다!”
“김유나 씨, 왕성남 씨 되십니까?”
뒤따라 도착한 이지성이 덧붙여 물었다.
그와 동시였다.
흐릿하던 여자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스르륵.
이어서 고개를 움직여 두 사람을 마주했다.
그리고.
눈시울이 급속도로 붉어지며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아……. 허으윽.”
울음까지 터졌다.
절망의 순간 나타난 소방관들 모습에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김유나의 얼굴 곳곳에 쓸린 상처가 있었다.
그건 중요한 축에도 끼지 못했다.
목 아래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여러 운동기구에 깔려 감춰져 있었다.
태건은 안도감을 주기 위해 김유나의 머리에 손을 댔다.
“저희가 왔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 아파요. 흑흑.”
“알겠습니다. 얼른 치워 드리겠습니다.”
태건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그런데 김유나가 도리질치며 다른 말을 건넸다.
“저보다……. 흑흑. 저보다 왕 쌤이, 흑흑.”
또르르.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