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태건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뒷머리만 보이는 왕성남이 너무도 조용했다.
태건은 일단 그를 불렀다.
“왕성남 씨, 제 말 들리십니까. 왕성남씨?”
“그, 그륵.”
뭐가 끓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뚝, 뚝.
빨간 액체가 김유나의 머리카락으로 떨어졌다.
태건이 멈칫했다.
“피?”
“비켜!”
휙!
이지성이 태건을 거칠게 밀어내며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곧장 왕성남의 경동맥에 손을 얹었다.
한편.
떠밀린 태건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윽!”
아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이지성의 뒷모습.
여전히 차갑고 냉정했다.
그 냉철한 이성으로 요구조자 바이탈을 확인 중이다.
이런 순간엔 그 차가움이 의외로 반가웠다.
그러니 방해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럼 나는?’
사삭.
태건은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김유나에게 다가섰다.
“유나 씨, 대화 가능합니까?”
슥슥.
얼른 방화 장갑을 벗고 눈물부터 닦아주며 물었다.
그 손길이 따뜻했는지 김유나가 다시 울컥했다.
“흑, 흐윽.”
“심호흡하시고, 급하게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건은 최대한 차분하게 달랬다.
김유나는 쉽사리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끄윽, 흑…….”
그래도 애쓰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따름이다.
태건은 그 짧은 시간도 허비하지 않았다.
바로 무전을 날렸다.
띠릭.
“단장님, 탈출로 확보 보류, 이쪽으로.
-띠릭. ……바로 간다.
오광휘 단장의 가라앉은 답신이 들려왔다.
그 사이 김유나의 울먹임이 잦아들었다.
“흐, 흐으…….”
예상보다 빨랐다.
김유나 또한 노력 중이었다.
지켜보던 태건은 타이밍 맞춰 다시 말을 건넸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흐우우, 조금이요.”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아니요. 끄으응, 안 돼요.”
김유나가 고운 미간을 찌푸려가며 답했다.
태건은 용을 쓰는 그녀를 만류했다.
“됐습니다. 그만, 그만하셔도 됩니다.”
“흐으, 네.”
“지금 제가 보기에 왕성남 씨가 위에 있는 거 같은데, 맞습니까?”
태건은 한 번 더 침착하게 물었다.
그때였다.
촤아악!
입구 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더불어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이 각각 소방호스로 불을 꺼뜨리며 나타났다.
“어디야, 어디!”
찾는 소리가 따가웠다.
스윽.
태건은 시선을 김유나에게 고정한 채 손만 높이 들어올렸다.
“…….”
이 정도 사인이면 충분했다.
오광휘 단장도 봤는지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수현이, 저쪽!”
“저도 봤습니다. 단장님이 천장, 제가 바닥!”
“위, 아래, 위위, 아래다!”
촤악, 촤아악!
두 개의 물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지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손을 내린 태건에게 김유나의 대답이 들려왔다.
“맞아요. 왕 쌤이 저를……. 크흠. 저를……. 그런데 왕 쌤, 괜찮은 건가요? 왕 쌤!”
그녀의 목소리가 급격히 흔들렸다.
태건은 방화 장갑을 둘 사이에 놓아 시야를 차단했다.
“저희 단원이 살피고 있습니다. 유나 씨는 저에게만 집중해 주세요.”
“왕 쌤이 무사하게 해주세요. 저 때문에 저렇게 된 거예요. 저 때문에 다친 거라고요.”
김유나는 반복해 강조했다.
태건도 두 사람의 포즈로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태건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바로 이지성에게 속삭여 물었다.
“선배, 어떻습니까?”
“……30초만 더.”
으스스.
이지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심각한지 오싹하게 들려왔다.
‘좋지 않아.’
태건도 직감했다.
태건은 다시 김유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파바박 하더니 불이 났어요.”
“합선이네요. 난리가 났겠습니다.”
태건이 추측해 말하자 김유나가 바로 이어갔다.
“네. 저도 도망가려는데 왕 쌤이 저한테 피하라고 소리쳤어요.”
“왜 소리친 겁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왕 쌤이 달려와서 저를 밀면서 같이 넘어진 거까지만 기억나요.”
김유나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답하고 있었다.
최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거였다.
태건이 다음을 유추해 말했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단 거네요.”
“네.”
“흐음. 그렇군요.”
태건은 덤덤하게 답했다.
그렇다고 마음속까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실 마음이 너무도 급했다.
하지만 어지럽게 쌓인 운동기구를 멋대로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이지성이 모두 살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타이밍에 뒤쪽에서 습기가 강하게 몰려왔다.
타닥.
발소리도 이어서 들려왔다.
미자막으로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이 나타났다
“도착.”
“일단 불부터 밀어내고!”
촤아악!
둘은 서로 반대 방향을 조준해 불길을 최대한 멀리 밀어냈다.
그때였다.
왕성남을 살피던 이지성이 돌연 고함쳤다.
“응급!”
일순간 모두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중 가까운 태건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응급입니까?”
“바이탈이 거의 잡히지 않아. 특히 맥박이 약해.”
“그러려면 대형출혈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 바닥이 출혈로 흥건해야 하잖습니까.”
태건이 의아함을 보였다.
바닥은 다급하단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도 깨끗했다.
그때 이지성이 착 가라앉은 다른 경우를 말했다.
“내출혈.”
“설마?”
“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둘 중 하나는 확실해.”
이지성의 발언이 너무도 확고했다.
태건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
그 사이 이지성이 입을 열었다.
“뼈가 부러지면서 혈관을 찢었던지, 아니면…….”
“장기손상.”
두 번째 경우를 태건이 말했다.
이지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젠장!”
벌떡!
거친 욕설과 함께 태건이 솟구치듯 일어났다.
그 반응은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도 똑같았다.
“이런 빌어 쳐 먹을!”
“넌 새꺄, 그 말을 뭐 그렇게 태연하게 하냐!”
따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 그들에게 태건이 낮고 강하게 외쳤다.
“뭐합니까. 빨리 걷어내야 합니다. 서둘러요!”
“우리도 알아, 짜샤!”
휙!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이 소방호스를 내던지고 날듯이 뛰어왔다.
그런데 한 명은 반응이 없었다.
이지성이었다.
태건이 그를 재촉했다.
“지성 선배!”
“나도 생각이 있어!”
맞받아친 이지성이 방화복의 앞섬을 열었다.
부욱!
이어서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가방이었다.
“혹시나 하고 챙기길 잘했지.”
휙.
비상용 구급상자인 모양이다.
그 안엔 빈 주사기부터 몇 가지 의약품과 앰풀이 들어있었다.
이지성은 바로 주사를 준비했다.
“진통제 투여합니다!”
푸욱.
왕성남의 커다란 어깨에 다이렉트로 밀어 넣었다.
태건은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흉악한 운동기구들을 치울 차례였다.
터덕.
손에 집히는 대로 옆으로 내던졌다.
“빨리!”
“알아, 새꺄!”
오광휘 단장이 따갑게 외쳤다.
다급한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날이 잔뜩 선 목소리보다 두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때부터 세 단원은 걷어내는 데만 몰두했다.
“이거, 끄응.”
“같이! ……둘, 셋.”
쾅!
“에잇, 차앗!”
퉁, 퉁!
같이, 또 따로.
세 사람은 운동기구들을 내던졌다.
그러던 중이었다.
김유나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으으으……. 아악!”
이내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런 반응에 다들 멈칫했다.
“뭐야?”
“뭡니까?”
이지성이 왕성남에게 주사를 놓으며 소리쳤다.
“무게가 줄면서 아픔이 느껴지는 겁니다. 유나 씨도 진통제 투여하겠습니다.”
“어쩐지, 안 다쳤을 리가 없지. 얘들아, 서둘러라!”
오광휘 단장이 버럭 소리쳤다.
태건과 고수현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더 빨리!”
“뭐가 이렇게 많이……. 끄응. 쌓인 거야!”
급해진 마음 탓인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걷어내고 또 걷어내길 반복했다
운동기구가 뒤엉킨 산이 점점 꺼져갔다.
그럴수록 태건과 단원들은 빠르게 지쳐갔다.
“헉헉!”
“장비가…….”
제 몸 같던 장비들의 무게가 압박으로 다가왔다.
“에라이, 벗어!”
텅!
태건은 과감하게 산소통을 내려놓았다.
요구조자가 위급한 상황이다.
꾸역꾸역 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도 틈틈이 장비를 벗어던졌다.
방화복도 포함이었다.
“진작 이럴 걸, 으샤샤!”
“이 정도면 충분해!”
터덩덩!
모두 순식간에 기동복으로 변했다.
가벼워진 만큼 작업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그에 대한 성과도 명확히 나타났다.
꿈틀.
널따란 플레이트가 들썩거렸다.
거의 다 왔다.
“몇 개 안 남았습니다. 성남 씨, 듣고 있죠. 조금만 참아요!”
태건은 틈틈이 왕성남을 주시하며 외쳤다.
그건 그의 반응 탓이었다.
“……으으. .……으윽. 으으……. 아으으.”
무게가 덜어질수록 괴로움이 증가하고 있다.
엄청난 무게에 느끼지 못했던 아픔이 서서히 느껴지는 현상이었다.
진통제로 지워질 통증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