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94)화 (94/320)

94화

태건은 더욱 다급해졌다.

일단 들썩이는 플레이트부터 얼른 옆으로 내던졌다.

투엉!

바닥이 울릴 정도의 무게였다.

역시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걸 걷어내니 드디어 감춰져 있던 부분이 드러났다.

고수현이 설레발쳤다.

“좋아. 이제 됐…….”

“안 됐습니다, 우라질!”

태건이 말을 딱 잘라버렸다.

욕설까지 덧붙였다.

원해서 내뱉은 게 아니라 절로 튀어나온 거였다.

드디어 드러난 왕성남이 팔다리가 제멋대로 꺾여 있었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른쪽 등만 보랏빛을 넘어 새까만 멍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오돌토돌한 부분도 보였다.

오광휘 단장이 눈에 힘을 주며 씹어뱉듯 말했다.

“덤프트럭에 치여도 이 정도는 아니야.”

“그런데……. 아.”

고수현이 진한 탄성을 자아냈다.

왕성남의 듬직한 몸이 비스듬한 이유가 있었다.

김유나를 감싸고 있었다.

이미 들어서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감회가 남달랐다.

더 놀라운 점도 있었다.

왕성남이 대부분의 무게를 홀로 지탱했다.

현장경험이 있기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태건도 놀라웠다.

‘유나 씨 생명과 자기 몸을 바꿨어.’

왕성남은 수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 피땀 흘려 이룬 몸일 거다.

그에겐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몸을 희생한 거다.

존경심을 넘어 경외가 감돌았다.

그때였다.

비스듬히 누운 왕성남의 목울대가 크게 들썩였다.

“욱, 우우……. 억.”

후두둑!

입이 열리더니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내렸다.

김유나는 피할 길이 없어 얻어맞았다.

고운 얼굴이 피투성이 되어갔다.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왕성남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가 격하게 진동했다.

“왕……. 왕 쌤!”

그 외침이 왕성남의 흐릿한 의식을 자극한 모양이다.

“유……. 나……. 씨.”

“왕 쌤, 아악! 이러지 마요. 정신 차려요!”

“괜찮…….”

뚝, 뚝.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김유나는 그런 자신은 안중에 없었다.

다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지금 제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왕 쌤, 왕 쌤!”

“흐, 흐흐…….”

“웃음이, 어떻게…….”

“건……. 건강이……. 제일……. 으으.”

뚝.

어렵게 말을 이어가던 왕성남의 몸이 축 늘어졌다.

김유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안, 안 돼……. 안 돼!”

그녀의 처절한 외침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바로 그때였다.

사삭.

태건과 이지성이 동시에 접근했다.

왕성남의 경동맥에 손을 대는 타이밍까지 똑같았다.

“맥박!”

척!

태건은 손끝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

토도도, 토도도.

뛴다.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미약한 움직임으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건.

번뜩!

“tachyarrhythmia!”

“부정빈맥!”

이지성이 동시에 외쳤다.

휙!

이어서 눈이 마주쳤다.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똑같았다.

“CPR!”

“호흡!”

이번엔 다른 말을 외쳤다.

둘 다 지금 상황에 필수적인 내용이었다.

태건은 비스듬히 누운 왕성남의 어깨부터 신속히 끌어당겼다.

풀썩.

우람한 체격이 힘없이 딸려왔다.

왕성남이 바로 눕게 되자 태건은 재빨리 CPR을 시작했다.

훅훅.

“하나, 둘……. 두 분, 유나 씨!”

CPR 중 터트린 짧은 외침이었다.

척하면 척이었다.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이 재빨리 자유를 찾은 김유나를 부축했다.

“자, 조심조심.”

“아파도 조금만 참으세요.”

사소한 손짓 하나까지 최대한 자극을 피하려 신경 썼다.

그러나 정작 김유나는 절규하며 발버둥 쳤다.

“아악, 왕 쌤, 성남 씨. 죽지 마요. 안 돼요!”

그런 김유나의 몸도 부상을 입었다.

그 모든 걸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살려준 은인을 걱정했다.

소리만 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터억!

어디서 힘이 났는지 오광휘 단장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성남 씨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뚝뚝.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다.

오광휘 단장은 이런 순간에 오히려 냉정해지는 타입이었다.

“저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 돼요. 옆에 있을래요. 아아악!”

김유나는 악을 쓰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부상을 입은 몸은 소방관들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모두 김유나의 절규를 들었다.

구우우.

다들 표정이 사라지고 차가운 안광을 번뜩였다.

왕성남을 살려야 한다.

지금 그의 목숨은 하나가 아니다.

김유나까지 둘의 목숨이었다.

둘 다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왕성남의 생명이 계속 이어져야 했다.

태건과 이지성은 왕성남에게 집중했다.

어느새 왕성남의 깨끗해진 입에 호흡기 호스가 물려 있었다.

콸콸.

옆에 소방호스가 물을 끝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둘 중 태건은 왕성남의 가슴에 CPR 중이었다.

훅, 훅, 훅.

“……서른!”

외침과 동시에 손을 뗐다.

그 순간 이지성이 왕성남의 경동맥을 통해 맥박을 가늠했다.

“아직이야.”

“젠장. 다시, 하나, 둘……. 선배, 뭐 없습니까?”

태건이 CPR하며 물었다.

이지성은 가방 속을 뒤적이며 짜증을 토해냈다.

달그락.

“엿 같네. 진통제 밖에 없어.”

“진통제……. 혹시 리도카인 있습니까?”

“음? 그래, 그거.”

이지성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답했다.

반면 태건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쨍!

곧장 다시 입을 열어 부탁했다.

“그거 정맥주사로, 빨리!”

“이거 진통제라니까!”

“항부정맥제 역할도 합니다!”

부릅!

태건이 눈에 힘을 주며 따졌다.

그 와중에도 CPR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쿠르릉.

태건이 맹수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이지성이 멈칫했다.

“사실이야?”

“일단 찌르라니까!”

“……네가 위험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영문 모를 말을 흘린 이지성은 바로 주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바로 혈관을 찾아 찔렀다.

쭈욱!

주사액이 빠르게 투여됐다.

“투여 했어.”

“훅훅. 약효가 곧 돌 겁니다. 곧!”

“…….”

이지성은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태건의 말은 곧 적중했다.

두 번의 CPR 후 세 번째로 반복하고 있었다.

“……서른!”

“호흡, 호흡, 맥박확인……. 돌아왔어!”

경동맥을 짚어 확인하던 이지성이 놀라 바라봤다.

태건은 얼른 반대쪽 경동맥을 짚었다.

툭, 툭.

손끝을 자극하는 규칙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잔진동은 확실히 사라졌다.

그런데 심장박동의 힘이 너무 약했다.

“이대로는 오래 못 버팁니다.”

“동감, 당장 구급차에 실어서 수혈부터 해야 돼.”

“길어야……. 정말 길어야 5분?”

태건이 조심스레 예측을 말했다.

이지성도 크게 차이가 없던 모양이다.

“비슷해. 빨리 4층으로 데려가서…….”

“언제 데려갑니까.”

“그럼 어쩌자고, 당장 눈앞에 들것조차 없는 상황인데!”

이지성은 감정이 끓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 침묵하고 있었다.

그때 태건이 점점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다급할수록, 긴장감이 심장을 옥죌수록, 태건은 차가워진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지금보다 더한 압박이 없었다.

샤아악.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두 눈이 매서워졌다.

‘더 라스트’의 모습이었다.

태건은 시리도록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껏 둘러본 대로 헬스장이었다.

응급의학과 동떨어진 장소다.

그런데 태건은 그 속에서 보물을 걸러냈다.

띠리링, 띵!

곧 눈빛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5분 내에 탈출 가능합니다.”

“어떻게?”

이지성은 의구심을 품은 채 물었다.

그런데 태건의 시선은 이미 오광휘 단장에게로 향해 있었다.

“단장님, 현관 근처에 구급차 한 대 대기시켜 주십시오. 주변에 사람도 물려주시고요. 최대한 빨리요.”

“……뭔지 몰라도, 믿는다.”

휙!

오광휘 단장은 두말없이 돌아섰다.

그 사이 태건은 고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5층에 비치된 소방호스 죄다 가져와 주십시오.”

“가져오라고?”

“…….”

구우우.

태건은 답 없이 바라만 봤다.

그 시선에서 압박을 느꼈는지 고수현이 수긍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타다닥.

이내 고수현도 멀어져갔다.

태건은 마지막으로 이지성에게 말했다.

“우리는 들것 만들죠.”

“대체 뭐로 만들겠단 거야.”

“따라오면 알 거 아닙니까.”

휙!

대답과 동시에 날렵하게 자리를 박차고 움직였다.

“…….”

굳은 눈으로 바라보던 이지성이었지만 곧 뒤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태건과 이지성이 두 손 가득 무언가를 안고 돌아왔다.

후두둑!

내려놓은 건.

기다란 벤치프레스 바 2개와 줄넘기, 풀업 밴드와 같은 각종 끈이었다.

태건은 곧장 몸을 낮춰 들것 제작에 들어갔다.

척, 척.

양쪽에 쇠막대를 위치시킨 순간이었다.

“여기.”

스윽.

줄넘기가 뭉텅이로 다가왔다.

이지성이 내민 거였다.

안 된다고 단정지은 게 머쓱했는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태건은 그런 그의 반응에 응할 여유가 없었다.

“…….”

슥슥.

받아든 줄넘기로 좌우 쇠막대를 연결했다.

태건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재봉사 같이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졌다.

“…….”

이지성도 말없이 줄과 밴드를 전달했다.

곧 급조한 들것이 완성됐다.

그 타이밍 맞춰 오광휘 단장과 고수현이 돌아왔다.

“현장 통제 들어갔고, 구급차 바로 세팅할 거야.”

“여기 소방호스 싹 가져왔어!”

후두둑.

태건은 소방호스의 길이를 가늠하며 말했다.

“부족하진 않을 거 같습니다.‘

“그걸 어디에 쓰려고?”

“이제 아시게 될 겁니다.”

스윽.

태건은 또 여지를 남긴 채 먼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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