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잠시후.
츠즈즈.
헬기의 진동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휘이잉, 터더더.
불안정한 기류와 거기에 열심히 저항하는 로터 소리만 들려왔다.
다행히 헬기는 가까스로 위험을 피해 다시 하늘을 나는 중이었다.
‘진짜 위험했어.’
태건은 굳은 몸을 살살 풀며 한 번 더 알려줬다.
“벗어났다니까요.”
“어?”
스윽.
슬며시 실눈을 뜬 그들은 곧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봤다.
그때 유중헌의 짜증 가득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어는 쥐뿔, 이런 조종사 만나기 힘들어!”
그 한마디였다.
“살았……. 와, 와아. 살았다!”
“멀쩡해. 무사해!”
“선배!”
꽈악.
서로 얼싸안고 난리가 났다.
그러던 모두가 멈칫했다.
안았다.
누가, 누구를?
머릿속에 빠르게 이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끔직(?)하게 생각하는 서로를 안고 있단 걸 알아챘다.
“…….”
순식간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며 슬쩍 두른 팔을 내렸다.
그리고 시선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 어색함을 유중헌이 깼다.
“어우씨, 최소 10년은 수명 줄었네.”
“조종 좀 똑바로 해라.”
오광휘 단장이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유중헌이 뭐라 하기 전에 태건은 바로 현실을 이야기했다.
“언제 다시 기류가 바뀔지 모릅니다. 긴장들 하세요!”
“응.”
꾸욱.
축 쳐져 있던 모두가 얼른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후로도 헬기는 수시로 돌풍과 맞닥뜨렸다.
덜컹, 터덩!
기체가 요동치며 잠시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
다들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며 견뎌내고 있었다.
어느새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랬다.
‘으으으.’
‘아으으.’
속으로는 지금도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꾹꾹 눌러 참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미련한 자존심 싸움 같았다.
그 악조건을 뚫고 비행하던 유중헌이 버럭 소리쳤다.
“랜딩 포인트 도착 10초 전!”
사삭!
모두 창밖을 통해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동시에 경악했다.
“이게 뭐야!”
계속 불어난 강물에 섬은 온통 물천지였다.
몇몇 집은 벌써 침수가 시작됐다.
그때 오른쪽을 주시하던 황대산이 외쳤다.
“저쪽에 대피한 주민들이 보입니다!”
“……이런, 다리 상판까지 차올라서 발이 묶였습니다!”
이어서 외치는 고수현의 목소리도 따가웠다.
그다음은 오광휘 단장이 마무리졌다.
“흙탕물이라 얼마나 침수됐는지 가늠이 안 돼. 그나마 높은 곳에 있어서 당장 위험해 보이지 않아 다행이야.”
오광휘 단장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오광휘 단장의 상황 분석이 끝난 직후였다.
태건이 왼쪽을 가리키며 거칠게 외쳤다.
“저기, 왼쪽 다리!”
“뭔 다리가 또 있어. 저쪽은……. 뭐, 뭐야!”
오광휘 단장의 목소리가 헬기 천장을 뚫을 기세로 높아졌다.
왼쪽 다리 한가운데 한 사람이 보였다.
그 다리 또한 상판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였다.
난간을 붙들고 버티고 있지만 순간 몰려온 물살에 휘청거렸다.
급류.
한번 휘말리면 끝이다.
더구나 다리 양쪽에선 물이 부딪치면서 위로 무섭게 솟구쳤다.
상황상 신고받은 요구조자가 분명했다.
라텔 단원 모두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뒤로 빽! 물러나세요!”
“앞으로 가요!”
“어디든 일단 벗어나세요!”
웅웅!
헬기 속에 고함 소리가 터질 듯 가득 찼다.
오죽하면 헬기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듣다 못한 유중헌이 버럭 소리쳤다.
“그런다고 들리냐, 다 입 닥쳐!”
“…….”
그건 옳은 소리라 다들 조용했다.
바로 그때였다.
스릉!
헬기 왼쪽 슬라이딩 도어가 열렸다.
태건이 말보다 행동으로 구조활동의 선두에서 움직였다.
휘이잉.
비바람이 헬기 안쪽에 그대로 몰아쳤다.
동시에 태건이 로프를 내리며 다부지게 외쳤다.
“중헌 선배, 왼쪽 다리 중간으로 이동. 그리고 고도도 맞춰 주십시오!”
“해볼게!”
투다다.
헬기가 급선회하며 왼쪽 다리로 접근했다.
돌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고도까지 한 번에 낮추는 고난도 조종 실력을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운전에 대해서는 정말 탁월했다.
‘잘 찾았어.’
태건이 남모르게 피식 웃었다.
곧 비옷을 입은 누군가가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어 헬기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태건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렇게 가까워져서야 헬기 소리가 들린다고?”
“모자 벗는다. 아니, 바람에 날린다……. 어?”
“할아버지잖아!”
다들 화들짝 놀랐다.
스르륵.
비옷의 모자가 벗겨지자 주름 가득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일흔 정도로 추측됐다.
그런데 등이 불룩한데 비해 상당히 마른 얼굴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오광휘 단장은 도대체 밸런스가 맞지 않는 신체에 갸웃했다.
태건도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 서둘러야 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중헌 선배, 더 빨리!”
“하고 있잖아!”
유중헌의 반사적인 대답 또한 무척이나 따가웠다.
헬기는 어느새 다리 근처에 접근했다.
태건과 황대산이 좌우에서 레펠을 준비 중이었다.
“강태건 강하 준비 끝!”
“황대산도 완료!”
꾸욱.
둘 다 축축해진 로프를 강하게 쥐었다.
신호만 들리면 그대로 헬기에서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노인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기다림은 짧았다.
곧 유중헌의 카운트가 들려왔다.
“레펠 시작까지, 쓰리……. 투…….”
마지막 숫자를 남겨둔 그때였다.
퓌이익!
순간 변화한 기류로 돌풍이 몰아쳤다.
균형을 잡고 있던 헬기도 크게 휘청거렸다.
덜컹
“어어어!”
“크으으, 젠장. 더 이상 못 버텨!”
유중헌의 짜증 가득한 소리가 귓전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였다.
투두두.
헬기가 다시 급상승했다.
태건은 다리와 다시 멀어지는 걸 감지하자마자 소리쳤다.
“중헌 선배!”
“짜샤. 이건 못 버텨!”
“악으로, 깡으로 버텨!”
“그게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고. 젠장!”
유중헌의 입에서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그도 레펠 포인트에서 멀어지는 게 화가 난 얼굴이다.
그때였다.
아래도 돌풍이 부는 모양이다.
풰에엥!
그 바람에 할아버지의 비옷이 크게 풀럭거렸다.
실눈을 뜨고 지켜보던 태건이 멈칫했다.
“저, 저거 사람 다리 아니야?”
그 소리에 이지성이 면박을 줬다.
“그럼 저게 다리지, 대교냐!”
“다시 봐요. 다시!”
“다시 봐도 다리……. 허리에 두 다리?”
이지성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때였다.
풀러럭!
계속 몰아치는 돌풍에 비옷의 똑딱 단추가 풀어진 모양이다.
할아버지의 어깨까지 단숨에 드러났다.
“어어?”
“저, 저!”
다들 말을 온전히 내뱉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등에는 어린아이가 업혀 있었다.
동시에 발견한 모두가 일제히 손을 뻗었다.
“저기!”
“아이잖아!”
“애가 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악천후에, 그것도 아이를 업고 침수된 다리를 건너려 한다.
어떻게 봐도 이상했다.
태건은 순간 뭔가 직감이 왔다.
“애가 아픈가?”
“뭔 소리야. 이 날씨에 아프면 안전한 곳에 있어야지!”
“그러니까요……. 어?”
갸웃하던 태건이 멈칫했다.
쿠르릉.
뭔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쪽으로 물이 구조물에 부딪쳐 온몸을 덮치고 말았다.
쏴아아.
거센 물살이 순식간에 할아버지 모습을 지웠다.
“뭐야!”
“어? 할아버지!”
모두의 눈이 빠져라 크게 떠졌다.
잠시 후.
다행히 할아버지는 난간을 악착같이 붙은 채 몸을 낮췄다.
그르륵.
멀리서 봐도 다리가 곧 부서질 듯한 모습이다.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단 증거였다.
태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아무래도 다리에 문제가 생긴 거 같습니다!”
“저 유속에 문제가 없으면 그게 정상이냐!”
고수현의 반사적인 외침에 일순간 모두가 멈칫했다.
“…….”
갑자기 찾아온 정적.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모두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다.
이대로 지켜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니 마음도 수십 배 더 급해졌다.
그 침묵을 황대산이 먼저 깼다.
“유중헌, 고도 내려!”
“안 된다니까. 이 곰 같은 선배야!”
“내리라면 내려, 짜샤!”
“누군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냐고!”
유중헌의 반발이 너무도 거셌다.
그때 태건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중헌 선배.”
이름만 불렀다.
그러나 유중헌은 같은 대화의 반복인 줄 알았는지 소리부터 쳤다.
“안 된다니까, 지금 고도를 내리면 잠깐은 버티겠지. 그렇게 억지로 버티다가는 결국 뒤집어져!”
“바로 그겁니다.”
“……뭐?”
휙!
유중헌이 놀란 얼굴로 얼른 뒤를 돌아봤다.
태건은 강한 분위기를 풍기며 방금 한 말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 살릴 수 있죠?”
“그거야 고도도 낮고 추락해도 살긴 하겠지.”
“까짓것 뒤집어지고 말죠. 헬기가 죽지, 사람이 죽습니까?”
“너, 너……. 진심이냐?”
“왜요. 미국 가자며요?”
태건의 반문이 유중헌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띵!
순간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어서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들어올렸다.
“큭큭. 그러네.”
“사람 목숨보다 귀한 건 없다. 그렇죠?”
“아무리 그래도 그런 미친 계획을 세우다니. 너 진짜 물건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싱긋.
태건이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