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지성이 보낼게.”
뚝.
그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태건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굳은 입꼬리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바로 그때였다.
조금 먼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시고 내려가!
-으아아아! 이혜진아, 꼬물아!
-여기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내려가셔야 합니다. 얘들아, 조심히 모셔라.
-안 돼, 안 돼! 으아아악!
박종민의 절규가 점점 멀어져갔다.
대화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훤히 그려졌다.
그의 절규가 태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푸우우.”
건강하게 다시 만나기 위해, 지금은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곧 무전기에서 오광휘 단장의 침착한 지휘 소리가 들려왔다.
-띠릭. 다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라텔 단장 오광휘입니다.
-띠릭. 포클레인 한 대는 제일 윗집으로.
-띠릭. 한 대는 반대쪽으로. 거기 왜 안 움직……. 저 아저씨 또 저러네. 에이, 진짜.
그 사이 태건은 이혜진 씨 주변을 정리했다.
무턱대고 건드리면 안 된다.
이지성이 도착했을 때 살펴보기에 최적의 상황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릉, 휙.
좁은 공간이지만 이리저리 움직여 조금 넓게 만들었다.
태건이 특히 조심한 건 토사였다.
돌멩이 하나 잘못 빼도 우르르 무너질 수 있었다.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리고 또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임산부가 기절한 채 축축한 바닥에 방치되어 있었다.
산모는 물론, 태아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책부터 강구해야 했다.
“뭐 없나?”
슥슥.
둘러봤지만 부엌이라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었다.
게다가 온통 진흙으로 범벅이었다.
행주 하나도 감염위험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때 플래시로 빛나던 휴대폰이 울렸다.
그나마 휴대폰이 터져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띠링.
액정 메신저 창과 고수현 이름이 떠올랐다.
“뭐지?”
톡.
휴대폰을 두드리자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쥐 파먹은 개발지역의 사진이었다.
마치 아이스크림의 귀퉁이를 듬뿍 퍼낸 듯한 모습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나무뿌리들.
다져지지 않은 대지.
그 모든 게 산사태의 원인으로 보였다.
“이런 미친!”
태건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개발 중인 비탈길이 무너지며 윗부분에도 영향을 끼쳤다.
지지할 지반이 약해진 거다.
이번에 무너지면 앞선 산사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력을 보일 터였다.
금산T타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몰랐다.
“젠장.”
주민들의 재산을 지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보다 생명, 그 자체가 위험했다.
태건은 신경질적으로 고수현에게 연락했다.
띠리릭.
고수현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봤어? 이거 내가 봐도 심각해 보여.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무너지면 끝장납니다.”
-막을 방법 있어? 아니, 막아야 돼.
고수현의 목소리가 다급하면서도 비장했다.
태건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최대한 다양한 각도로 사진 찍고 얼른 내려오십시오.”
-누군가는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
“무너지면 휩쓸리는 건 순식간입니다.”
태건은 심각성을 알렸다.
그런데 고수현은 의외의 강단을 보였다.
-에이씨. 여기서 끝나나 저기서 끝나나. 어차피 맞을 매라면 차라리 먼저 맞는 게 좋더라.
“정말 거기 계시겠다고요?”
“자연에 맞선 지상 최강의 소방관이란 타이틀도 좋잖아. 후우. 간 떨리네.”
다부진 각오 끝에 살짝 흔들리는 마음이 흘러나왔다.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라텔이라고 해도 본능적인 두려움이 없을 순 없었다.
태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말…….”
“태건아, 뭘 더 물어?”
고수현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그 나름대로 각오를 굳힌 모양이었다.
태건은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 차라리 고수현을 활용하기로 했다.
“전조 증상으로 땅이 조금씩 갈라질 겁니다.”
-헙, 크흠. 음. 그 다음은.
“돌 부스러기가 굴러떨어지면 다 내팽개치고 튀세요. 그 타이밍 놓치면 안 됩니다.”
경고를 한 태건은 전화를 끊었다.
빈손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말하면서도 다른 손은 무전기를 다시 들었다.
무조건 오광휘 단장에게 알려야 했다.
곧 오광휘 단장의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무슨 일인데!”
“그게…….”
막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위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맞아? 아, 맞네.”
스윽.
안 그래도 흐린 하늘인데 그림자가 졌다.
올려다 보니 이지성의 얼굴이 구멍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역시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조심스레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그 신중함이 지금은 다행이었다.
태건은 오광휘 단장에게 짧게 말했다.
“수현 선배하고 연락 한 번 하십시오. 꼭 하셔야 합니다.”
뚝.
용건은 짤막하게 끝냈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근처에 세워둔 식탁을 비쳤다.
팟.
“벽 짚고 뒤로 내려오십시오.”
“차라리 올리는 게…….”
이지성이 의견을 내려 했다.
태건은 여러 말 하지 않았다.
스윽.
플래시를 돌려 이혜진 씨를 비쳤다.
동시에 이지성의 말이 쏙 들어갔다.
임산부의 부상.
절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 기다려.”
이지성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곧 이지성이 부엌으로 내려왔다.
푸스스.
움직임에 따라 토사가 일부 무너졌지만 다행히 큰 위험으로 번지지 않았다.
다가온 이지성은 구급 가방부터 펼쳤다.
촤악.
필요한 걸 하나씩 챙기는 와중에 슬쩍 한 마디 꺼냈다.
“박종민 씨에게는 안정제 하나 놔줬어.”
“그 정도였습니까?”
“황 선배 기동복이 찢어질 정도였지.”
“쯧.”
태건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곧 태건은 주변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제는 응급처치를 해야 할 때다.
‘이 분이 오늘 마지막 구조자이길.’
진심을 담아 빌었다.
그 사이 이지성이 이혜진 씨의 옷을 걷었다.
펑퍼짐한 치마라 조금만 걷어 올려도 충분했다.
슥슥.
하얀 허벅지에 기다란 상처가 드러났다.
휴대폰으로 비추던 태건이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쓸고 지나간 거 같네요.”
“대충 손가락 한 마디 이상. 상처도 문제인데 물에 불어서 지혈이 될까 몰라.”
“일단 소독부터 하죠.”
슥슥.
태건과 이지성은 자신의 손부터 소독했다.
휴대폰은 진즉 토사에 각도 맞춰 올려뒀다.
이 순간엔 손이 자유로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잠깐 사이 이혜진 씨의 허벅지까지 소독이 됐다.
그리고 이지성이 앰풀을 들어 주사기에 담으며 말했다.
“진통제부터 투여해야겠어.”
“잠시만요. 그거 태아에 문제없는 겁니까?”
“어? 그, 그게…….”
이지성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도 확신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그런 그에게 물었다.
“자격증 취득할 때 그런 건 안 배웁니까?”
“기다려 봐. 나도 지금 생각 중이잖아.”
“병원에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태건은 생각하는 시간까지 줄이려 방법을 제안했다.
그때 갑자기 땅이 진동했다.
구구구.
진동을 느낀 태건과 이지성이 바짝 긴장했다.
“이거 설마 산사태?”
“그거 진짜였어?”
이지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태건은 편하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수현 선배가 연락을 왜…….”
의아함이 짙어질 때였다.
기이잉.
육중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태건이 아차 하며 말했다.
“포클레인이 올라오는 모양입니다.”
“뭐야. 하, 이상한 걸로 긴장시키지 마라.”
“곧 나갈 거니까 나가서 말씀하시죠.”
태건은 당장의 말다툼을 뒤로 미뤘다.
그건 이지성도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촤락.
접이식 들것을 빠르게 펼치며 말했다.
“이혜진 씨부터 들것으로 옮기자.”
“물론입니다.”
태건은 곧장 합류했다.
포클레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동시에 땅의 진동도 커져갔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두두둑. 두둑.
낯선 소리가 울렸다.
이혜진 씨를 들것에 고정시키던 태건이 멈칫했다.
“이거 무슨 소리지?”
“빨리 확인해 봐.”
“안 그래도……. 어라, 아니, 이건!”
태건의 목소리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지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재빨리 물었다.
“또 뭔데!”
“저기!”
휙.
태건이 구멍을 가리켰다.
성인 남성이 통과할 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서서히 좁아지고 있었다.
그 원인이 더 큰 문제였다.
기기긱.
벽이 쓰러지고 있었다.
포클레인이 수 톤의 무게로 만들어낸 울림 탓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자칫하다 벽이 무너질 수 있었다.
턱.
재빨리 무전기를 뽑아든 태건이 부리나케 외쳤다.
“스톱, 포클레인 멈춰!”
-띠릭. 오 단장이다, 강태건이냐!
“단장님, 벽 무너집니다. 당장 멈춰야 합니다!”
그 외침에 오광휘 단장 목소리도 사색으로 돌변했다.
-띠릭. 거기 위에 포클레인 동작 그만!
그런데 한 박자 늦은 모양이다.
쿵.
충격으로 반파된 벽이 급속도로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