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포클레인, 멈추라고!”
-띠릭. 손대지 마. 손모가지 날려버리기 전에!
태건과 오광휘 단장의 다급한 무전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포클레인 기사는 이제 상황이 파악된 모양이다.
순간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제야 태건과 이지성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휴우.”
“하아.”
그런데 안심하긴 일렀다.
무심코 구멍을 본 태건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젠장!”
“저게 뭐야!”
이지성도 목소리를 높였다.
주먹 하나 크기로 좁혀져 있었다.
그만큼 벽이 기울어져 공간이 확 좁아졌다.
탈출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움직이기 불편한 상황에 이르렀다.
거기다 설상가상의 일까지 벌어졌다.
미간을 꿈틀거리던 이혜진이 깨어난 거였다.
“으으음. 여기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놀람을 감추고 의식 레벨부터 확인했다.
“특수소방단 강태건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저, 우……. 이혜진이요.”
“이혜진 씨.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태건이 묻자 이혜진이 편두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끄으으. 으으. 갑자기 벽이 무너지고……. 아, 쓰읍. 아아!”
갑자기 고통스러워했다.
감각이 돌아와 허벅지 통증이 느껴지는 거였다.
사실 보통 사람이 맨정신으로 버틸 고통이 아니다.
태건은 어쩔 수 없이 이지성에게 말했다.
“선배, 진통제.”
“그러니까 내가 주사부터 하자고 했잖아!”
이지성은 구박하며 주사기를 다시 들어올렸다.
그 주삿바늘이 이혜진의 허벅지로 향했다.
그걸 본 이혜진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아아, 안 돼요!”
“…….”
우뚝!
이지성이 반사적으로 멈췄다.
태건은 그녀가 왜 멈추게 했는지 눈치채고 설득했다.
“이거 맞아야 버틸 수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끄으으으.”
“조금, 아주 조금만 주사하겠습니다.”
“흐으!”
절레절레.
이혜진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저었다.
그런 그녀는 두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 위치는 고통스런 허벅지가 아니라 불룩한 배였다.
역시 태아의 악영향을 더 우려하고 있었다.
태건은 솔직히 답답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떤 심정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모성.
그건 태건과 이지성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응급처치의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팡, 팡.
압박붕대를 펼쳐 보여주며 설득했다.
“이혜진 씨, 이걸로 꽉 조이겠습니다. 그건 괜찮지 않습니까.”
“으으으. 그, 그거.”
“네. 압박붕대요. 대신 소독하고 소염제 바르고 감을 겁니다. 바르는 연고는 그나마 괜찮잖아요.”
태건은 두 번, 세 번 강권했다.
정말 최소한의 응급처치였다.
이혜진은 그 아픔 속에서도 상황을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끄응. 할게요.”
“좋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
끄덕.
고갯짓을 한 이혜진이 억지로 응급처치를 허락했다.
태건과 이지성은 순식간에 손발을 맞춰 응급처치를 진행했다.
촤악, 휙휙.
“…….”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응급처치가 마무리됐다.
티격태격해도 결정적인 순간엔 확실히 호흡이 좋았다.
이혜진도 처음보다는 고통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구겨진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눈동자가 진동했다.
“헙!”
눈앞에 보인 현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최악이었다.
태건도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처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운을 뗐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안 좋은 상황인 거 압니다.”
“……허읍!”
“억지로라도 침착하셔야 합니다. 너무 격한 동요나 흥분은 지금 혜진 씨와 아이에게 좋지 않습니다.”
태건은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현실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동요를 줄여줘야 한다.
그렇게 태건은 이혜진이 느낄 공포와 혼란을 덜어주려 노력했다.
이혜진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진정돼갔다.
“후우우. 후우우우.”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써 노력하고 있었다.
“…….”
태건과 이지성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나름 수월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던 그때 이혜진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헉!”
태건과 이지성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또 뭔데요!”
이혜진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말했다.
“야……. 양수가 터진 거 같아요.”
“네에?”
휙!
동시에 시선을 내렸다.
.......
출산이 임박했단 신호다.
그게 스트레스성 조산인지, 아니면 정상적인 출산인지는 논외였다.
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출산은 어불성설이었다.
태건과 이지성이 동시에 경악했다.
“허억!”
“안 돼!”
비상사태다.
그것도 1급 아니, 특급 비상사태다.
태건은 재빨리 무전기를 누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단장님, 대응 3단계. 애 나옵니다!”
-띠릭. 갑자기 대응……. 애, 애가 나와? 대응 3단계 발령. 죄다 저 윗집으로 집합!
오광휘 단장의 목소리도 다급해졌다.
그렇게 상황이 한 치 앞도 판단할 수 없게 급변을 거듭했다.
태건은 재빨리 휴대폰 플래시로 사방을 비췄다.
휙휙.
“뭐라도 있어야 되는데, 뭐라도…….”
흠뻑 젖은 산모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흘러내린 토사, 그리고 엉망이 된 주방용품이 전부였다.
뭔가 필요한 게 없다는 현실이 마음을 더 급하게 했다.
“이런. 음?”
턱.
갑자기 어깨를 짚는 손길에 태건이 흠칫 놀랐다.
돌아보자 이지성이 어딘가에 연락하면서 눈짓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슥.
이지성은 이내 휴대폰을 내리자마자 아주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혜진에게 말했다.
“양수가 터졌다고 바로 출산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랍니다.”
“네. 진통이 오기 시작해야 된다고 들었어요.”
이혜진이 긴장된 얼굴로 대답하자 이지성이 친절하게 부연 설명에 나섰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만 평균적으로 양수가 터지고 서너 시간은 지나야 한다네요.”
“저도 그렇게……. 흐음. 알고 있어요.”
대답하는 이혜진은 허벅지에서 아픔이 이는지 살짝 인상을 구겼다.
그 외에는 이런 상황에 비해 상당히 침착해 보였다.
일순간 다급한 분위기가 약간이나마 반전되며 세 사람 모두가 약간의 여유를 찾았다.
이지성은 그제야 태건에게 한 마디 톡 쏘았다.
“침착하라면서 네가 호들갑 떨면 어쩌자는 거야.”
“그, 그럼 진작 좀 말씀하시던가요.”
“난 뭐 알고 있었냐.”
이지성이 툭 말하자 태건이 머쓱해 하며 시선을 돌렸다.
“크흠.”
“됐고, 일단 좀 더 마른 데로 옮겼으면 좋겠는데.”
“그건 식탁 위가 좋을 거 같습니다.”
태건은 살펴본 걸 바로 알렸다.
이지성도 동감인 모양이다.
“그게 좋겠어.”
“일단 그거부터.”
턱, 턱.
태건과 이지성은 의견이 합쳐지자 바로 들것을 들어올렸다.
식탁 위도 깨끗하진 않았다.
그나마 태건이 행주로 나름 깔끔하게 닦아 바닥보단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터억.
“허윽!”
들것을 식탁에 올리자 이혜진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태건은 그 소리에도 깜짝 놀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 괜찮……. 아니요.”
이혜진의 일그러진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태건은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확인했다.
슥.
압박붕대가 젖어 있고, 군데군데 흙도 묻어 있었다.
‘이거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압박붕대를 새로 갈아야 할 거 같았다.
“선배, 한 번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슥슥.
둘 다 허리를 굽혀 새로운 압박붕대를 준비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하으윽……. 아악!”
이혜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태건과 이지성이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 순간 태건의 기동복 뒷덜미를 무언가 잡아챘다.
꽈악!
“켁, 목, 목이…….”
태건은 순간적으로 목이 졸려 괴로움을 토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반복된 비명이었다.
“하아악!”
이혜진이 너무도 큰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어.”
태건은 뒷덜미를 잡힌 그대로 엉거주춤 몸을 세웠다.
그제야 그녀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태건 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른 손으로 배를 감싸 쥐고 있었다.
허벅지가 아니다.
얼떨떨하던 태건의 두 눈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혜진 씨, 이혜진 씨.”
“흐으으으. 아으으.”
재차 불렀지만 이혜진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신음만 흘렸다.
꽈악.
태건의 뒷덜미를 잡은 손이 더욱 강하게 움켜쥘 뿐이었다.
태건은 억지로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크윽.”
목이 조여 오는데도 꾹 참았다.
이혜진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하는 행동이다.
사람이 아프면 뭔가를 잡기 마련이다.
그런 마음으로 버텼다.
괜찮을 거라더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흐으으.”
스륵.
뒷덜미를 잡은 이혜진의 손이 약간 느슨해졌다.
그 순간 태건이 재빨리 불렀다.
“지성 선배!”
“시꺼, 다시 전화 중이야……. 네, 방금 전화했던 소방관입니다. 괜찮을 거라서요! 그런데…….”
통화 상대에게 조목조목 따지는 이지성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지직!
뭔가 크게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가까이서 들렸다.
“또 뭐가…….”
휙!
휴대폰 플래시를 얼른 소리 난 쪽으로 비쳐봤다.
기울어진 부엌 벽 쪽이었다.
상부 수납장이 데롱데롱 매달려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이, 이런!”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태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저 놀라고 말 상황이 아니었다.
투둑, 투두둑!
이상한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