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 사이 태건이 우석진 정책과장에게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습니다만, 왜 아직도 소방병원이 없는 겁니까?”
투둥.
순간 다들 멈칫했다.
“에?”
“어?”
태건의 기습 질문에 단원들 모두 당황했다.
소방관들 사이에선 민감한 안건이었다.
그래서 힐끔거리며 우석진 정책과장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 이유를 우석진 정책과장이 직접 말했다.
“몇 번 기획이 됐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지.”
“소방관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 겁니까?”
“흐음.”
끄덕.
우석진 정책과장은 쓴 표정으로 고갯짓했다.
태건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사실 모르지 않았다.
일전에 특별감사에서 목청 높여 성토하기도 했었다.
지금 다시 언급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저희만 특혜 받는다고 생각하니 죄송해집니다.”
“크흐흠.”
“과장님 난처하시라고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그 점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태건은 숨통을 조금 열어줬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그제야 넥타이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뭐,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또 하고 싶은 말이 남았나?”
우석진 정책과장이 은근히 긴장했다.
다시 숨통이 꽉 조여지는 모양이었다.
“…….”
다른 단원들도 눈치만 볼 뿐이었다.
감히 대화에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이번엔 태건의 표정도 범상치 않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곧 운을 뗐다.
“이번에 아프면서 절실히 느낀 겁니다.”
“뭔데 뜸을 들이나.”
“더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팍팍 입원하죠, 뭐.”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뚝 끊어져 버렸다.
그만큼 우석진 정책과장이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뭐, 뭐라고?”
“출동하고, 입원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위에서 보기에 소방병원 짓는 예산이 더 싸게 먹힌다 생각할지도 모르잖습니까.”
“……하하하. 그거 말 되네.”
그는 어이없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속없이 대답한 건 아니었다.
눈빛이 깊어지는 게 그 증거였다.
태건의 건의 사항에 대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 후로는 우석진 정책과장이 이것저것 질문했다.
“첫 출동에 있어 부족한 점은 없었나?”
“따로 필요한 건?”
“지역 소방관들의 협조는 원활했나?”
예상보다 훨씬 다방면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오광휘 단장을 시작으로 모두 느낀 점을 최대한 진솔하게 답했다.
그렇게 이번에도 원래 방문 목적과 달리 간담회로 흘러갔다.
한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우석진 정책과장이 옥상정원의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종이컵을 든 태건이 다가섰다.
“여기 고급 밀크커피입니다.”
“자판기 커피라고 하면 될 걸 거창하긴……. 흐음. 따뜻하니 좋군.”
후릅.
우석진 정책과장은 뜨끈한 커피가 들어가자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 사이 태건이 옆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날씨가 어째 스산한 걸 보니 또 쏟아질 거 같습니다.”
“……재밌어.”
“갑자기 뭐가요?”
태건이 갸웃하며 물었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가늘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자네와 이렇게 편안하게 차 한 잔 마시는 날이 올 줄은 몰랐거든.”
“앞으로 이런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겠습니다.”
태건은 넉살 좋게 답했다.
슬쩍 바라본 우석진 정책과장이 흘려 말했다.
“통통 튀는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으니…….”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어깨가 가볍습니다.”
“그렇군. 난 아까 자네가 소방병원을 언급할 때 좀 당황스러웠어.”
후릅.
우석진 정책과장이 덤덤히 말하고는 커피를 마셨다.
태건은 종이컵을 매만지며 답했다.
“저희에게는 희망이기도 하니까요.”
“알지. 일선의 소방대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나도 알지.”
“저희가 더 열심히 구하면, 그러면 분명 길이 열릴 겁니다.”
태건이 라텔의 활약을 강조해 말했다.
우석진 정책과장도 그 부분에 있어 많은 고민을 했는지 바로 말했다.
“여론이 형성된다면,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저는 저희 라텔 뒤에 6만 소방대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한 명당 1만 명이겠네요. 그렇다고 그분들을 대표한단 건 아닙니다.”
태건이 적당히 말을 자르자 우석진 정책과장이 반응했다.
“그럼?”
“발판이 되고 싶습니다. 그분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발판이요.”
“그렇군……. 흐음. 그래…….”
꾸욱.
우석진 정책과장이 종이컵을 깊게 쥐며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
후릅.
태건은 방해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잠시 기다렸다.
곧 우석진 정책과장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혹시 금산소방서에서 현장 소식 들은 거 있었나?”
“아니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다니. 난 들은 말이 있는 줄 알았지.”
“무슨 말씀이신지…….”
태건은 갸우뚱했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돌연 진하게 미소 짓더니 다른 말부터 건넸다.
“의사 소견으로는 퇴원까지 이틀, 그리고 며칠은 더 요양하는 게 좋다더군.”
“그렇긴 합니다만.”
“그 몸 이끌고 출동하겠단 말은 마.”
그가 딱 잘라 말했다.
태건은 슬쩍 몸을 움직여봤다.
욱씬.
‘크으으.’
역시 근육이 뻣뻣하고 통증이 일었다.
억지로 출동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때 우석진 정책과장이 말했다.
“잠시 한숨 고르고 갈 때가 됐어. 그렇게 알도록.”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놀지 말고, 병상에 누워서 스피치 연습이나 해.”
“스피치요?”
태건은 뜬금없는 말에 갸웃하며 물었다.
우석진 정책과장은?
“후후.”
낮게 웃음 짓기만 했다.
이후 대화 없이 커피만 홀짝거렸다.
우석진 정책과장이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잠시 후 병원 현관.
우석진 정책과장이 떠나갔다.
부웅.
관용차가 저만치 멀어지자 태건은 경례를 내렸다.
“끝까지 말 안 해주고 가네.”
대체 스피치 연습이 뭘 의미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배웅을 마친 태건이 병원 로비에 들어섰다.
금산에서 가장 큰 병원답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저벅저벅.
태건은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같은 병원이지.’
요구조자들도 여기 있다.
어떻게 됐을까.
잘 치료 받고 있을까?
잠깐 만남이지만 생사를 함께 오간 탓인지 신경이 쓰였다.
‘가보면 되지.’
쿨하게 결정 내렸다.
태건은 결심대로 움직였다.
우선 찾아간 의과는 신장내과였다.
간호사에게 사정을 말하자 집중치료실로 안내받았다.
척.
곧 태건은 커다란 창문 앞에 섰다.
그 창문으로 여러 환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태건은 저 멀리 있는 어느 병상을 지그시 바라봤다.
-홍지영, 여아, 5세.
바로 홍지영의 병상이었다.
윙, 윙.
병상 옆에서 혈액투석기가 돌고 있었다.
태건이 지금 볼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녀석.’
밝은 아이가 저렇게 누워 있으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투석 시간이 지체된 데다, 찬 곳에 오래 있었던 게 역시 문제를 야기했다고 들었다.
그래도 생명의 위험은 없다고 했다.
다만 며칠 집중치료를 받아야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태건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살펴볼 때였다.
옆에 30대 후반의 남녀가 섰다.
비슷한 분위기가 부부처럼 느껴졌다.
곧 여자가 유리창을 짚으며 깊은 안타까움을 내보였다.
“지영아. 하아.”
그 소리에 태건의 귀가 쫑긋 섰다.
‘홍지영의 부모?’
힐끗.
슬쩍 보니 두 사람 얼굴에서 홍지영이 엿보였다.
애를…….
순간 울컥함이 솟구쳤다.
그때 남편이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잘 이겨내고 있어. 어제 면회할 때도 씩씩하게 웃어줬잖아.”
“하아. 며칠 놀다 온다고 할 때 말렸어야 했는데.”
“행여나 장인어른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그리고 탓을 하려면 우리를 탓해야지.”
남편은 아내를 듬직하게 보듬었다.
바로 옆에서 오간 대화였다.
단편적이지만 홍지영과 할아버지의 소식을 모두 들었다.
무엇보다 홍지영의 부모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뭐.’
내심 수더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태건은 이내 몸을 돌렸다.
이제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아내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런데 금산소방서에 전화해 봤어요?”
“응. 특수소방단이라고, 여기 병원에 입원한 거 같다던데.”
“간호사분들께 부탁해서 얼른 좀 찾아봐요. 이렇게 입 닦는 건 아니잖아요.”
“장인어른 뵙고 찾아볼게. 꼭 찾아야지.”
잔잔한 대화가 오갔다.
그들만 잔잔했다.
태건의 눈동자는 벌써 진동하고 있었다.
‘찾아온다고?’
굳이 그럴 거까지야.
슥슥.
태건의 발걸음이 갑자기 바빠졌다.
‘간호사실, 간호사실.’
먼저 찾아가 선수 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태건은 정말 간호사실에 도착해 부탁했다.
“간호사님, 혹시라도…….”
“죄송한데 그건 안 되겠는데요.”
“네?”
“저라도 절대 그냥 못 넘어갈 거 같아요. 제가 꼭 알려드릴게요. 호호.”
간호사는 환하게 웃으며 태건의 부탁을 묵살했다.
참 보기 좋은 미소였다.
그러나 태건의 눈엔 간호사 머리에 뿔이 빗보였다.
결국 태건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몸을 돌려야 했다.
잠시 후.
태건은 다른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푸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1인실이었다.
병상엔 산모인 이혜진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면회를 허락받고 온 길이다.
태건이 먼저 기쁜 소식에 대해 말했다.
“순산 축하드립니다.”
똑, 똑.
이혜진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으며 울먹였다.
“어제 저희 때문에…….”
“아무 생각 마시고, 아기에게…….”
태건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 만남은 짧게 마무리 지었다.
소방관을 가까이 봐서 좋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