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잠시 후.
뻐엉!
자그마한 운동장에 축구공이 높이 떠올랐다.
아이들 모두가 그 공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오광휘 단장과 태건이 가장 앞섰다.
“저쪽이다!”
“우와와!”
그리고 또.
뻥!
“이번엔 저기다!”
“와아아!”
우르르.
아이들 축구라는 건 원래 공 따라 달리는 게 정석이었다.
골키퍼를 보던 황대산이 갸웃거렸다.
“그런 단장님하고 태건이는 왜 뛰는 거야?”
그것만큼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바탕 뛰어 논 후엔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짜장면과 탕수육이었다.
“아구아구. 맛있어요!”
“탕수육이 제일 좋아요!”
짜장을 얼굴 가득 묻힌 아이들이 찬사를 외쳤다.
태건과 단원들은 그런 아이들을 곳곳에서 챙겼다.
“입 좀 닦자.”
“싸우지 말고.”
“단무지 부족한 사람.”
슥슥.
아이들 사이사이를 오가는 그들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 걸렸다.
‘즐거워.’
태건은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은 거 같았다.
무엇보다 고수현의 동생들이라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고아원 방문 후에는 과수원으로 향했다.
컹, 컹컹!
멀리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엔 민가가 보이지 않아 민원 걱정은 없어 보였다.
“이야, 예상보다 더 넓네.”
“주인아저씨가 때 되면 동생들 불러서 일감 주시고 용돈 챙겨 주십니다. 저도 신세 많이 졌죠.”
고수현은 친분관계에 대해 말했다.
태건은 바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상부상조라. 최고지.’
서로 윈윈하는 방법일 터였다.
이내 과수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개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휘이잉.
썰렁한 과수원 모습이 예상과 너무 달랐다.
눈을 끔벅이던 오광휘 단장이 물었다.
“짖는 소리만 들리고, 왜 애들은 없냐?”
“글쎄요.”
태건도 처음 방문이라 영문을 몰랐다.
이지성이 단원들을 쭉 둘러보고는 밖을 가리켰다.
“나가요. 애들 겁먹은 거 같으니까.”
“에엥?”
“지들 던지고 팬 인간들이 우르르 왔는데 겁 안 먹겠습니까.”
이지성이 뚱하니 바라봤다.
그 말이 전혀 억측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핸들러 경험으로 알아챈 태건이 모두를 밖으로 안내했다.
“지성 선배 말대로 나가시죠.”
“진짜 나가?”
“우리가 나가야 애들이 나타난다고?”
갸웃거리며 태건을 따라 다들 밖으로 나갔다.
이내 울타리 안엔 이지성만 자리했다.
“쭈쭈쭈.”
자세를 낮추고 부르는 소리를 냈다.
곧 슬금슬금 개들이 나타났다.
라텔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울타리 밖인 걸 인지하고는 마저 다가왔다.
헥헥. 살랑살랑.
이지성 주변에 모여 혀를 내밀고 꼬리쳤다.
몇 번 봤다고 경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개들은 얼마나 잘 먹었는지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털에 윤기가 가득 흘렀다.
공격성 따윈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든 게 일전에 방송으로 본 모습과 또 달랐다.
얼마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는지 넓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개들에겐 그만큼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밖에서 지켜보던 태건이 나지막이 말했다.
“뭐 더 볼 거 있습니까?”
“없지. 괜히 위화감 조성하지 말고 뒤에서 기다리자.”
스윽.
오광휘 단장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젠 어딜 봐도 들개라고 볼 수 없는 모습에 극히 만족했다.
곧 라텔은 과수원 근처 오두막에 자리했다.
오광휘 단장과 농장주인이 대화중이었다.
“……그랬단 거 아닙니까. 하하.”
“허허!”
변죽 좋은 오광휘 성격 덕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오두막엔 저장 사과가 한 가득이었다.
우적우적.
다 같이 맛있게 먹으며 잠시 여유를 즐겼다.
“시골은 역시 이런 맛이 있어.”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인심과 한적함이지요.”
“으샤샤.”
벌러덩.
길게 누워 망중한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던 중 태건의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
이강찬 기자의 문자였다.
각종 링크들이 주르륵 이어져 있었다.
“이거 설마?”
톡.
태건이 반신반의하며 아무 링크나 눌러봤다.
역시 고수현의 개인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인터넷 기사, 개인방송 플랫폼 등등.
꽤 다양한 미디어에 기사나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이강찬 기자, 신의가 있네.”
약속한 그대로 실천해줬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기사나 영상을 본 사람이 적단 부분이었다.
그건 라텔의 인지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뉴스에 소개됐다고 해도, 이제 갓 태어난 신생 소방단이다.
인지도를 따지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에 대해서 태건은 뒤집어 생각했다.
“올라갈 일만 남았단 거잖아.”
얼마나 좋은가.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앞만 보면 된다.
이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더 멀리 뛰기 위해선 잠시 움츠릴 줄도 알아야 했다.
지금이 그때였다.
늦은 오후.
라텔은 떠날 준비를 했다.
그 사이 아이들과 정이든 모양이었다.
손을 잡거나, 안아들거나.
그렇게 거리낌 없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다음에 또 올게.”
“그때까지 아빠 신부님, 엄마 수녀님 말씀 잘 듣고.”
슥슥.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단원들 모두 미소 짓고 있지만 마음은 무거워 보였다.
“흑흑.”
“히잉.”
아이들도 정들었는지 눈물을 보이거나 아쉬움의 떼를 부리기도 했다.
이내 승합차에 모두가 올라탔다.
그 중 고수현은 아이들과 같이 서서 배웅 중이었다.
“저는 여기서 머물다가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여기저기 소문 많이 내놨다니까 연락도 한 번 기다려 봐.”
오광휘 단장이 가볍게 미소 띠며 희망을 말했다.
같은 시각.
태건은 반대쪽 창문을 열고 누군가와 대화중이었다.
그 상대는 이지성이었다.
태건이 먼저 물었다.
“선배도 여기 계신다고요?”
“한적하고 좋잖아.”
“집에 한 번 가보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태건의 질문에 이지성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내가 알아서 해.”
더 묻지 말란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태건도 그렇게까지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뭐, 그러시겠죠. 그럼 복귀 날 뵙겠습니다.”
“그래……. 다들, 잘 가요.”
삭막한 이지성의 인사에 선배들 모두 그런가보다 했다.
“그래. 간다. 잘 살아라.”
“그런 걱정까지야 뭐.”
“하여간 저 주둥이……. 유중헌이, 출발하자!”
오광휘 단장의 말과 동시였다.
부웅.
승합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점점 증평고아원이 작아질 무렵, 태건이 차분하게 한 마디 건넸다.
“휴가 첫날을 잘 보낸 거 같습니다.”
“의미 있게 보냈지. 봉사활동이 아니라 진짜 애들하고 같이 놀았으니까.”
오광휘 단장의 말을 황대산이 받았다.
“수현이가 단체생활이나 숙소생활에 익숙한 부분도 이젠 이해가 됩니다.”
“으스대는 거 같은데도, 결정적일 땐 주변을 둘러보는 이유도 알겠고요.”
태건이 덧붙여 말했다.
오늘 이 시간이 고수현을 이해하는데 확실히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덕분에 즐거웠어.’
오랜만에 다시 동심을 느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부웅.
유중헌이 운전하는 승합차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우면 훈련장에 도착한 건 저녁 무렵이었다.
“밥 먹고 자자!”
“휴가는 그게 최고죠!”
짤막한 목소리만 가득 들려왔다.
그리고 우면 훈련장은 일찌감치 어둠으로 물들었다.
다음날.
강원도 횡성군의 어느 시골 정류소 앞.
부웅.
마을버스가 떠나갔다.
그 자리엔 주렁주렁 짐을 든 태건이 서 있었다.
“집 한 번 가기 힘드네.”
아침 일찍 준비해 도착한 길이다.
그럼에도 아직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할 일이 남았다.
산길로 향하던 태건은 뭔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엇!”
파르르.
눈동자가 일순간 심하게 진동했다.
그건 산길 초입에 걸린 플래카드 탓이었다.
-우리 마을의 자랑, 특수소방단 강태건.
저게 뭐람.
태건은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며 화끈거렸다.
“아니, 저걸 왜……. 도대체 왜…….”
너무 황당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을 어른들이 뉴스를 봤음이 너무도 강렬하게 와 닿았다.
태건의 두 다리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가는 길에 어른들 뵐 텐데…….”
무슨 소리를 어떻게 할지 상상조차 불가했다.
머릿속이 텅 빈 거 같았다.
그런 황당함을 느낄 때였다.
부웅, 끽.
낯익은 차가 산길에 진입하다 멈춰 섰다.
이내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여기서 뭐하냐?”
“엥? 형?”
태건은 갑자기 등장한 강태영 모습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놀람도 잠시였다.
“아싸!”
산길을 편하게 올라갈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덜컥.
차문이 열리지 않았다.
태건은 아주 당연하게 요구했다.
“뭐해. 문 따.”
“내 차지, 니 차냐?”
“어차피 집에 가는 거 편하게 좀 가자.”
“노노. 그럼 빠이.”
강태영은 정말 그냥 올라가려 했다.
태건은 여러 말 하지 않았다.
“잘 생각해.”
“아주 협박이 생활이냐? 그럴 거면 이자 뱉어, 인마.”
“누가 이자 타령해? 형이 혼자 올라간 후의 일을 생각해 보라는 거지.”
태건은 승기의 미소를 가득 뿌렸다.
반대로 강태영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철컥.
“울 엄마 눈치 만 단인데. 에잉, 그냥 못 본 척 지나갔어야 하는 건데.”
“그건 이미 늦었고……. 어이구, 편하다.”
부스럭.
태건이 조수석에 타자 강태영이 투덜거렸다.
“넌 차 안 사냐?”
“맨날 출퇴근 하는 일이 아니라 당장 필요 없는 걸.”
“뭔 소방관이 상주근무야. 에잇!”
부웅.
강태영은 신경질적으로 가속했다.
동생에게 말발에서 밀린 게 분통터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