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러거나 말거나, 태건은 심드렁하게 물었다.
“난 휴가, 형은 어쩐 일?”
“월차.”
“집에 올 거면 전화를 좀 하지. 하여간 인정머리가 없어.”
태건이 대놓고 디스하자 강태영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으으으. 까득, 그럼 니가 먼저 하지 그랬냐.”
“내가 형 스케줄을 어떻게 알아.”
“나는. 까드득. 나는 알아?”
“그러다 이 나간다. 조심해. 돌도 씹어 먹을 나이는 지났어.”
태건은 눈꼬리를 내리며 뻔뻔하게 걱정까지 했다.
그럴수록 강태영은 운전대를 더욱 강하게 말아 쥐었다.
꽈드득.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강태영은 지금까지 태건을 입씨름으로 이겨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냥 닥치고 가자.”
“편한대로. 아, 공기 맑고 바람 시원하니 좋네.”
휘이잉.
태건은 시원한 산공기를 맞으며 여유를 만끽했다.
잠시 후.
강태영의 차가 본가 마당에 도착했다.
탈칵.
태건은 내리자마자 뒷산부터 유심히 둘러봤다.
‘혹시 장마 피해가 있진 않겠지?’
휴가 받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여름이면 장마를, 가을•겨울엔 산불이 걱정됐다.
특히 소방관으로 임용된 후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아직 장마 시즌이었다.
몇 차례 둘러봐도 별 문제 없어 보였다.
“다행이야. 배수로만 좀 정리하면 되겠어.”
안심이 짙어지던 그때였다.
멍멍멍!
깡깡!
크고 작은 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바라보니 펜스가 쳐져 있고 세리와 새끼 강아지들이 반기고 있었다.
특히 세리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 중이었다.
“녀석.”
태건도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다가갔다.
한 손바닥에 올라왔던 새끼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 마리당 두 뼘이 넘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세리가 고생 많았네.”
슥슥.
펜스 넘어 세리를 쓰다듬고 칭찬해줬다.
그렇게 반가운 해후를 하는 사이 강태영의 쓴 소리가 들려왔다.
“짜샤. 내가 네 짐까지 옮겨야 되냐!”
“알았어, 갈게. 보채기는……. 나중에 놀자.”
슥슥.
태건은 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펜스에서 멀어졌다.
곧 형제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엄마, 큰아들 왔어욤!”
“둘째도 왔습니다!”
형제의 순서가 바뀐 듯한 인사말이었다.
벌컥.
안방 문이 다급히 열리며 어머니가 반갑고 놀란 얼굴로 나왔다.
“어머, 어떻게 같이 왔니?”
“이 첫째가 누굽니까. 동생을 아끼는 마음으로다가 딱 모시고 같이 왔습지요. 우하하!”
강태영이 허리까지 젖혀가며 공치사했다.
태건은 이런 그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넉살이 매번 어이가 없었다.
‘형이라 참는다.’
괜히 여러 말하고 싶지 않아 삼켰다.
어머니는 당연히 강태영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우리 첫째가 이렇게나 듬직하다니까.”
“그럼요. 당연한 말씀. 아차차, 전 부엌부터.”
강태영이 사온 선물을 들고 움직이자 태건도 뒤따랐다.
“형, 나도.”
“너희들 뭘 또 사왔니. 그냥 오라니까. 참 말 안 들어요.”
어머니는 싫지 않은 얼굴로 톡톡 쏘아붙이며 같이 움직였다.
잠시 후.
태건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갈퀴를 들고 집주변 배수로를 정리했다.
스릉, 스릉.
“이거 나뭇잎이 한가득이네.”
옆엔 목줄을 한 세리가 방해되지 않는 거리에서 함께 했다.
살랑살랑.
꼬리가 느긋하게 좌우로 움직이는 게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슬렁 지나갔다.
그새 태건은 배수로 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폭우가 쏟아져도 편히 잘 수 있을 깊이였다.
“후우. 이래야 안심이 되지.”
태건이 땀을 닦으며 한층 정돈된 모습에 만족감을 가득 내보였다.
이내 주변 그루터기에 앉아 본격적으로 땀을 식혔다.
한 손은 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슥슥.
“어디 보자.”
그러면서 미비한 부분이 없는지 여유를 가지고 둘러봤다.
그 모습은 너무도 여유롭고 평온한 전원생활의 풍경이었다.
그런 평화도 잠시였다.
착착.
걸음소리에 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이 왔다매.”
자신을 찾는 소리에 태건이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들은 대로 마을 어른들이 몇몇 찾아왔다.
이장, 마을발전위원장, 친구 아버지 등등.
직함이 화려한 이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봤던 어른들이라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꾸벅.
마을 어른들은 구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이고, 건아. 바쁠 텐데 어째 왔다냐.”
“집 걱정되고, 마을 걱정돼서 왔겠지.”
“국내서 소방관 중에 이거라며, 이거.”
불쑥.
엄지만 떡하니 세워 내밀어 보이기도 했다.
태건은 그 손짓에 화들짝 놀랐다.
“무슨 말씀을요. 아직 막내에 초보인걸요.”
“우리도 다 봤어, 뉴스에도 나올 정돈데 뭘 또 아니라고 그러남.”
어떤 어른이 쌜쭉해하며 면박을 줬다.
그 옆에 다른 어른이 슬쩍 눈치를 줬다.
“건이가 원래 어려서부터 겸손하고 점잖았는데, 잊었수?”
“그거야 다 아는 건데 굳이 말할 거 있나.”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다.
그러다 슬그머니 용건을 흘렸다.
“우리 마을도 뭐가 좀 있어야 할 텐데. 물 쏘는 기계 같은 거 말이야.”
“뭘 바래요. 얘가 뭔 힘이 있다고, 그냥 불나면 불나는 갑다, 하고 사는 거지.”
“형님들도 참, 그래도 건이가 자란 동네인데 뭐 알아서 하겠죠.”
말하는 뉘앙스가 고단수들이었다.
태건은 참 뭐라고 말하기 애매했다.
거절하면 나쁜 놈 되는 거고, 승낙하면 한 자리 차지한 거처럼 되어 버린다.
‘유명세가 썩 좋은 건 아니네.’
태건은 속으로 심심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이라면 당황하고 전전긍긍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단계를 지나 있었다.
이래서 경험이 소중하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넉살 가득한 얼굴로 수더분하게 답했다.
“마을에 필요한 거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반짝반짝.
마을 어른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태건은 술술 이어서 말했다.
“위에 건의는 해보겠지만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요.”
“아니, 뉴스에 나왔는데도 어렵남?”
“혹시 위에서 안 된다면, 제가 사비로 구매하겠습니다.”
덤덤하지만 분명하게 의중을 밝혔다.
사비란 단어에 어른들 표정이 조금 어색하게 변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하란 건 아니고.”
“우리 말 오해하면 안 돼.”
“어디까지나 군에서 해주는 걸 말하는 거야.”
높았던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그럴수록 태건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저희 남매들을 키워주신 마을에 그 정도가 아깝겠습니까.”
“뭐, 우리 애들하고 같이 크긴 했지.”
“그러니까요. 대신 사비로 구매하려면 저도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태건은 슬쩍 가라앉은 얼굴로 비용적인 부분을 언급했다.
그건 마을 어른들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돈, 돈을 모아야 돼?”
“1년 정도 모르면 좀 쓸 만한 걸로 장만할 수 있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태건은 얼른 다시 활기차게 답했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은 점점 표정이 굳어져갔다.
“너보고 사라는 거 아니다. 그런 거 아니야.”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저, 저기 위에 물어보고 안 되면 없던 일로 해.”
“그래. 그, 그게 그렇게 비싼 건지 몰랐네.”
마을 어른들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괜히 찔러보러 왔다가 본전도 못 찾은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태건의 승기로 굳혀져 갈 때였다.
스윽.
“아니, 거기서 우리 둘째 놓고 뭣들 하신대요?”
돌아보자 어머니가 상당히 불쾌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얼추 짐작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마을 어른들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크흠. 뭐, 뭘 할 게 있나요.”
“왔다고 하니까, 얼굴 보러 왔지요.”
“제수씨도 참. 거 동생은 산에 있을 시간이네.”
“그럼 가자고.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줘요.”
슥슥.
마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멀어지는 발걸음은 신속했다.
곧 태건의 옆에 어머니가 다가섰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들이 말이야. 이러는 건 아니지.”
“어머니, 어른들이 그러실 수도 있죠.”
“지들 자식 같으면 그러겠니. 입도 벙긋 못하게 할 거면서.”
어머니의 불쾌함이 점점 화로 번져갔다.
태건은 좀 더 붙임성 좋게 만류했다.
“에이, 다 가셨잖아요. 그리고 뭐 엄청 무리한 부탁도 아니었습니다.”
“뭐가 무리한 게 아니야.”
“어머니.”
“내 아들은 벽돌에 깔려 입원까지 했는데, 어떻게 꽁으로 뭘 바랄 수가 있니!”
부르르.
결국 어머니의 화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
그런데 태건은 멈칫했다.
“그걸…….”
“나는 뉴스 안 봤는지 아니!”
휙!
어머니의 화가 태건에게로 향했다.
두 눈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뾰족한 화가 아니다.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애잔한 화였다.
뉴스를 보고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지 가슴 가득 읽혔다.
태건은 도저히 어떤 변명과 핑계도 댈 수 없었다.
“……보셨겠죠.”
“둘째야. 나랑 한 약속……. 끝까지 지킬 수 있겠어?”
어머니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약속.
오래오래 밥해주고 싶다.
머릿속 아니, 가슴 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태건은 주춤거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두 눈을 마주하고, 두 손을 굳건히 잡았다.
꼬옥.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네. 그럼요.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치는데, 그렇게 아픈데 어떻게…….”
파르르.
어머니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태건은 그대로 어머니를 안으며 말했다.
“뉴스가 잘못 했네요. 왜 그런 걸 내보내서 우리 엄마 맘 아프게 했을까요.”
“그게 왜 뉴스 탓이야.”
퉁.
어머니의 힘없는 주먹이 태건 가슴을 두드렸다.
아주 가벼운 손짓이자 투정이다.
그런데 태건에겐 망치보다 더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꾸욱.
더 힘껏 안으며 말했다.
“어머니,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정말 그만 둘 수 없겠니.”
“…….”
태건은 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듣기 싫어할 대답이라 삼갔다.
“…….”
어머니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당장 좁혀지지 않을 문제임을 모르지 않았다.
…….
조용히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