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기다림 끝에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꼭 그래야 한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놔. 저녁 준비하게.”
스윽.
어머니는 태건의 품을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
태건은 그 자리에 서서 어머니 뒷모습을 바라봤다.
‘치사한 녀석.’
스스로를 타박했다.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단 속설을 빌려 버틴 거였다.
태건으로선 당장 어떤 말을 해도 어머니를 설득시킬 수 없던 탓이다.
대신 더욱 굳게 다짐했다.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실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중간에 멈추면 아예 안가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애당초 멈출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마음 속 깊이 다짐을 새겼다.
그날은 꼭 온다.
물론 시간만 하염없이 지난다고 오지 않는다.
그에 걸맞은 노력이 필요했다.
번뜩!
태건의 눈빛이 무겁게 빛났다.
저녁시간.
아버지가 식사시간 맞춰 산에서 내려왔다.
곧 모든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어머니가 빈 자리를 보며 아쉬움을 내보였다.
“주미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러게요. 지금쯤 대서양을 날고 있겠네요.”
말 그대로 강주미는 해외비행 스케줄로 불참이었다.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그런지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뭐, 할 수 없지.’
그런 여동생에 대한 생각은 0.1초 남짓이었다.
남매란 원래 그랬다.
곧 먹음직한 반찬이 그득한 저녁식사가 시작됐다.
“잘 먹겠습니다!”
“엄마 밥니다!”
찹찹찹.
태건과 강태영은 경쟁하듯 식사에 몰두했다.
그런 형제를 뒤로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조금 전 일을 얘기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뭐라고 좀 해줘요.”
“흐음.”
“뭘 생각해요. 그렇게 마구잡이로 바라는 건 잘못된 거잖아요.”
어머니는 다시금 흥분했다.
반면 아버지는 좀 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는 태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야,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마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어머니의 두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태건에게 덧붙여 말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산 사람들이야. 마을에 유명인이 생겼으니 그 유명세 좀 누려보고 싶은 거다.”
“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됐어. 또 그러면 힘 써 보겠다고 대답하고 말아.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해.”
아버지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태건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어머니도 같이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래요.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슥슥.
아버지에게 눈짓을 줬다.
태건은 보자마자 눈치를 챘다.
아까 나눈 대화의 2차전일 거다.
‘어머니도 참.’
아버지의 말을 빌려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픈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숟가락으로 국을 쓸며 덤덤하게 말했다.
“하고 싶다고 시작한 일이면, 손 털고 나오는 것도 저 녀석 몫 아니겠소.”
“애가 그렇게 다친 걸 뉴스로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견딜만 하니까 그러고 있는 거요.”
아버지의 반응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태건은 전혀 섭섭하지 하지 않았다.
반대로 소방 일을 밀어붙일 명분이 생겼다.
“그럼요. 아버지 말씀대로 할 만하니까 하고 있는 겁니다.”
“떽, 그게 부모 앞에서 할 소리냐.”
“크흠. 밥 먹겠습니다.”
스윽.
태건은 어색하게 미소 짓고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괜히 한 마디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꼴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답답해졌는지 강태영에게 지원요청했다.
“큰애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 집안 가훈이 생각납니다.”
“나도 모르는 가훈이 생겼니?”
어머니가 어리둥절해 했다.
강태영은 잠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든 자유엔 비례하는 책임이 따른다.”
“…….”
“그래서 저희 삼남매는 각자 스무살 때 반 강제로 독립했죠. 무일푼으로요.”
강태영이 젓가락을 내리며 회상에 잠겼다.
그에 대해선 어머니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태건을 걱정할 때와는 강단부터 달랐다.
그만큼 확고한 교육적 소신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20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줬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지 않니?”
“그 겨울에 괴나리봇짐 하나 매고 집 떠난 건 저희 밖에 없었을 겁니다. 얼마나 추웠는지 아십니까?”
강태영은 눈을 흘기며 부모님의 자녀교육에 대한 불만을 내보였다.
그때 조용히 식사하시던 아버지가 한 소리 했다.
“첫째,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제가 왜요?”
“집 나가면서 황절삼 한 뿌리 훔쳐 갔잖아. 그때 내가 다시 구한다고 겨울에 산 탔던 걸 생각하면, 그냥 확.”
찌릿.
아버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태건이 아버지 편에 붙어 한 소리 얹었다.
“매일 눈사람 돼서 돌아오셨지.”
그럼에도 강태영 표정은 아주 당당했다.
“아버지도 참, 그건 20년 동안 명절 때마다 부모님 은행에 저금한 거 일시불로 찾아간 거잖아요.”
“……차라리 쳐 먹지. 약방에 홀랑 속아서 헐값에 팔았잖아!”
“그땐 제가 세상에 눈이 어두울 때라 잘 몰랐습지요. 지금 그 값이라면 어이고, 절대 안 팔 겁니다.”
강태영은 그래도 뻔뻔했다.
아버지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더니 결국 강태영의 흑역사를 꺼냈다.
“그 길로 대학등록금까지 빼서 잠적해 놓고 6개월 만에…….”
“상거지가 돼서 나타났죠.”
태건은 기다렸단 듯이 시기적절하게 얹어 말했다.
아버지는 바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뭐? 내일 입대라 엄마 밥 먹으러 왔다고?”
“덕분에 어머니는 머리에 하얀 띠 두르고 몸져누우셨죠.”
태건은 또 한 번 보태 말했다.
“…….”
어머니는 말없이 강태영을 쏘아보기만 했다.
아버지도 그때를 생각하니 감정이 훅 치고 올라오는 모양이다.
“그런 녀석이 지금 자유와 책임을 논해?”
강태영은 점점 작아져갔다.
그러다 뭔가 떠올랐는지 곧 자세부터 바르게 세웠다.
“……흠흠. 아버지. 이 순간 제가 중요한 일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식사하시죠. 아, 역시 엄마 반찬이 최고야.”
쩝쩝.
강태영은 화제를 돌리는 순간까지 능글맞았다.
태건은 그런 형에게 한 마디 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던데. 형은 왜 없을까.”
“뭐, 인마?”
“난 형이 회사도 가고, 이렇게 집도 찾아오는 훌륭한 사람이 된 지금이…….”
태건이 말을 끌자 강태영이 흘겨보며 물었다.
“지금 뭐, 뭔 말을 하려고 폼을 잡아?”
“미스터리라고. 어떻게 망나니가 이렇게 새 사람이 됐을까.”
“망, 망나니. 넌 진짜……. 내가 형으로 보이긴 하냐?”
강태영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부모님에겐 능글맞아도, 동생이 치고 올라오는 건 싫은 모양이다.
태건은 그런 강태영에게 천적이었다.
“형이라……. 호적상으로는 인정. 아니면? 집 나갔을 때 벌써 돌아섰지.”
“우리 동생이 말을 참 예쁘게 하네. 앙!”
“알아줘서 고맙고……. 어머니, 밥 좀 더 주세요.”
불쑥.
태건은 태연하게 어머니에게 밥그릇을 내밀었다.
옆에서 강태영이 쏘는 눈빛 레이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모였다 하면 서로를 디스하는 화기애매(?)한 식사자리가 계속 이어졌다.
태건이 집에서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태건은 떠날 채비를 했다.
그건 강태영 역할이 한 몫 했다.
“형 차 얻어 타고 돌아가려고요.”
“또 거기 가면 출동하겠구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태건은 반대로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더 쉬고요. 그리고 다음 출동에선 덜 다칠게요.”
“안 다치는 게 아니고?”
“그건 그때그때 현장상황이 달라서 약속 못합니다.”
”에휴. 우리 둘째는 누구랑 달라서 속 한번 썩인 적 없는데……. 엄마는 소방관이 밉다.“
어머니는 결국 뚱한 투정을 부렸다.
부모의 눈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스윽.
“건강하게 밥 먹으러 올게요.”
“……알아서 해.”
어머니는 또 부모란 이유로 자식에게 져줬다.
“감사합니다.”
태건은 수더분한 인사 밖에 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
부웅.
어느새 강태영의 차는 남양주시에 접어들었다.
“…….”
차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태건은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스스슥.
멈추는 느낌이 들자 태건이 부스스한 눈을 뜨며 물었다.
“하암. 다 왔어?”
“차 한 잔 마시고 가자.”
덜컥.
강태영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 목소리에 진지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반면 태건은 안전벨트를 풀며 갸우뚱했다.
“갑자기 왜 저래? ……오, 여기 잘 꾸며 놨네.”
의아함은 찰나였다.
잘 가꿔진 전원 카페에 관심이 쏠렸다.
형제는 야외테라스에 자리했다.
후릅.
태건은 커피를 마시며 좀 더 정신을 선명하게 깨웠다.
“원두도 좋고, 장사 잘 되겠네.”
“강태건.”
“왜 목에 힘을 주고 그래?”
후릅.
태건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지금 강태영은 철부지 첫째가 아니었다.
무게감 가득한 형의 모습이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특수소방단 말이야.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전혀 아니진 않아.”
잘 꾸며진 정원을 보며 흘려 말했다.
그럼에도 강태영의 목소리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돌아가면 어떻게든 마련해서 이번 달 내로 돌려줄게.”
“음?”
스윽.
태건은 뜻밖의 말에 강태영을 마주봤다.
눈빛, 표정, 말투, 그리고 앉은 자세까지.
형제기에 강태영이 얼마나 진지한지 직감할 수 있었다.
태건도 무성의한 태도를 지우고 조금 진지해졌다.
“그게 왜 그리로 튀어?”
“내가 삥땅친 돈 메우려고 특수소방단에 자원한 거잖아.”
강태영은 자신의 추론을 확신이라 단정 짓고 있었다.
태건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걸 그렇게 연결 지을 수가 있네.”
강태영이 꿀꺽 중인 여행경비가 상당한 액수인 건 맞다.
그러나 태건의 통장엔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강태영이 그걸 모를 뿐이었다.
그럼에도 강태영은 일관되게 진지했다.
“내가 멋대로 써서 널 곤란하게 한 건 미안하다.”
시선을 살짝 내리며 사죄의 느낌을 풍겼다.
태건은 그 모습이 더 놀라웠다.
“형이 나한테 사과를 해?”
“그래도 인마. 그렇게까지 몰릴 상황이면 내놓으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
“난 네가 이자 타령만해서 여유가 있는 줄 알았어. 고급정보라 믿은 내가 잘못이지. 후.”
강태영의 자책이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