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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사인 (129)화 (128/320)

129화

그러나 둘의 온도 차이가 너무도 컸다.

유심히 듣던 태건은 곧 심드렁한 표정으로 변했다.

‘난 또 뭐라고.’

강태영 홀로 망상에 젖어 있는 거였다.

그래도 지금 모습은 형 같았다.

“평소에 저러면 얼마나 좋아.”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진짜 진지해.”

“갑자기 그 말을 꺼내는 이유부터나 좀 알려줘 봐.”

태건이 권하자 강태영은 묵직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어머니가 걱정만 하시게 둘 거냐. 그러면 안 돼.”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신박하게 들려.”

“내가 먼저 개판 쳐 봤으니까. 어제도 뻔뻔하게 말했지만 속까지 뻔뻔하진 않아.”

강태영이 묘한 반전을 보여줬다.

아니, 태건이 알고 있는 강태영의 본모습이었다.

한없이 가벼운 사람 같지만, 가족에게 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태건도 느낌을 받은 곧 진지한 태도로 바꿔 말했다.

“우선 여행경비로 수익 좀 봤어?”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수익타령…….”

“형.”

태건이 짧게 끊어 불렀다.

눈빛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강태영도 직감했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손실 만회 중이야. 원금까지 얼마 안 남았어.”

“그럼 계속 잘 굴려봐. 연말에 가족파티 할 정도는 벌 수 있지?”

“뭐?”

강태영이 귀를 의심했다.

태건은 동요 없이 차분히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탈칵.

“난 당장 그 돈 없어도 전혀 문제없단 소리야.”

“그럼……. 돈 때문에 자원한 게 아닌 거네.”

형제라 그런지 말투도 비슷했다.

그 사이 태건은 커피로 입술을 축인 후 잔을 내렸다.

그리고 강태영을 향해 물었다.

“형, 요즘 하루하루가 어때?”

“어떠냐니?”

“가슴이 뛰어?”

태건이 재차 물었다.

우뚝.

일순간 강태영의 몸이 굳어졌다.

가슴 뛰는 삶.

마냥 행복한 하루하루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힘들고 고되더라도 나의 일에 만족과 보람을 느낄 때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곧 강태영이 태건에게 물었다.

“넌 가슴이 뛰니?”

“매일, 매 순간.”

“……후. 그렇구나.”

강태영의 굳은 표정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어떤 말로도 쉽게 바뀔 마음이 아니란 걸 이젠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태건의 얼굴엔 보란 듯이 잔잔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나만 이해하고 말 거야. 부모님과 주미에겐 내 입으로 말할 생각 없어.”

“나도 없어.”

엉뚱한 태건의 대답에 강태영이 순간 비틀거렸다.

삐끗.

“야, 지금 거기서 그 말이 나오면 안 되지!”

“말이 앞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너, 소방관에 정말 진심이구나.”

“그렇다니까.”

태건은 이제야 알았냔 표정으로 뚱하니 바라봤다.

강태영은 그런 반응도 개의치 않고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계속 말해봐야 제자리걸음인 이유가 이거였네.”

“실망시키지 않을게.”

“난 늘 너에게 실망했어.”

강태영이 진지한 얼굴로 반전 어린 대답을 했다.

이번엔 태건이 무방비로 듣다 삐끗했다.

비틀.

“지금 어떻게 그런 말을……. 진짜 너무한다.”

“뭐든 나보다 잘하는데, 내 눈에 예뻐 보이겠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제 가자.”

불쑥.

태건은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끈끈해지기 시작한 탓이다.

‘형제끼리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자리를 정리했다.

결국 태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쑥스러움 탓이었다.

그래도 강태영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준 건 고마웠다.

미우나, 고우나.

형제는 물보다 진한 피가 섞인 사이였다.

그날 밤.

우면 훈련장 주차장에 형제가 나란히 섰다.

강태영이 훈련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먹고, 자면서 대기한다고. 나쁘진 않네.”

“뭔 현장 시찰 나왔냐. 안 가?”

“좀 보자. 닳는 것도 아닌데.”

통통.

말투부터 헤벌쭉한 강태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실컷 봐라.”

“다 봤어. 갈게.”

“청개구리냐?”

“빙고. 그럼 빠이.”

스윽.

손을 가볍게 휘저은 강태영은 그대로 차에 올랐다.

부웅.

그 차는 곧장 우면 훈련장 밖으로 떠나갔다.

태건은 어느새 가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형은 형이네.”

동생의 일상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오늘은 들렸다가 가는 길이었지만 다음엔 초대를 할까도 생각했다.

아예 단원들의 가족들을 전부 초대하는 건 어떨까.

모두가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생활을 오픈한다면 그 우려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 봤다.

…….

추측의 결과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흠, 노노.’

절레절레.

부르르 떤 태건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단원들의 성격을 보면 가족들도 비슷비슷할 터였다.

그런 그들이 만났을 때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그냥 살던 대로 살자.”

지금 자신들의 생활은 조금 신비롭게 놔둬도 좋을 거 같았다.

그렇게 짧은 1박 2일의 고향집 방문이 끝이 났다.

“다녀왔습니다!”

*  *  *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장마전선이 다시 세를 키운 모양이다.

우르릉, 쾅쾅.

주르륵 쏴아아!

천둥에 번개까지 동반한 장맛비가 기승이었다.

그러나 우면 훈련장 옥상엔 아직 라텔전용 헬리콥터가 도착 전이었다.

태건은 사무실 옆 자재창고에 들어와 있었다.

커다란 출동가방을 펼치고 준비물을 새롭게 바꾸는 중이었다.

“확실히 미국과 비슷한데 달라.”

한국 실정에 맞게 재정비 하는 거였다.

슥슥.

이름 모를 장비들이 셀 수도 없이 가방 속을 들락거렸다.

그런 태건은 혼자였다.

오광휘 단장도, 황대산과 유중헌도 부재중이었다.

곧 휴가가 끝날 거다.

그 전에 개인적인 일을 보러 간 상태였다.

태건의 새로운 출동가방 정리는 오전 내내 이어졌다.

어느덧 오후가 되자 빗소리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주룩, 주룩.

-기승을 부리던 장마전선이 약해지며 곧 장마가 끝날 거란 예측이…….

비스듬히 세워둔 휴대폰에서 뉴스가 방송 되고 있었다.

태건은 귀로만 듣고 두 손을 바삐 움직였다.

슥슥.

이내 더욱 커다래진 출동가방을 들어올렸다.

“그래. 이렇게 챙겨야 안심이……. 허으읍!”

대롱대롱.

간신히 들어 올렸지만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뭐 하나 덜어낼 장비가 없었다.

“끄응. 운동이다, 운동이야.”

꾸욱, 꾸욱.

내친김에 출동가방을 들고 스쿼트를 해버렸다.

무겁다고 덜어내는 게 아니라, 들어 올릴 힘을 키우잔 게 태건의 방식이었다.

*  *  *

그렇게 정리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이었다.

약해진 빗줄기를 보던 태건이 갑자기 가늘게 미소 지었다.

“지금 밖에 시간이 없겠네.”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리고 뉴스를 방송중인 휴대폰을 낚아채 어디론가 전화했다.

뚜루루.

대학교 동기 정혜랑에게 하는 전화였다.

가장 친했고, 지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동기이자 친구다.

라텔이 재가동되기 전인 지금 만나야 했다.

곧 휴대폰에서 정혜랑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운 친구라는 건 통화의 첫마디가 증명해줬다.

“건건, 어쩐 일?”

“랑랑, 손목스트레칭 할 때 되지 않았어?”

손목스트레칭.

좋게 포장한 표현이었다.

술 먹자.

이게 진짜 의미였다.

정혜랑의 아주 심플한 대답이 들려왔다.

“때가 됐지.”

“학교? 내가 갈까?”

“취준생을 위한 격려방문이라면 언제나 환영, 대환영.”

“공부하고 있어. 학교 근처가면 연락할게.”

둑.

태건은 시원하게 전화를 끊었다.

“일단 좀 씻고.”

장비 정비하며 흘린 땀부터 닦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곧장 자재창고를 닫고 라텔 전용구역으로 향했다.

총총.

그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했다.

저녁 무렵.

태건은 정릉 인근의 대학가에 나타났다.

모처럼 한가한 마음으로 활기찬 대학가를 가로질러 간 태건은 오래된 건물 앞에 도착했다.

1층 구석자리에 낡은 가게 간판이 보였다.

-선배네.

단순하지만 정감 있는 가게 이름이었다. 

태건은 미소 띤 얼굴로 ‘선배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다정한 인상에 앞치마를 한 40대 가게 주인인 조용철이 반사적으로 인사하다 깜짝 놀랐다.

“어서오세요……. 가 아니라, 이게 누구야. 태건아.”

“선배님 안녕하셨습니까.”

꾸벅.

태건은 환한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조용철.

진짜 대학교 동문 선배였다.

물론 학과가 다르고, 학번은 쳐다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여기서 만큼은 무조건 ‘선배’로 통했다.

더구나 태건의 대학시절 최고 좋아하던 단골집이다.

당연히 조용철은 환한 얼굴로 다가와 어깨부터 다독였다.

턱, 턱.

“뉴스 봤어. 이야, 우리 가게에 스타가 찾아오셨네.”

“스타는 무슨요. 잘 지내셨죠?”

“나야 늘 똑같지. 오늘 혜랑이하고 유신이가 왜 왔나 했더니....... 다들 안에 있어.”

스윽.

조용철이 바로 방향을 가리켰다.

태건은 친분만큼 넉살 좋게 제안했다.

“이따가 오셔서 한 잔, 아시죠?”

“가기 전에 사인이나 해줘. 카운터에 큼지막하게 붙여 놓게.”

“사인은 무슨요. 이따 봬요.”

태건은 머쓱한 얼굴로 얼른 움직였다.

사실 손님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리 특별한 거 없는 가게였지만 다들 찾아오는 이유가 있었다.

뒤에서 조용철의 변죽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정과 파티 안 하냐?”

“이거 안주 봐라. 여기 사회과 애들 계란말이 좀 챙겨줘라.”

“니들은 또 술이냐. 나 돈 안 벌어도 되니까 가서 공부 좀 해.”

정말 후배들 대하듯 손님들을 챙겨주고, 잔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태건은 오랜만에 듣는 그 소리가 정겨웠다.

‘저 선배는 늘 한결 같아.’

그래서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도 가끔 찾아오는 가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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