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가게 깊숙이 들어간 태건의 표정이 대번에 환하게 밝아졌다.
친구들을 발견한 후였다.
개구쟁이 인상이 피곤으로 얼룩져 꾀죄죄한 친구가 정혜랑이다.
그 옆에 뿔테 안경에 정돈된 모습을 한 박유신도 보였다.
대학시절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자식들, 여전하네.”
태건이 환한 얼굴로 손을 들며 다가갔다.
정혜랑이 반가움을 괜한 투덜거림으로 돌려 말했다.
“야, 건건. 얼굴 까먹겠어.”
“학교에서 기다리랬더니, 의리없이 먼저 와서 마시고 있냐?”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스윽.
정혜랑은 말꼬리를 흐리며 슬쩍 박유신을 턱짓했다.
그 사이 태건은 정혜랑 옆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박유신에게 물었다.
“우리 조교님이 왜?”
“나도 숨 좀 쉬며 살자.”
“누가 숨 막아?”
태건이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박유신은 태건이 숨 고를 틈도 없이 속사포로 대답했다.
“3, 4학년은 얼굴 안다고 말 안 듣지. 1, 2학년은 말을 못 알아듣지. 교수님 논문 자료 조사에, 내 논문도 준비해야 되고 미촤버리겠다!”
턱턱.
테이블을 두드리며 성토했다.
그런 하소연이 하루 이틀이 아닌 모양이다.
어느새 자리한 태건은 정혜랑에게 술부터 받고 있었다.
“간만.”
쪼르륵.
“어, 땡큐.”
그런 친구들 모습에 박유신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강태건, 내 말 들었어?”
“일단 짠부터, 반갑다!”
“야, 넌 또 왜 내 말 안 듣는데!”
박유신이 스트레스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정혜랑이 끼어들었다.
“이렇게 얼굴 보네. 짠!”
“유신아, 안 마셔?”
태건이 권하자 박유신이 벌게진 얼굴로 툴툴거렸다.
“내가 말하면 좀 들으라고, 이 진상들아!”
“알았으니까 짠부터.”
“아으……. 짠!”
박유신은 인상을 쓰면서도 못이기는 척 잔을 부딪쳤다.
째재쟁.
거국적으로 잔을 부딪친 태건과 친구들은 단숨에 비웠다.
“크으. 좋다.”
“아으. 찌릿하네!”
“아오, 열 뻗쳐!”
술 한 잔에도 내뱉는 감상이 제각각이었다.
이번엔 태건이 술병을 들고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고생 중인 조교님, 한 잔 더 받으셔.”
쪼르륵.
박유신이 잔을 받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내가 조교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그랬냐.”
“말렸어.”
“더 격하게, 강렬하게 말렸어야지!”
박유신은 괜히 태건에게 투덜거렸다.
물론 친해서 하는 투정이다.
그래서 태건은 그 하소연을 미소로 받아넘겼다.
“좀만 더 고생해, 몇 년 안 남았잖아.”
“그 몇 년이 안 보인다니까.”
쭈욱!
박유신은 답답한지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늘 똑같은 래퍼토리였다.
태건은 신경 쓰지 않고 정혜랑의 술잔을 채워줬다.
쪼르륵.
“취직 준비는 잘 되냐?”
“잘 되면 이러고 있겠냐고. 그냥 너 따라서 소방관 준비나 할 걸.”
“같이 하자니까.”
태건은 수더분하게 말했다.
정혜랑은 뚱한 얼굴로 술잔을 들이켰다.
“크으. 나도 내가 왜 그때 튕겼는지 모르겠어.”
“대기업이 기다린다며?”
“진짜 그런 줄 알았다니까. 날 너무 과대평가했던 거지.”
정혜랑은 멍한 얼굴로 답했다.
태건은 그런 그의 어깨를 다독여 줬다.
툭툭.
“괜찮아.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야.”
“올해 벌써 면접만 삼십군데 넘게 봤는데?”
“……이제 곧 연락 오겠네.”
태건은 멈칫했지만 일단 궁색한 위로를 건넸다.
‘가능성이 썩.’
그 말은 차마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그때 정혜랑이 쓴 표정을 지으며 밝게 말했다.
“난 아무튼 그렇고, 건건이 TV 나오니까 기분이 신나게 좋더라.”
“맞아. 특수소방단이랬지. 기사도 봤어.”
박유신도 자기 푸념을 지우고 말을 덧붙였다.
친구들 관심에 태건이 싱긋 미소 지었다.
“이제 이 형이 좀 멋져 보이냐?”
“멋지기는. 몸에 붕대 칭칭 감고 인터뷰한 주제에.”
정혜랑은 투덜거린 목소리와 달리 눈빛에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런 반면 박유신은 표현이 직설적이었다.
“몸은 다 나았냐?”
“그러니까 술 마시러 왔지. 그런데 잔이 비었네?”
살랑.
태건이 빈 잔을 흔들며 가볍게 항의했다.
박유신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술병을 들었다.
쪼르르.
바로 잔을 채우며 흘리듯 물었다.
“연미는 뭐래?”
“…….”
멈칫.
미소 가득한 태건의 목소리가 일순간 멈췄다.
친구들이 정연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사이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정연미의 아버지가 둘의 사이를 반대하는 속사정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꺼낸 말이었다.
태건이 조용하자 정혜랑이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왜 답이 없어?”
“소방일 하다보면 다치기도 하고 그런 거지.”
“쓰읍. 아닌데, 분위기가 다른데.”
“뭐가 달라?”
태건이 뚱하니 물었다.
그 순간 정혜랑이 눈빛을 굳히며 반문했다.
“니들 싸웠냐?”
“싸우긴 누가 싸워.”
“흐음.”
“에휴, 솔로들이 뭘 알아.”
쭈욱.
태건은 말을 흩뿌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 순간 정혜랑과 박유신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야, 나도 CC였거든!”
“누굴 모쏠로 아나. 일이 바빠서 잠시 휴식 중인 거지!”
발끈하는 기세가 상당히 따가웠다.
그런 모습으로 봐도 현재 솔로가 확실했다.
둘 다 이미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다.
태건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계속 해?”
짧은 질문이지만 친구들은 더욱 발끈했다.
“시꺼, 술이나 쳐 마셔!”
“간만에 나타나서 말이야, 친구들 아픈 속을 들쑤시고 말이야, 그럼 못 써!”
친구들이 과하게 흥분하자 태건이 술병을 들며 진압에 나섰다.
“자자, 알았으니까 술 한 잔 더 해.”
“짜식이 말이야. 그래도 걱정 돼서 하는 말을 말이야.”
“알았다니까.”
“넌 술만 안 따랐으면 아주 큰일 나는 거였는데, 술 따라줘서 봐주는 거야.”
정혜랑이 괜히 더 큰소리 쳤다.
박유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 둘 다, 발끈한 덕분에 정연미에 대한 질문은 흐지부지 흩어졌다.
태건은 그 기세를 이어가듯, 빈자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윤재는 오늘 결석이야?”
그 말과 동시였다.
“후후.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대답이 들려왔다.
휙.
고개 돌려 바라보자 깔끔한 양복차림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건이 방금 언급한 김윤재였다.
그도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태건은 다가오는 김윤재에게 손부터 내밀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후후. 바빴지. 이게 먼저겠네.”
척.
태건의 손에 김윤재 손이 아닌 다른 게 잡혔다.
명함이었다.
-오성에너지.
-사원 김윤재.
특이하게도 기업 이름을 형광펜으로 강조해 놓았다.
태건은 싱긋 미소 지었다.
“취업했구나, 축하해.”
“그냥 취업이냐, 잘 보라고. 무려 오성에너지라고, 오성 몰라?”
“그래.”
태건은 덤덤히 미소 지었다.
오성 그룹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었다.
자신보다 회사를 앞세우는 모습이 그다웠다.
태건은 강윤재가 예전부터 과시하는 걸 즐기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어느새 자리한 강윤재는 빈 술잔을 자연스레 내밀었다.
“일단 한 잔 따라 봐. 대 오성에너지의 뛰어난 인재한테 말이야.”
“입사하느라 고생했어.”
쪼르륵.
태건이 미소 지으며 따라줬다.
그러나 김윤재는 가볍게 넥타이를 내리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고생은 무슨. 오성에서 얼마나 오라고 그러던지. 전화도 몇 번씩하고 말이야.”
“응.”
“크으. 그보다 뭔 얘기하고 있었어?”
김윤재가 술잔을 비우고 물었다.
그 잔을 정혜랑이 따라주며 답했다.
“건이 뉴스 나온 얘기.”
김윤재는 태건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나도 봤어. 너무 고생하더라.”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게 아니라, 그거 소방관 월급 얼마 받는다고 그렇게 고생하냐 이거지.”
“…….”
순간 태건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김윤재는 이미 자기 말에 취해 그런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솔직히 그렇잖아. 누가 봐도 번듯한 기업에 취직한 나하고, 박봉에 툭하면 다치는 소방관하고. 비교가 되겠어?”
“우리 윤재가 술을 한 잔하고 왔나?”
태건은 말이 과하단 표현을 살짝 둘러말했다.
이 정도에서 눈치껏 그만하란 충고였다.
친구란 이유로, 허세가 심한 성격을 알기에 그나마 봐주는 거였다.
그러나 김윤재는 눈치를 회사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쭈욱.
한 잔 더 마시며 목소리를 높였다.
“태건아, 내가 너 안타까워서 그래. 성적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좋고 그렇잖아.”
“…….”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힘들게 그러고 있냐 이거야. 우리 회사는 연봉이며 복지 수준이며, 끝장난단 말이지.”
“……적당히 하자.”
태건은 두 번째 충고이자, 첫 번째 경고를 날렸다.
태건은 소방관에 자부심을 느끼기에 헐뜯는 소리가 듣기 좋을리 없었다.
정말 친구라 봐주는 거다.
그러나 두 번의 경고는 없다.
꾸욱.
그 증거로 테이블 아래로 내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정혜랑과 박유신은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야, 윤재야. 술 두 잔에 취했냐.”
“오자마자 뭔 말이 그렇게 많아.”
화제를 돌리려 눈치를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윤재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걸핏하면 다치고, 재수 없으면 죽고, 그게 뭐하는 짓이야. 안 그래?”
“…….”
“어차피 너도 얼굴 한 번 알렸으니까 슬슬 움직일 생각하고 있잖아. 지금이 딱 기회다 이거지. 콜?”
김윤재는 찡긋거리며 모종의 사인까지 건넸다.
태건에게는 그 신호가 다르게 읽혔다.
- 나 얻어터지고 싶어.
딱 그 의미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