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소방관을 깔봐도 유분수였다.
거기에 모욕까지 했다.
소방 일에 자긍심을 느끼는 태건에겐 안전핀을 뽑은 거와 같았다.
‘정 소원이라면.’
작정한 태건이 일어나려 했다.
차라리 타인이 이렇게 말했다면 무시했을 거다.
친구라서 더 화가 났다.
그렇게 주먹을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빡!
“악!”
차진 소리와 함께 김윤재의 고개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 뒤엔 조용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있었다.
“이 새끼가 듣자듣자 하니까. 그럼 못 써!”
“아씨, 선배. 왜 때려요!”
“뭐, 왜 때려? 이 자식이…….”
후웅!
조용철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술병을 높이 쳐들었다.
그걸 본 태건이 재빨리 박차고 일어나 만류했다.
“선배, 진정하세요.”
“이 배알도 없는 시끼야. 넌 저딴 소리 듣고 가만히 있냐, 대가리를 깨버려야지!”
“쟤 대가리 깨면 제가 응급처치해야 됩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해요.”
태건이 얼른 반박하자 조용철이 멈칫했다.
“……그게 그렇게 되냐?”
“제가 성격 좋아서 참겠습니까. 한 번 손대면 끝장 보는 성격인 거 선배도 아시잖아요.”
“그렇지. 태건이가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긴 하지.”
조용철이 슬그머니 맞장구쳤다.
그사이 태건은 그가 치켜든 술병을 슬쩍 내리며 말했다.
스윽.
“윤재가 표현이 좀 그래서 그렇지, 제가 다친 게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네가 그렇다면 뭐.”
조용철은 당사자가 만류하니 더는 뭐라고 하기 애매해진 모양이다.
태건은 아예 쐐기를 박았다.
“윤재도 여기까지만 할 겁니다. 더 그러면 제가 뒷문으로 끌고 갈 거니까요.”
“아, 거기. 선배랍시고 깝죽거렸다가 너한테 끌려가 얻어터진 놈들 집합소 말이지.”
“윤재도 기억할 겁니다.”
“저 새끼가 기억 못하면 안 되지. 깐족거리다가 니들 선배들한테 가장 먼저 찍힌 게 저놈인데.”
티키타카.
태건과 조용철의 대화가 합을 맞춘 듯 이어졌다.
그건 태건이 눈짓을 보낸 탓이었다.
찡긋, 찡긋.
그 신호를 알아듣고 조용철이 울컥함을 누르고 맞장구 쳐주는 중이다.
반면 김윤재는?
흠칫, 흠칫.
“…….”
말도 못하고 순간순간 놀랐다.
태건의 성격이 어땠는지 이제 기억난 모양이다.
찍히면 끝장 본다.
그런 성격이니 지금까지 얼마나 참았을지도 추측되는 듯 했다.
어느새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슬슬 눈치를 봤다.
정혜랑과 박유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쟤는 저 허세만 빼면 애는 착한데 말이야.”
“어떻게 술 마실 때마다 누구 한 명 속을 뒤집어 놓는지.”
“안 고쳐지는 거 보면 고질병이야.”
“불치병이지.”
끄덕끄덕.
두 친구는 자신들이 내린 평가에 만족하는지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 사이에도 태건은 조용철을 만류 중이었다.
“선배,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알았다. 그만할게.”
“감사합니다.”
태건은 인사를 하고 나서야 붙든 손을 놓았다.
조용철은 바로 떠나가지 않았다.
한풀 꺾인 기세로 김윤재에게 차분히 말했다.
텅.
“윤재야, 넌 살면서 사람 한 번 살려 본 적 있냐.”
“…….”
“그거 쉬운 거 아니다. 돈 받는다고, 공무원이라고, 하는 거라 생각하면 진짜 오산이야.”
“…….”
김윤재는 아무 말도 안했다.
가만히 듣던 조용철은 이내 김윤재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말했다.
쪼르르.
“형이 때린 건 미안해. 그런데 오늘은 윤재 네가 심했어.”
조용철은 단호하게 말하고 이내 몸을 돌렸다.
태건이 그를 붙들었다.
“선배, 오신 김에 한 잔 하고 가세요.”
“니들끼리 마셔. 계란찜 하나 서비스 줄 테니까 속 채우면서 마셔라.”
휙휙.
조용철은 직속선배 같은 오지랖을 부리며 멀어졌다.
테이블은 다시 태건과 친구들만 남았다.
조용히 있던 김윤재가 힐끔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크흠. 태건아. 그러니까…….”
우물쭈물.
그 모습이 선을 넘은 걸 사과하려는 조짐으로 보였다.
태건은 더는 이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휘저으며 소탈하게 넘겼다.
“됐어. 시답지 않은 소리 말고 잔이나 들어.”
“네가 다쳤단 게 신경 쓰여서, 너도 나 많이 도와줬으니까…….”
“아, 됐다니까. 김윤재, 잔 안 드냐?”
태건이 말을 끊고 툭 쏘아붙여 물었다.
그 의도를 알겠던지 정혜랑과 박유신도 동조했다.
“그래. 더 말하지 말자.”
“술자리니까 헛소리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분위기를 풀려 노력했다.
이내 태건과 친구들이 잔을 부딪쳤다.
째쟁!
“자, 마셔!”
모두 한 잔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난 후였다.
쪼르륵.
태건이 김윤재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윤재야. 생각해준 거 고마워. 고마운데…….”
“…….”
“한 번 더 그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린다.”
지잉!
태건의 눈빛이, 그리고 분위기가 날카롭다 못해 흉흉하게 돌변했다.
그걸 본 김윤재가 놀라 딸꾹질까지 했다.
“히끅. 으, 으응.”
끄덕끄덕.
재빨리 고갯짓하며 격하게 수긍했다.
그걸 본 태건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회사 들어간 거 축하하고, 얼른 보너스 많이 받아서 우리 맛있는 거 사주라.”
“그, 그래.”
“그럼 1차는 윤재가 쏜다니까 본격적으로 부어보자!”
태건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결정 내려버렸다.
기다렸단 듯이 정혜랑과 박유신이 격하게 동감을 표했다.
“윤재가, 쏜다!”
“유후, 허리띠 풀어!”
다들 환호했다.
당사자인 김윤재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이란?
긍정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서로 없던 일처럼 술을 따르고 마셨다.
대화의 주제도 서로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이 주를 이뤘다.
“교수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이야!”
“취준생이 용돈 좀 달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죄인이냐!”
“신입사원이 모를 수도 있지!”
술이 오르자 각자 속에 담은 말을 터트렸다.
태건도 한 소리 했다.
“어떻게 그렇게 제멋대로냐. 무슨 볶음밥이야? 알알이 따로 놀아!”
그 모든 건 술상대가 친구라 할 수 있는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술자리 최고 안주는 역시 험담이었다.
깊은 밤.
거나하게 취한 태건과 친구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대학가로 나왔다.
태건이 좌우 친구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끄으. 니들 봐서 좋다!”
“우리도 좋다!”
친구들이 화답했다.
그 기세에 태건이 목청 높여 제안했다.
“2차 가자, 2차!”
“2차는 역시 거기지!”
“출동!”
의견이 일치한 태건과 친구들은 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그 목적지는 바로 노래방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난리가 났다.
“첫 곡 뭐하지?”
“에잇, 이거지!”
토도독, 띵.
정혜랑이 순식간에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리고 나오는 음악은 전주부터 가슴을 뛰게 했다.
-투두두두!
흥겨운 전주에 모두가 일어나 방방 뜨기 시작했다.
김윤재는 넥타이를 머리에 올려 묶기까지 했다.
그리고 곧 정혜랑이 노래를 시작했다.
-푸른 언덕에!
한 마디가 끝난 바로 그때였다.
다른 마이크에 태건과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코러스를 넣었다.
“언덕으로 가자!”
-배낭을 메고!
“어디든 떠나자!”
코러슨지 고함인지 모를 외침을 사이사이 끼워 넣었다.
취해서 뭐라고 소리치는지도 몰랐다.
그저 각자의 답답함을 벗고자 여행이란 매개체에 흥분하고 있었다.
그 뒤로 계속 릴레이로 노래를 이어갔다.
댄스, 트로트 등등.
신나는 음악이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런 시간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다.
“아이고, 좀 쉬자.”
“음료수 좀.”
벌컥벌컥.
땀을 훔치며 수분보충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땀을 뺀 덕분인지 술기운은 어느 정도 날아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 조금 길어져갔다.
시간도 거의 다 되어갔다.
그때 태건이 기세 좋게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18번 한 번 땡겨줘야지.”
뚝.
동시에 시작 버튼을 눌렀다.
-지잉, 지지징!
느릿하며 애절한 일렉트로닉 기타 전주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이어서 태건이 노래를 시작했다.
-쉬스 곤, 아롭 말라잎…….
그 순간 친구들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헛, 저 노래는…….”
“쟤는 왜 끝날 때만 되면 저래!”
“아, 뭔 일 있어, 분명히 있어.”
알 수 없는 뇌까림을 흘렸다.
그런 친구들의 공통적인 행동이 하나 있었다.
꾸욱.
양손으로 귀를 막는 거였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곧 알게 됐다.
이어지는 노래는 이내 절정으로 치달았다.
태건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포 깁미, 거얼…….
4단 고음 구간이다.
잘 뽑아내면 고음병 환자들에게 격찬 받는 구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건의 4단 고음은 가관이었다.
-어, 커어어, 꺼어어, 깩!
거기까지면 그래도 어떻게 이해할만했다.
그 후에 이어지는 고음 구간도 찢어진 목소리를 쥐어짜 이어갔다.
친구들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으으으. 누가 좀 꺼!”
“손 떼면 귀 터질 거 같아!”
“아악. 시작 전에 말렸어야지!”
친구들의 즐거운 노래방 시간은 괴로움으로 마무리 되어갔다.
정작 태건은?
‘오늘 고음 좀 되는데?’
혼자만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