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때 정혜랑이 미소를 굳히며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멋있어.”
“됐그덩.”
“그 옷을 찢은 게 응급처치 시작이었잖아.”
예기치 못한 말에 태건이 멈칫했다.
그래도 대답할 말은 있었다.
“그거야 손에 든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랬지.”
“그러니까 더 멋졌단 거 아니냐.”
쪼르륵.
반대쪽에 자리한 박유신이 물을 따르며 한 마디 거들었다.
태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했다.
“뭐가.”
“정말 눈 돌아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널 보니까 알겠더라.”
“…….”
“그 순간 넌 최고였어. 금산에서 어떻게 했을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였다니까.”
박유신의 대답이 좀 더 조리 있었다.
태건은 친구들에게 이런 칭찬을 듣는 게 멋쩍었다.
“야, 됐어. 그만해.”
“…….”
턱.
문득 다가온 손이 태건의 손등을 덮었다.
“음? 윤재야.”
태건이 그 손의 주인공을 나지막이 불렀다.
김윤재는 시선을 슬며시 피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해”
“넌 또 왜……. 아까 주춤거려서? 누구나 그래. 난 익숙하니까 동요하지 않은 거야.”
태건은 수더분하게 위로했다.
김윤재가 망설이고 소극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선 그렇게 행동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태건이 출동한 현장을 돌이켜봐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김윤재의 사과는 태건이 예상하는 이유와 달랐다.
꾸욱.
손등을 더 묵직하게 덮으며 말했다.
“은연중에 소방관을 깔보고 있었어.”
“…….”
“선배네서 했던 말, 사실 아예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어.”
“윤재야. 아까 끝난 얘기잖아.”
태건이 나지막이 대화를 끝내려 했다.
그러나 김윤재는 아직 자신의 사과가 성에 차지 않은 듯 했다.
“더 하면 너한테 진짜 얻어 터질까봐 말 안한 거야.”
“뭐, 더 했으면 때리긴 했겠지.”
“그냥 그 순간을 피했던 거라고. 속으로는 내가 더 잘났다고 우쭐대면서 말이야.”
“…….”
태건은 가만히 들었다.
아예 눈치 채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서로 더 이상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친구라서 모른 척 하고 있던 거였다.
정혜랑과 박유신도 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스윽.
그들도 아예 눈치 못 챈 건 아닌 모양이었다.
김윤재는 꺼내기 창피한 말일 터였다.
그럼에도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사람에게 달려가던 네 모습이, 그 피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네가……. 대단해 보였어.”
“…….”
“지금까지 나랑 같이 놀던 애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됐더라고.”
“뭐…….”
태건은 가볍게 추임새만 넣었다.
김윤재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현장을 누볐을지 감히 짐작도 안 되더라.”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진짜야. 진짜 미안하다. 내가 소방관을 우습게 본 거 정말 미안해.”
꾸욱.
김윤재가 태건의 손등을 더욱 강하게 붙들었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져 있기까지 했다.
진심이리라.
아니, 진심이 목소리부터 행동 하나하나에 녹아 있었다.
턱.
태건이 손을 돌려 맞잡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그래서 말인데.”
“한 대 치고 싶냐? 그래. 까짓것 한 대 맞지 뭐.”
스윽.
김윤재는 대놓고 얼굴을 내밀었다.
태건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하고픈 말을 이어갔다.
“그게 아니라, 좀 들어봐.”
“뭐든 말해.”
“……나 해장국 곱빼기로 먹어도 되냐?”
태건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진지하게 경청하던 친구들 반응은 황당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지, 지금 곱빼기 타령이 나오냐?”
“아후, 소방관 강태건이 멋지면 뭐해. 친구 강태건은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녀석인데!”
태건은 뚱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노래방에서 너무 소리 질렀나, 배가 다 꺼졌다고.”
“에휴휴.”
절레절레.
정혜랑과 박유신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김윤재는 그나마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곱빼기에 두 그릇 먹어.”
“오오. 윤재, 크게 쏘는데? 역시, 뭐든 따불이 좋은 거지.”
태건이 푸짐한 식사를 기대하며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김윤재가 부르르 떨며 스산한 목소리를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왜?”
“진지하게 사과하는데 너도 좀 진지하면 안 되냐. 꼭 이렇게 초를 쳐야겠어!”
울컥.
끝내 김윤재가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정혜랑과 박유신이 다급해졌다.
“야야, 잡아!”
“윤재야 주먹 내려!”
터덕.
친구들이 얼른 김윤재를 붙들었다.
김윤재는 온몸을 비틀며 버럭버럭 소리쳤다.
“놔 봐. 놔 보라니까.”
“아 좀!”
“야, 강태건.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네가 멋지긴 뭐가 멋져! 소방관은 몰라도 넌 아냐!”
김윤재의 울컥함으로 진지한 자리가 다시 엉망진창이 됐다.
태건은 이제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끼리 이게 맞지.’
진지한 사과는 낯간지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김윤재가 진심으로 사과한 순간 태건은 모두 털어버렸다.
친구니까 이렇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 * *
한 시간 후.
자정을 넘겨 새벽이 된 시간이다.
라텔의 숙소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끼익.
열린 문틈으로 태건이 조용히 들어왔다.
“살금살금.”
잘 시간이라 뒤꿈치까지 들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반대방 커튼이 거칠게 열리며 오광휘 단장이 불쑥 나타났다.
촤악!
“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들어와!”
“어엇, 쉿. 잘 시간입니다.”
태건이 화들짝 놀라 얼른 입단속을 했다.
그런데 깨어있는 건 오광휘 단장만이 아닌 모양이다.
펄럭!
“아무리 사내자식이라도 일찍 일찍 다녀야 할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좋은데, 일찍 다니자.”
“와, 왔어?”
“새벽까지 놀 체력이면 다 나았나 보네.”
투박함부터 삐딱한 투덜거림까지.
개성 가득한 선배들이 한 마디씩 하며 나타났다.
이 순간은 태건도 놀랐다.
“다들 언제 복귀하셨습니까?”
“한참 전에!”
“저 저녁 때 나갔는데요.”
“……그래도 한참 전에!”
멈칫한 황대산이 억지로 밀어붙였다.
그걸 보아하니 복귀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했다.
태건은 다시 만난 선배들 모습에 미소 지었다.
“잘 쉬다 오셨습니까?”
“너만큼 잘 쉬진 않았을 걸?”
오광휘 단장의 딴죽이 바로 들려왔다.
태건은 조금 황당했다.
“제가 애도 아니고, 새벽에 들어올 수도 있죠.”
“누가 그거 말해?”
“그럼요?”
“우린 SNS도 안 하는 줄 아냐?”
불쑥.
오광휘 단장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에선 동영상이 떡하니 재생되고 있었다.
-휘이이익. 특수소방단 멋지다!
-처음부터 다 봤어요. 진짜 끝내줬어요!
-강태건 선배님 파이팅!
응원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조금 전 그 일이었다.
태건은 멈칫했다.
“그게 벌써 알려졌다고요?”
“우리 막내가 너무 세상을 모르네. 요즘은 1분이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알아.”
고수현이 다가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다음 유중헌이 다가왔다.
“노, 놀랐겠다. 그래도 잘, 잘했어.”
“쟤가 그 정도에 놀랄 짬밥이냐. 강태건이, 남자답게 잘했어. 그렇게 훅 치고 들어가야지!”
황대산이 밝게 웃어보였다.
“소방관이 응급처치한 게 뭐 대단하다고.”
이지성은 늘 그렇듯 딴죽을 걸었다.
한 마디씩 꺼내니 어느새 북적북적해졌다.
이런 레퍼토리는 늘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이젠 익숙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태건은 선배들의 칭찬에 어깨를 슬쩍 넓혔다.
“크흠. 이번엔 칭찬 받겠습니다.”
“얼씨구. 이런 일엔 부끄러워하던 애가 웬일이래?”
“들어오는 길에 연락받았거든요.”
태건이 주저 없이 말했다.
모두 요구조자 소식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광휘 단장이 보다 적극적으로 물어왔다.
“뭐래, 어떻게 됐대?”
“과다출혈이 문제였는데 수혈 때려 박아 커버치고, 그대로 응급수술 밀고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liver laceration만 해결하면 생명엔 문제없을 거라고 합니다.”
태건이 훈훈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의 이유는 영어로 된 의학용어 탓이었다.
“……리, 리버가 간이지?”
“그 다음에 뭐라고 한 건지 아는 사람?”
단원들끼리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그때 이지성이 투박한 목소리로 답을 말해줬다.
“간열상, 간이 찢어졌다고요.”
“그, 그렇지. 난 딱 듣자마자 알았다니까!”
“나도!”
눈치 보던 선배들이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그 사이 이지성이 태건을 나무랐다.
“너도 가만 보면 참 영어 좋아해.”
“미국에서 배워서 입에 밴 거라니까요.”
“은근히 자기자랑 하는 스타일이야.”
스윽.
이지성이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가며 디스했다.
태건은 좀 억울했다.
“제가 언제 제 자랑했는데요!”
“…….”
“선배, 말 좀 해보시라니까요!”
태건은 울컥해 소리쳤다.
이지성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오광휘 단장이 바로 옆에서 귀가 따갑게 외쳤다.
“너 지금 잘했다고 목소리 커지는 거냐!”
“왜 말이 그리로 갑니까!”
태건은 바로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강태건이, 장한 일 했다고 선배들한테 그렇게 엉기면 쓰나!”
“대산 선배는 또 왜 그러세요.”
“저…… 태건아. 목소리 조금만 작게 해줄 수 있어?”
“아, 아으. 중헌 선배까지.”
마지막으로 고수현이 한 소리 했다.
“다들 놔두세요. 태건이가 오죽 잘났습니까. 라텔의 에이슨데 집안에서 큰소리치고 싶겠죠.”
“진짜 다들, 아으으!”
결국 태건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무슨 말을 해도 선배들은 놀림감으로 활용했다.
사실 모두 태건이 행한 멋진 응급처치에 대해 칭찬하는 거였다.
그러나 말이 비비 꼬여 있어 그들만 즐거웠다.
듣는 태건 입장은 속이 뒤집어졌다.
친구들과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하룻밤 꿈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태건의 현실은 여기였다.
별 거 아닌 걸로 놀리고 사람 속을 벅벅 긁는 선배들 틈바구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