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런데 태건만 새로운 용품을 소개하는 게 아니었다.
유중헌이 모두의 앞에 섰다.
그는 조금 색다른 모양의 무전기를 들어보였다.
“이, 이건……. 태건아.”
결국 소심한 그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태건에게 바통을 넘겼다.
짝.
다시 모두 앞에 서게 된 태건이 제대로 소개했다.
“이 무전기는 산업현장에서 쓰는 USIM 무전기입니다.”
“뭐가 달라?”
“통화가능 지역이 곧 무전 가능지역입니다.”
태건의 설명에도 오광휘 단장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통화불가능 지역은 꽝이란 거잖아.”
“그래서 단방향 무전 기능을 더했습니다. 그 비결은 중헌 선배에게 물으시면 됩니다.”
“뭐야, 그럼 중헌이가 직접 개선해서 만든 거라고?”
“손재주가 엄청 좋더라고요.”
태건이 유중헌에게 엄지를 내밀며 칭찬했다.
척.
“……쟤는.”
유중헌은 얼굴이 시뻘게지며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특수소방단은 육체와 정신에 이어 출동장비까지 업그레이드했다.
* * *
그러던 어느날.
장마가 끝나고 청명한 하늘이 열렸다.
그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속에서 라텔의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다!”
“드디어 왔다!”
다들 두 손 번쩍 들며 반겼다.
그날 저녁.
옥상에 파라솔을 펼쳤다.
특수소방단이 결성된 후 첫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들 마시자. 건배!”
“선배!”
턱!
종이컵을 투박하게 부딪치며 모두 한입에 털어넣었다.
다들 마시고 또 마셨다.
소주가 주르륵 놓여 있어 술잔이 마를 틈이 없었다.
어느새 얼큰하게 취한 오광휘 단장이 불쑥 종이컵을 높이 들며 말했다.
“정책과장님께 인사는 한 번 하고 마시자!”
“감사합니다!”
모두 벌겋게 취한 얼굴로 옥상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그 환호 끝에 이지성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 꼰대는 또 뭔 속셈이야.”
“하여간.”
그의 말을 들은 태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떤 일도 좋게 말하는 경우가 없었다.
오광휘 단장은 기분이 좋은 탓인지 수더분하게 넘어갔다.
“금산에 대학가까지, 연타석 홈런을 쳤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이강찬 기자였나? 다음에 기회 되면 우리 출동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싶다더라고요.”
“그 기자는 정신줄 놓은 거지. 아니다. 진짜 데려가 봐?”
단원들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겼다.
엄한 생각들에 오광휘 단장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나무랐다.
“짜식들이. 누구 신세 망칠 일 있냐.”
“진심은 아닐 겁니다. 워낙 위험해야죠.”
태건이 슬쩍 변호했다.
그러나 단원들은 그런 태건을 향해 뚱하니 말했다.
“진짜 데려갈까 하는데?”
“와, 진짜 나쁜 케이스네. 이상한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요!”
태건이 발끈하자 기다렸단 듯이 모두 웃었다.
역시 농담인 모양이다.
“하하하.”
“자, 드십시다!”
터덕!
소주가 가득한 종이컵을 부딪치며 기분 좋게 한 잔씩 들이켰다.
술이란 알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평소 얼굴만 보면 으르렁거리던 이들이 지금은 얼굴을 마주하며 웃고 있었다.
“하하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저런 대화도 자연스레 나눴다.
그 중에서도 출동에 대한 부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간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그런지 오늘 다 풀어버리려는 모양이었다.
“난 생전에 소방호스로 레펠하는 거 처음 봤다니까.”
“금산에서 라텔 하나란 무전을 들었을 땐, 진짜 아찔했습니다.”
“지영이하고 할아버지 업고 다리 건널 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웅성웅성.
불과 여섯 명뿐인데 한순간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태건도 기분이 좋아 먼저 술병을 들고 선배들을 찾아갔다.
“대산 선배. 한 잔 받으셔야죠.”
“오오옷. 듬직한 막내 강태건이. 크하하. 꽉꽉 따라봐. 남자답게 팍팍!”
“그럼요!”
콸콸.
종이컵이 꽉 차도록 술을 부었다.
황대산은 한 번에 들이켜고 털어낸 종이컵을 태건에게 건넸다.
“크흐, 좋다. 내 술도 받아야지!”
“주십시오.”
콸콸.
술을 따르며 황대산이 맥락없이 말했다.
“스포츠 센터에서 추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가, 갑자기요?”
“내내 말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어. 그냥 스리슬쩍 넘어가는 건 남자답지 못하잖아.”
황대산이 듬직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소와 다르게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취한 모양이다.
태건 또한 술이 꽤 올라온 상태였다.
쭈욱!
종이컵 가득한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 종이컵을 돌려주며 태건이 넉살 좋게 말했다.
“아으! 선배, 사과 받았고요. 이건 화답입니다.”
“으하하하. 역시 성격 좋아.”
“제가 한 성격하죠. 그런데 왜 남자다움을 매번 강조하십니까?”
태건은 꾹꾹 누르고 있던 질문을 이 자리를 빌려 꺼냈다.
순간 황대산 표정이 쓰게 변했다.
그리고 투박한 손길로 종이컵을 비웠다.
쭈욱!
“푸하. 한 잔 더 해야지?”
그는 스리슬쩍 말을 돌렸다.
태건은 빈 잔을 채워주며 슬쩍 떠봤다.
쪼르륵.
“민감한 부분을 꺼낸 거 같네요.”
“뭐……. 그냥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줘.”
황대산은 싱겁게 넘기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지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한테 대차게 까였겠지.”
갑작스런 끼어듦에 태건이 깜짝 놀랐다.
“엇, 언제 오셨습니까?”
“니가 오셨습니다.”
이지성은 그 자리에 있었음을 비비 꼬아 말했다.
‘참 성격 유별나.’
술을 마시니 그 성격이 더 도드라지는 거 같았다.
태건은 공연히 따지고 들지 않았다.
좋게 시작된 자리면 마지막까지 좋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데 황대산은 같은 생각이 아닌 모양이다.
턱.
벌겋게 취한 얼굴로 이지성의 어깨를 잡아채며 으르렁거렸다.
“이지성이, 지금 뭐라고 그랬냐.”
“왜요. 찔려요?”
이지성은 툭 쏘아붙였다.
그 순간 황대산이 이지성의 어깨를 강하게 찍어 눌렀다.
꽈아악.
“너, 뚫린 입이라고 계속 함부로 지껄이는데. 그러다 진짜 입원할 수가 있어.”
“크윽. 이러니까 차이지.”
“이 자식이!”
꾸깃!
황대산이 종이컵을 구기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정말 한 대 칠 기세였다.
태건은 얼른 그의 주먹을 붙들며 말렸다.
텁!
“에이, 에헤이, 황 선배.”
그 소리에 각각 떠들던 단원들 시선이 집중됐다.
오광휘 단장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니네는 또 싸우냐?”
“싸우는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장난입니다. 장난.”
스윽.
태건은 황대산의 주먹을 끌어내리며 대신 핑계를 댔다.
거기에 황대산을 향해 눈짓까지 더했다.
“대산 선배.”
“흐음.”
황대산도 너무 과열되는 거 같아 그만두려 했다.
그런데 이지성이 문제였다.
“그게 뭐 대단한 자존심이라고. 그러니 여자들이 도망가는 거 아닙니까.”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황대산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누가 네 멋대로 판단하고 씨불이래. 이 시건방진 새끼가!”
터덕!
발끈한 황대산이 주먹을 들려했다.
그 주먹은 태건이 철통방어 중이었다.
“끄으응. 황 선배. 기분 나쁜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강태건, 이거 안 놓냐?”
“에이, 선배.”
“놔라. 내가 오늘 저 삐뚤어진 입을 아주 조사 버려야겠으니까!”
화르륵.
황대산의 등 뒤에서 불꽃이 넘실거렸다.
머리끝까지 제대로 화난 모양이다.
태건은 분란의 씨앗인 이지성을 타박했다.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듭니까!”
“내가 뭘.”
“사과를 하든지, 내려가 자빠져 자든지 하세요.”
훅!
태건도 술김이라 감정이 올라와 말이 거칠어졌다.
이지성은 이런 상황에서도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저러는 건 뭔가 있단 거 아니야?”
“아, 진짜!”
태건도 짜증이 확 치고 올라왔다.
스륵.
동시에 황대산의 주먹을 풀어줬다.
“음?”
황대산이 멈칫하자 태건이 턱짓하며 말했다.
“저도 모르겠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얼마든지.”
텅!
황대산이 주먹을 부딪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정말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사삭!
그때 오광휘 단장이 황대산을 막아서며 모두를 나무랐다.
“술 쳐 먹고, 왜 깽판 죽이고 염병이야!”
“…….”
“그리고 강태건, 말리다 말고 빼는 건 뭐하는 경우냐!”
오광휘 단장의 불똥이 태건에게 튀었다.
태건은 심히 억울했다.
“제가 안 말렸습니까?”
“말리려면 끝까지 말리던가, 이게 뭐야!”
“단장님이 하세요. 내내 못 본 척하시다가 왜 이제 이러십니까.”
태건의 반발에 오광휘 단장이 울컥했다.
“이노무 시끼가, 너 말 다 했냐!”
“좀 덜했습니다. 매번 귀찮은 건 다 저한테 떠넘기잖습니까. 저도 싫은 소리하기 싫습니다!”
“그러는 지는. 뭔 일만 나면 날 바지 단장 만들어 버리잖아!”
으르렁.
태건과 오광휘 단장의 싸움으로 변해갔다.
서로 같은 소방서 출신이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순간적인 트러블을 억지로 인내한 일들이 많았다.
그게 술을 통해 제대로 터진 모양이다.
태건은 오광휘 단장의 짜증에 어이없어 했다.
“툭하면 라면 찾으시면서 떠넘기는 건 누굽니까?”
“떠넘겨? 현장에서 견장 떼라고 협박하던 놈이 할 말이냐!”
“그럼 잘 하셨습니까? 뭔 일인지 몰라도 눈 돌아서 현장지휘도 내팽개쳤으면서!”
“뭐어? 눈 돌아? 진짜 돌아? 확 돌아버릴까!”
터억!
오광휘 단장이 화를 뿌리며 성큼 다가섰다.
서로 얼굴이 맞닿을 거리였다.
험악한 기세로 태건을 압박하는 거였다.
태건이 뒤로 물러설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가 없는 말 했습니까!”
“이 자식이, 코찔찔이 때부터 오냐오냐 해줬더니!”
“언제요. 대체 언제요!”
“내가 너 때문에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걸 확!”
휙!
울컥한 오광휘 단장이 손을 들었다.
그 손을 어느새 다가온 유중헌이 다급히 붙들었다.
터억!
“그, 그, 단장님, 이, 이러지 마세요.”
“넌 말이나 똑바로 해, 시꺄!”
“네?”
“운전대 잡기만 하면 맞먹으려고 하는 놈이, 평소에는 아닌 척이나 하고 말이야. 그렇게 이중적으로 살지 마라. 앙!”
오광휘 단장의 화가 유중헌에게로 향했다.
“…….”
유중헌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