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154)화 (153/320)

154화

그때 옆에서 고수현이 기사 내용을 짤막하게 읽어줬다.

“국민들이 성원으로 보내주신 후원금을 함께 고생하다 부상당한 소방관들 치료에…….”

다른 자리에 앉은 황대산은 다른 내용을 읊었다.

“병원장은 최고의 의료서비스 제공을 약속하였으며…….”

유중헌도 더듬거리며 소리를 냈다.

“댓글 무지하게 다, 달리고 있습니다. 소방관들은 왜, 왜 전용 병원이 없냐고…….”

태건은 오광휘 단장에게 말했다.

“벌써 반응이 온답니다.”

“……이 자식, 잔머리는 하여간.”

푸슈슈.

당장 달려들 거 같던 오광휘 단장의 불같은 화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히 가라앉았다.

태건은 짓궂은 미소로 말했다.

“우리 목표 중에 하나잖습니까.”

“그래도 짜샤. 말은 해줬어야지. 에휴, 이제와 따지기도 뭐하고……. 야, 내 말 안 듣냐!”

힐끗 쳐다본 오광휘 단장이 빽 소리쳤다.

태건은 어느새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이강찬 기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거였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일단 기사부터 낸 거고요. 이따가 뉴스에 단신으로 보도될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야 일거리 챙겨주셔서 좋지요. 그보다 단장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거 같던데요.”

이강찬 기자는 조금 걱정된 모양이다.

태건은 수더분하게 말했다.

“때론 모르고 당해야 좋은 일도 있는 겁니다.”

“그건 단장님 생각도 들어봐야 할 거 같네요.”

“안 그래도 옆에서 눈에 불 켜고 계십니다.”

“위험에서 꼭 살아나시기 바랍니다. 그럼 새 소식 들어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강찬 기자의 목소리에 호의가 가득했다.

어제 현장에 들어왔다더니.

그 후로 뭔지 모를 끈끈함이 생긴 모양이었다.

*  *  *

며칠 후.

이지성이 훈련장으로 복귀했다.

턱.

목발을 짚고 사무실에 들어온 이지성이 퉁명하게 말했다.

“저 왔습니다.”

그를 본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에? 벌써 퇴원했어?”

“의사가 그래도 된대?”

“아픈데 억지로 기어 나온 거 아니지?”

모두 걱정과 우려를 보였다.

그 외에 어떤 안타까움이나 연민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지성은 전과 다름없는 모습에 태건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단 걸 알아챘다.

물론 겉으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건이는 왜 코빼기도 안 보입니까?”

“무전 대기. 그런데 왜 벌써 퇴원했냐니까.”

“누워서 비비적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차라리 무전대기나 하렵니다.”

턱. 턱.

시크하게 대답한 이지성은 그대로 헬기 쪽으로 향했다.

반면 단원들은 모두 갸웃거렸다.

“병원보다 무전대기가 편해?”

“병원비 많이 나올까봐 그러나?”

“본인 부담도 아닌데, 병원이 갑갑한 건 맞지만 말이야.”

이지성이 이렇게 빨리 나타난 데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한편.

헬기에선 태건이 망중한?

아니, 무전 대기 중이었다.

치이이.

무전기는 전과 달리 전파소리만 가득했다.

이번 현장 활약으로 이젠 호출전용 주파수가 지정된 탓이다.

덕분에 무전 대기하는 시간이 한가해졌다.

“음음음.”

까딱까딱.

뒷좌석에 길게 누워 발을 까딱이는 폼이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그림자가 슬쩍 비쳤다.

고개를 들어본 태건은 이지성이 보이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엥, 선배가 왜 여깄습니까?”

“이리 나와. 무전대기나 하게.”

“좀 더 쉬시지…….”

“걸리적거리니까 나오라고.”

터억!

이지성은 태건의 어깨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그 강압적인 행동에 태건은 얼떨떨해하며 헬기 밖으로 끌려 나왔다.

“어라라?”

“으쌰. 역시 여기가 명당이야.”

스윽.

이지성이 태건과 똑같이 누우며 감탄을 자아냈다.

졸지에 쫓겨난 태건은 눈만 끔뻑거렸다.

“이거 참.”

“혼자 있을 건데, 좀 가주지?”

대놓고 쫓아내기까지 했다.

그 말투는 여전히 싸늘하고 비틀려 있었다.

그런데 태건의 귀엔 조금 다르게 들렸다.

“다들 좀 더 쉬라고 일찍 오신 겁니까?”

“뭐래. 병원에서 심심해서 퇴원했다니까.”

“정말입니까?”

스스슥.

태건의 두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 의미심장한 표정을 본 이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

풀썩.

“아, 자식. 쉬지도 못하게 더럽게 쨍쨍거리네. 좀 가라.”

밀어내는 뉘앙스가 한층 더 까칠해졌다.

괜히 한소리를 들은 태건이지만 얼굴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인사한 태건은 그 길로 헬기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읊조렸다.

“절대 심성 나쁜 선배 아니야.”

말투가 까칠하고 성격이 모난 건 사실이다.

그 비비 꼬인 말을 잘 풀어내면 전혀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그 속뜻이 태건에게는 확실히 읽혔다.

그날부터 이지성이 무전 대기를 전담했다.

덕분에 다른 단원들의 여유시간이 확실히 늘어났다.

처음 갸웃거리던 단원들도 시간이 갈수록 합리적인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쟤가 그냥 퇴원한 게 아닌가?”

“단장님, 설마 지성이가 우리 쉬라고 퇴원한 겁니까?”

“고수현이, 너무 앞서 갔어. 이지성이가 그럴 인간이야?”

“그렇죠? 그건 아닌 거 같죠.”

단원들은 확신이 없어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다.  

태건은 그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해시키는 게 더 이상하잖아.’

힌트라도 주고 싶지만 가정사가 얽힌 문제라 삼갔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폐점 마트 대형화재에 대한 이슈는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느날 오후.

띠리릭.

휴대폰이 울었다.

상대를 확인한 태건이 멈칫했다.

- 정연미.

전혀 예상치 못한 통화상대였다.

심지어 몇 달 만에 연락이 왔다.

태건은 잠시 바라보다 갸웃거렸다.

“내가 피할 건 아니잖아.”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갑자기 전화가 온 게 신경 쓰였다.

태건은 여러 생각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 잘 지냈어?”

“……여전하네.”

“나야 늘 똑같지. 그런데 어쩐 일이야?”

태건은 담백하게 물었다.

오히려 전화한 정연미가 주춤거렸다.

“어, 그러니까……. 다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갑자기 정연미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갸웃거리던 태건이 물었다.

“누구랑 같이 있어?”

“저기, 어어어?”

정연미 목소리가 돌연 멀어졌다.

그러더니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 선배. 저 미주에요!”

“어어. 손미주.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내.”

태건은 뜻밖의 상대였지만 친한 후배라 반갑게 물었다.

손미주는 대답이 아니라 대담한 반문을 던졌다.

“둘이 무슨 일 있었죠?”

“일? 무슨 일?”

“에이. 지금 혜랑 선배하고 유신 선배랑 같이 있거든요. 선배가 노래방에서 스피커 찢어 버릴 뻔한 일도 다 들었어요.”

그 말은 들은 태건의 표정이 살짝 어긋났다.

어느덧 이마엔 힘줄도 생겨났다.

빠직.

“하여간 친구란 녀석들이 뒷담화가 까고 말이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혹시 연미랑 싸운 거 아니에요?”

“어이, 후배님. 연미가 아니라고 했으면 아닌 거지, 날 떠보는 이유가 뭐야?”

태건은 이미 손미주 머리 위에 있었다.

그 추측이 맞았는지 손미주 목소리가 멈칫했다.

“그런 건 아닌데……. 아차, 아무튼 태건 선배 너무너무 멋져요, 이제 연미 바꿀게요!”

손미주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건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어이없어 했다.

“아무리 주말이라도 그렇지, 누가 쟤 낮술 먹였어?”

그 궁금증은 다시 정연미가 대답해줬다.

“안 마셨어. 원래 미주가 정신이 좀 없잖아.”

“상당히 그렇긴 하지. 그보다 애들이 전화해 보라고 해서 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전달해줄 게 있는데, 혹시 시간 있어?”

정연미가 슬쩍 물어왔다.

태건은 갸웃거렸다.

전달이라, 내가 준 선물 중에 돌려받을 게 있던가? 

태건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한 출동 대기 중인 상태라 혼자 결정 내릴 순 없었다.

“단장님께 여쭤보고 연락 줄게.”

“응. 알았어.”

“그래. 그럼.”

스윽.

휴대폰을 내린 태건은 볼을 긁적였다.

“뭘 준단 거지?”

의구심이 깊어질 때였다.

스스슥.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태건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통화한 거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선배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속삭이는 소리들도 들려왔다.

“쟤 여친 있었나봐.”

“헤에. 저 성격에 그게 가능합니까?”

“내 말이. 천사네. 분명 천사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몰래 대화했다.

그러나 태건은 바로 짚어냈다.

“대산 선배, 수현 선배, 다 들립니다.”

“크흐흠.”

호명 당한 선배들은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 태건을 응시하던 유중헌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배신자.”

태건은 그들을 뒤로하고 오광휘 단장에게 다가갔다.

“단장님.”

“연미 씨 전화야?”

오광휘 단장은 정연미에 대해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건도 간단히 물을 수 있었다.

“네. 외출 좀 해도 되겠습니까?”

“하긴 바람 쐴 때가 됐지. 그런데 헤어진 거 아니었어?”

“글쎄요.”

태건의 대답이 뜨뜻미지근했다.

오광휘 단장은 잠시 바라보다 나지막이 충고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트러블을 계속 안고 가는 건 서로 못할 짓이야.”

“나가보면 알겠죠.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태건은 인사하고 돌아섰다.

방금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저도 무슨 사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헤어졌다고 말하자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귀고 있다고 말하자니, 엄연히 공백의 시간이 존재했다.

어쩌면 태건 스스로도 그걸 확인하러 나가는 길인지도 몰랐다.

태건은 곧 숙소로 내려왔다.

그 전에 정연미와 약속을 확실히 잡은 상태였다.

척, 척.

“장마도 끝나고 이제 완전 여름이니까.”

날씨를 고려해 가벼운 옷으로 골라 입기 시작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까똑.

-(정혜랑) 넌 짜샤, 우리한테 잘 해야 돼.

-(박유신) 말은 바로 하자. 우리를 앞에 내세울 건 아니지.

그 메시지 내용들을 본 태건은 더욱 갸웃거렸다.

그래서 메시지를 보냈다.

토도독.

-(강태건) 알아듣게 말해.

-(정혜랑) 만나면 알게 될 걸 미리 다 알려주면 재미없지.

-(강태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뭔 소리냐니까.

- …….

-(강태건) 야, 인마. 이 자식들아. 야야야!

태건이 몇 번이나 불렀지만 친구들의 답신은 끝내 입력되지 않았다.

전화를……. 됐다.

쑥!

태건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곧 만날 건데 굳이 번거롭고 싶지 않았다.

이내 사복을 갖춰 입은 태건이 나름대로 멋을 부리며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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