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155)화 (154/320)

155화

한 시간 후.

태건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서 있었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만남의 장소로 익히 알려진 장소였다.

그만큼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태건을 슬쩍 힐끔거렸다.

“맞나?”

“아닌가?”

“비슷한 거 같은데.”

알아보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건이 사복차림이었고, 그 화재 사고 이후로는 TV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갸웃거리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저기, 맞지? 맞네.”

“모른 척 해. 괜히 아는 척하면 저 사람이 피곤해져.”

“얼굴 봤으면 된 거야. 화면보다 실물이 나은 건가? 아닌가?”

스윽.

태건임을 알아보면서도 지나가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현재 장소와 수많은 인파 등을 고려한 배려였다.

태건도 원치 않게 듣게 됐다.

‘감사하네.’

배려는 역시 한국인이 최고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태건의 표정이 살짝 어색하게 변했다.

사사삭.

수많은 인파들 중 한 명이 딱 시선을 잡아끈 탓이었다.

정연미다.

신기하게도 한 눈에 알아봤다.

“저 원피스 보니까 정말 여름 맞나 봐.”

정연미가 여름마다 입는 옷이다.

추억이란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정연미도 태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태건을 정확히 응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주보고 있던 태건이 쓴 미소를 지었다.

‘참 기분 묘하네.“

태건은 지금 기분이 너무도 생소해 딱히 표현할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 태건은 어느새 정연미를 맞으러 나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절대 의식하고 하는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언젠가부터 몸에 배인 습관이었다.

이내 두 사람이 가까이 마주 섰다.

스윽.

어색하게 손을 든 정연미가 먼저 인사했다.

“오, 오랜만.”

“그러네. 여기 사람들 많으니까 일단 어디 좀 들어갈까?”

“응. 저쪽이야.”

스륵.

정연미가 손짓하며 태건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저벅저벅.

대로에서 골목길로 접어들 때였다.

갑자기 태건이 자그마한 웃음을 터트렸다.

“풋.”

“왜? 나 뭐 묻었어?”

정연미가 얼른 화장품을 꺼내려 했다.

그때 태건이 옅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냥 우리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 카페는 항상 내가 가자는 대로 갔으니까.”

“카페는 끝내주게 잘 고르니까. 이번에도 기대할게.”

태건은 진심어린 기대감을 보였다.

잠시 후.

태건은 카페 안에 들어와 있었다.

모던풍의 세련된 인테리어로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였다.

둘러본 태건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아.”

“그래? 그럼 다행이야.”

쪼르륵.

정연미는 대답한 후 얼른 음료수를 마셨다.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전해줄 게 있다더니?”

“아, 어……. 이거.”

부스럭.

핸드백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그걸 본 태건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내가 돈 빌려준 적 있어?”

“훗, 오빠도 참.”

“어이없는 심정은 알겠는데, 내 심정도 만만치 않아.”

힐끔.

말하는 동시에 봉투를 눈짓해 보였다.

그에 대해 정연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동아리에서 모은 후원금이야. 계좌로 보내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직접 전해주자고 했어.”

“쓰읍,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선배님들한테 그렇게 말할 용기 있음 안 받아도 돼.”

스윽.

정연미가 당돌하게 말하며 봉투를 태건 앞으로 밀기까지 했다.

그 당찬 모습의 이유를 태건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봉사동아리가 뭔 일만 있으면 OB들이 더 난리야. 이번엔 기수가 어디까지 올라가는데?”

“하늘 말고, 우주급 선배님들.”

“그럼 최소한 열 기수 위라는 거네……. 그럼 안 받을 수가 없겠어.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턱.

태건은 더 실랑이 하지 않고 넉살을 부리며 봉투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결정했음 그걸로 끝이다.

OB회계 담당인 정연미 표정이 그제야 조금 부드러워졌다.

“끝까지 안 받는다고 하면 관웅 선배님이 전화하라고 했는데. 안 해도 되겠네.”

“그 선배님한테 일렀다가는 나 죽어.”

“선배님도 잘 알고 계시더라……. 그리고 이건 내가 주는 거야.”

척.

핸드백에서 또 다른 봉투가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하얀 봉투가 아닌 약국 봉투였다.

“이게…….”

태건이 의아한 뉘앙스를 풍길 때였다.

정연미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난,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고,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

우뚝.

봉투로 향하던 태건의 손이 멈췄다.

정연미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이어서 말했다.

“남들은 오빠 보면서 칭찬하고 환호하고 그러더라……. 그런데 난 마음이 너무 아팠어.”

“이거 그날 산거네.”

약국 봉투에 구매 일자가 적혀 있었다.

화재 현장이 생중계된 날과 똑같았다.

그날부터 간직하고 있었으리라.

태건은 마저 손을 뻗어 꼭꼭 다물어진 약국 봉투를 열었다.

사락.

내용물을 꺼내본 태건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화상치료연고, 그리고 청심환이라……. 이 청심환은 뭐야?”

“화재 현장 속으로 들어갈 때 무서울 거 같아서.”

“그걸 보면서 마음 졸였던 네가 먹어야할 거 같은데.”

태건이 놀리듯 말하자 정연미가 살짝 발끈했다.

“오빠는 그런 엄청난 화재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안 무서워?”

“전혀.”

“어?”

정연미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태건은 한층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다. 남들도 무모해 보인다고 하긴 하더라.”

“그런데 오빠는 아니라고?”

“응. 아니야.”

태건의 대답이 너무도 단호했다.

오히려 정연미가 이해가 되지 않아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

“난 아니, 우리는 항상 최선의 길을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물론 위험할 수 있지. 하지만 난 그 속에서도 모두가 살아나올 수 있는 길을 찾을 거야.”

태건의 대답은 전에도,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덤덤했다.

게다가 그 여유로움 속에 가득한 확신마저 느껴졌다.  

정연미는 그런 태건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놓을 생각이 아예 없는 거 같네.”

“그 맛에 너무 길들여져 버렸나봐. 어떻게 해봐도 빠져나올 길이 보이지 않아.”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음……. 아마도?”

태건이 의문형으로 말하며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는 어떤 꾸밈도 없었다.

확신만이 가득했다.

정연미는 그런 태건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화를 나눠보고야 자신의 마음이 어디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오빠 마음대로 해.”

“왜 뒷말이 있을 거 같지?”

“있으니까……. 나도 이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꾸욱.

정연미가 앙증맞게 주먹을 쥐었다.

태건은 그 결심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연미가 한 번 고집을 세우면 누구도 꺾을 수 없던 탓이다.

그래서 태건이 조심스레 걱정을 보였다.

“연미야,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앞서가지 않는 게…….”

“나랑 데이트 해.”

“……그래. 데이, 뭐?”

“오늘 나랑 데이트하자고. 내일 일은 모른다며, 그러니까 오늘 해. 당장.”

퉁.

앙증맞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 모습에 태건은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 푸하하하.”

“왜 웃어. 난 진지한데.”

“우리 사귈 때가 생각나서. 내가 너 좋아한다니까, 언제 봤다고 그런 말을 하냐고 막 야단쳤잖아.”

“어? 어어.”

푸슈슈.

정연미의 머리에 김이 솟구치며 얼굴이 시뻘게졌다.

거기에 태건이 눈웃음 지으며 짓궂게 놀렸다.

“그래놓고 뭐랬더라?”

“기, 기억 안 나.”

“설마. 기억 날 텐데. 후후.”

태건이 계속 툭툭 자극하자 정연미가 귀까지 뻘게지며 말했다.

“기다려 봐요. 선배 매력이 뭔지 좀 찾아보고 결정할게요……. 라고 했어.”

“그 다음이 진짜지. 그날 동아리 방에서 술 엄청 먹고 너희 집 앞에서 네가 먼저 키…….”

“오빠!”

정연미가 빽 소리쳐 태건의 입을 막았다.

그 다급한 외침에 모두가 이쪽으로 이목이 집중됐다.

“무슨 일이야?”

“신경 꺼. 딱 보니까 사랑싸움이네.”

“요란하게들 한다.”

웅성웅성.

카페는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갔다.

태건은 가만히 지켜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우리 오늘은 복잡한 거 다 잊고, 신나게 노는 거다. 알았지?”

“……흥.”

“또 삐친 척이야? 연미야, 자.”

스윽.

태건이 부드럽게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힐끗, 힐끗.

주저하던 정연미가 뚱한 얼굴로 끝내 그 손을 잡았다.

턱.

“칫.”

“따뜻하네.”

사락.

태건은 가볍게 맞잡은 손을 쓸며 감상적으로 말했다.

“…….”

정연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도 빼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서로의 온기였다.

태건도, 정연미도 조금씩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던 중이었다.

뚜벅뚜벅.

누군가 멀리서부터 인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흠흠.”

“엇. 누가 와……. 어?”

스윽, 턱.

정연미가 손을 빼려했지만 태건은 놓아주지 않았다.

“어쩌라고.”

태건은 당당했다.

그 사이 다가온 상대는 40대의 여성이었다. 세련된 옷차림이 카페 분위기와 너무도 찰떡궁합이었다.

그녀는 디저트가 가득한 접시를 내리며 말했다.

탈칵.

“여기 사장이에요. 아까 주문할 땐 제가 미쳐 몰라봤지 뭐예요. 호호.”

“뭔가 테이블을 착각하신 거 같은데요.”

“위트도 있으시네요. 강태건 특수소방단원님.”

똑 떨어지는 사장의 호명에 태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스윽.

그제야 정연미의 손을 놓으며 제대로 인사했다.

“눈썰미가 끝내 주시네요. 강태건입니다.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만 알아보나요. 다 아는데 불편할까봐 모르는 척하는 거지.”

“네? 아, 그런가요.”

“그날 마지막 구조한 아이 안고 나와서 제가 소리쳤잖아요. 그때 여기 모두가 다 같이 소리 질렀잖아요, 난 우리 카페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호호. 그럼 대화들 나눠요.”

사장은 살갑게 대화하고 눈치껏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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