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156)화 (155/320)

156화

태건은 접시에 수북한 각종 디저트에 눈을 끔벅거렸다.

“뭘 이렇게나 많이. 이건 남기면 실례니까 다 먹어야겠어.”

“그럼 하나라도 남기면 안 돼.”

“각오가 아니라, 입맛을 다시는 거야?”

“예의 차리는 거야. 어서 먹자.”

스윽.

말은 그래놓고 정연미가 먼저 디저트에 손을 뻗었다.

“냠냠.”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태건의 눈에 귀엽게 보였다.

그런 태건도 곧 디저트에 손을 댔다.

“후우, 시작해 보자.”

나름의 각오까지 다졌다.

그만큼 디저트의 양이 상당했다.

간식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고.

또 서로 눈을 맞추고, 간간이 대화도 나누고.

모든 연인들이 즐기는 달콤한 시간이 이어갔다.

태건은 이 순간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뭔가 부족한 거 같더니, 이거였구나.’

불과의 사투.

요구조자의 구출.

거기서 찾아오는 성취감과 확연히 달랐다.

늘 긴장의 연속인 신경이 순식간에 릴렉스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미지의 부분이 재충전 되는 기분이었다.

정연미는 디저트에 야무지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었다.

‘우리 오빠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는 분들이 있다니.’

비단 카페 사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은연중 카페의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개 소방관이 이런 주목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희생.

정연미는 그 말의 무게가 생각보다 더 무겁단 걸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데 성공했다.

도전 끝에 남은 건 달디 단 입속이었다.

“푸하, 여기 김치는 없겠지?”

“난 디저트 마니아인데. 오빠, 나도 김치.”

“음료수까지 단 걸 시켰더니, 와. 입속이 너무 달아서 얼얼한 건 처음이야.”

“나도.”

정연미의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태건은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정연미의 손을 붙들었다.

턱.

“뭐가 더 나오기 전에 가자.”

“응. 응. 완전 찬성.”

합이 맞은 두 사람은 재빨리 소지품을 챙겨 움직였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순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은 카운터에 멈춰 사장에게 인사했다.

“사장님, 너무너무 잘 먹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황홀했어요.”

태건과 정연미는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장은 환히 웃으며 기뻐했다.

“입이 즐거우셨다니 너무너무 기쁘네요. 그런 의미에서 사인 한 장 어때요?”

스윽.

사장이 펜과 종이를 건네며 짓궂게 눈썹을 들썩였다.

태건은 솔직히 낯부끄러웠다.

거절하려던 찰나, 무슨 생각인지 일순간 마음을 돌렸다.

“……사인까진 아니고요. 그냥 낙서 한 번 하겠습니다.”

슥삭삭.

그러면서 동시에 손기술을 발휘했다.

종이 밑에 디저트 값을 스리슬쩍 밀어 넣은 거였다.

‘2만원이면 되겠지.’

장사하는 분이다.

호의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손해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곧 두 사람이 나란히 카페 밖으로 나왔다.

태건은 지체 없이 저녁메뉴를 추천했다.

“설렁탕 어때?”

“어, 그거, 지금 딱 그거야.”

“바로 가자.”

척.

태건은 결정하자마자 발을 옮겼다.

그때 정연미가 팔짱을 끼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데 오빠, 혹시 사인 종이 밑에 디저트 값 넣었어?”

“……응, 2만원.”

“그 정도면 5만원도 넘어.”

“정말? 기왕 들킨 거 드리고 가자.”

태건은 결심과 함께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턱.

정연미가 힘을 주며 막았다.

“아니야, 가지마.”

“왜?”

“여기.”

스윽.

정연미가 2만원을 불쑥 내밀었다.

그걸 본 태건이 멈칫했다.

“이걸 언제 받아왔어?”

“마들렌 주실 때, 어설픈 손기술은 훤히 보인다고 전해달래. 그리고…….”

“뭐가 또 있어?”

“오늘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죽여 버린대. 그 사장님 과거가 의심되는 분이야. 진짜 무서웠어.”

파르르.

팔짱 낀 정연미의 손이 진동했다.

태건의 머릿속에 일순간 그림이 그려졌다.

온화했던 사장님의 또 다른 얼굴.

챙!

상상하는 순간 태건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히끅.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 철수, 철수.”

“응.”

태건과 정연미는 종종걸음으로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갔다.

두 사람은 식사로 데이트를 마무리 짓지 않았다.

잠깐 오락실에 들러 같이 게임도 하고, 스티커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커플석에 앉아 영화도 봤다.

그 다음 코스로 술도 한 잔 기울였다.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고 빡빡하게 일정을 이어갔다.

제한된 시간이 주는 압박감 탓이었다.

내가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게.

상대에게 이 시간이 소중히 기억되게.

태건과 정연미는 그들만의 색다른 데이트를 하나씩 채워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깊은 밤이 찾아왔다.

자정도 넘은 시간이었다.

강남에서 시작된 그들의 데이트 장소는 어느새 잠실로 넘어와 있었다.

동부간선도로가 바로 머리 위를 지나가는 탄천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근처에 정연미의 집이 있었다.

저벅, 저벅.

탄천변을 걷던 태건이 불쑥 말을 꺼냈다.

“오늘 오랜만인 게 너무 많네.”

“대학 다닐 땐 거의 매일 이 길로 데려다줬어. 졸업하고는 다른 길로 옮겼지.”

“그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아 좋네.”

척. 척.

두 사람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걸었다.

딱히 으슥한 곳을 찾아온 건 아니었다.

걷다보니 이 길로 오게 된 거였다.

치열한 데이트로 끝내고 싶지 않아 찾아온 건지도 몰랐다.

조용한 길이라 그런지 마음도 가라앉는 거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위아래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바로 아파트 단지다.

데이트의 끝이 다가온단 의미였다.

그때 돌연 태건이 정연미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왜?”

“음. 그러니까…….”

태건이 뭔가 말을 꺼내려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부스럭.

동부간선도로를 받치는 기둥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이욜, 그림 좋은데?”

껄렁껄렁.

남자 세 명이 시뻘건 얼굴로 담배연기를 뻐끔뻐끔 뿜었다.

척 봐도 술에 상당히 취한 거 같았다.

그리고 썩 선량해 보이지 않는 걸음걸이와 말투였다.

그 순간 태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정연미에게 물었다.

“이 동네 언제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졌어?”

“그냥 가자.”

“가야지. 나도 쓸데없는 트러블은 사양이야.”

스윽.

태건은 정연미를 챙기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한 명이 탁 풀린 눈으로 태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곧 알아봤다.

“오오, 이게 누구야. 강태건이!”

“아는 애야?”

“몰라 새꺄? 딸꾹! 특수소방단 강태건이잖아.”

“오호, 그 강태건이. 이야, 너 반갑다. 이 동네 사냐?”

툭. 툭.

건들건들 다가와 손등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일순간 태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술 많이 드신 거 같은데, 조심히 들어가세요.”

애써 좋게 말하고 떠나려 했다.

그런데 남자들이 그 길을 떡하니 막아섰다.

“끄윽. 어딜 가, 새꺄. 내가 칵, 퉤. 내가 저기 뛰어들면 어쩌려고.”

“소방관이 얼른 뛰어가 구해야지. 크으읍. 그게 강태건이가 하는 일이지!”

“이렇게 유명하신 분이, 끅. 나 같이 막 사는 놈도 구해주나?”

“큭큭. 뛰어들어 보면 알겠네. 막, 투두두. 헬기 타고 날아올 거잖아.”

“쒸파. 알량한 인기 좀 있다고 고개 빳빳이 들고, 이 쉐끼야. 니가 뭐 그렇게 잘 났어. 앙!”

남자들이 투덜거리며 이유 없이 버럭 소리쳤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우선 태건은 정연미를 슬쩍 뒤로 숨기며 말했다.

스윽.

“이쯤에서 그만 하시죠.”

태건은 최대한 침착하게 응대했다.

그러나 아무 목적 없이 시비 걸러온 상대에겐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

“와, 지금 그 말 좋다. 이쭈메소 고만 하시쥬. 크크크.”

“어라라, 뒤에 숨긴 건 여자친구야? 히끅. 반반하니 좋네.”

그들은 결국 정연미까지 들먹였다.

게슴츠레한 눈빛도 보냈다.

그 순간 태건의 온화한 분위기가 서서히 삭막함으로 물들어갔다.

그걸 가장 강렬히 느끼는 건 정연미였다.

사락.

얼른 옷자락을 쥐며 태건을 타일렀다.

“오빠, 또 그때 다른 학과 선배들처럼 피떡 만들려고 그래. 하지 마. 그냥 가자.”

“…….”

“난 괜찮으니까, 집에 가면 되고, 여기 안 오면 되니까 정말 괜찮아.”

“…….”

태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남자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인내심은 이미 끊어졌다.

김윤재는 친구라서 참았지만 저들은 타인이다.

정연미가 잡고 있어 제자리에 멈춰 있는 거뿐이었다.

그런 사정을 이미 술에 만취한 남자들이 알 리가 없었다.

이유 없는 시비.

그런데 툭툭 내뱉다보니 결국 본심이 터져 나왔다.

“쓰블, 넌 뭐가 잘났는데 다 가졌어. 이 엿 같은 새끼야.”

“니 여친 딱 보니까 좀 사는 X같네. 그게 네 빽이냐? 썅, 겁나 좋겠다.”

“넌 되고 우리는 왜 안 되는데, 씨파. 너무 불공평하잖아!”

말도 안 되는 화를 계속 뿌려댔다.

결국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던 거고, 마침 태건과 정연미가 지나간 거다.

태건도 이내 눈치 챘다.

이미 욕을 들을 대로 들은 입장이다.

태건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리 만무했다.

“오늘 하루 기분 좋게 마무리 하나 했는데, 별 거지 같은 것들이 껴서 지랄이야.”

벅벅.

뒷머리를 긁으며 짜증을 내뱉었다.

그 말이 이미 뵈는 게 없는 남자들을 단단히 자극한 모양이었다.

“어쭈, 이 XXX가 욕을 해. 시파. 어디 공무원 새끼가!”

“내가 우습게 보이냐!”

“열라 잘난 척하는 재수 없는 새끼, 넌 오늘 뒤졌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예고없이 주먹을 뻗어왔다.

후웅!

취객이 막무가내로 내뻗은 주먹이다.

태건의 눈에 궤도가 훤히 보였다.

터억!

“시비를 걸려면 상대를 잘 파악했어야지.”

그대로 잡아챈 태건이 반 바퀴 돌렸다.

우직.

순간적인 비틀림에 손을 잡힌 남자가 괴성을 질렀다.

“끄아스아랴아가랴! 아아아!”

“그 정도는 아니야.”

“이, 이 개쒸끼가!”

부웅!

이번엔 발길질이었다.

태건은 가볍게 피하며 중심을 잡고 있는 다른 발을 툭 건드렸다.

순간 균형을 잃은 남자가 그대로 넘어졌다.

퉁!

“아윽! 이런, 씨야야앙!”

혼자 끓어오른 분노를 참지 못해 발악했다.

그 사이 다른 남자들이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탄천에 묻어주마!”

훙훙훙!

마구잡이 공격이 양쪽에서 동시에 태건을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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