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곧 모두가 헬기 앞에 모였다.
무전 대기 중인 이지성과 함께 전달사항을 듣기 위함이다.
곧 오광휘 단장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수첩을 펼치며 말했다.
사락.
“우선 대형마트 화재 감식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뭐랍니까?”
“폐점 이유가 건물 안전 때문이었나 봐. 폐전자기기를 모아뒀는데 하필 거기에 낙하물이 떨어져서 폭발했다고 결론이 났다더라.”
오광휘 단장의 말에 다들 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폐점이라도 불안 요소는 치웠어야지.”
“마무리를 잘 해야 되는데 말이야.”
“이거 내가 애들 잘못이라고 오해를 했네. 사과해야겠어.”
황대산은 머쓱해 했다.
다혈질이라 쉽게 화를 내지만, 자신의 오해라고 판단되면 두말없이 인정했다.
태건이 그런 황대산을 위로했다.
“오해가 풀렸으면 된 겁니다. 애들한테 뭐라고 한 적 없잖습니까.”
“그래도 사나이가 잘못을 외면하면 쓰나.”
“애들 병원에 있습니다. 찾아가서 공연히 그런 말 오가봐야 회복에 좋지 않을 겁니다.”
태건은 재차 만류했다.
그 소리에 오광휘 단장이 반사적으로 태건을 손짓했다.
척.
“나도 태건의 말에 동감. 그리고 다음 공지사항이 마침 그 내용이야.”
“그 내용이면, 애들이요?”
태건이 재빨리 물었다.
“…….”
선배들도 입을 다물고 오광휘 단장에게 집중했다.
오광휘 단장은 가볍게 고갯짓하고 수첩의 내용을 공지했다.
“진우하고 세 명은 많이 회복된 상태라고 해. 일반병실로 옮겼다니까.”
“진수는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뇌와 폐에 후유증이 좀 남을 거라고 해.”
“이런.”
태건이 안쓰러운 탄식을 흘렸다.
다들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두에게 오광휘 단장이 덧붙여 말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정도면 대단한 회복세라고 해. 그리고 몸이 성장하는 시기라 재활을 겸하면 후유증이 많이 사라질 거란 소견이라더라.”
“그럼 다행이네요.”
“아이들 부모님이 우리 어딨냐고 본청이고, 북부지청이고 엄청 전화했다나봐.”
“…….”
다들 듣고만 있자 오광휘 단장이 수첩을 한 장 넘기며 말했다.
사락.
“그래서 너희들 의견은 어떠냐고, 수렴해서 알려달란 정책과장님 오더가 있어. 어쩔래?”
“…….”
슥슥.
서로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때 이지성이 불쑥 말했다.
“괜히 애들이나 잡지 말라고 해요.”
“에?”
다들 멈칫하며 이지성을 바라봤다.
“…….”
이지성은 입을 꾹 다물고 모른척 했다.
무심코 한 말에 스스로 아차한 모양이었다.
태건만이 유일하게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공표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적당히 타이밍 좋게 나섰다.
“지성 선배 말은 요즘 애들이 뛰어놀 데가 없어서 그랬던 거니까 어른들 잘못도 있단 겁니다.”
대신한 태건의 변명에 이지성이 힐끗 쳐다봤다.
“…….”
다른 선배들은 갸웃거리며 아리송해 했다.
“그게……. 그렇게 되나?”
“뭐 요즘 그렇다고들 하긴 하는데.”
“그런데 그걸 왜 태건이가 대신 설명해 주는 거야?”
스윽.
선배들 시선이 돌연 태건에게 집중됐다.
태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날 병원에서 선배랑 그 부분에 대해서 대화를 좀 했거든요.”
“그래?”
“엄연히 따지면 철거업체가 경비를 세웠어야 한다. 그럼 애들이 굳이 거길 갔겠느냐, 그 애들도 피해자다. 뭐 이런 대화들이요.”
자연스러운 태건의 추가 설명에 다들 이해가 되는 눈치였다.
“맞다. 그날 태건이가 우릴 병실에서 쫓아냈었지.”
“우리 보내고 니들끼리 그런 얘기했냐?”
“막내라인이 은근히 끈끈하네.”
“잘, 잘 지내면 조, 좋은 거잖아요.”
마지막으로 유중헌까지 수긍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지성은 말을 꾸며내는 태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훗.”
마치 잔머리도 좋단 느낌이었다.
태건은 그런 이지성을 가볍게 흘겨봤다.
‘그럼 말실수를 말든가.’
변명해주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자 표정이 뚱해졌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예리한 눈썰미로 째려봤다.
“그날 병실에서 둘이 뭔가 짝짜꿍을 한 모양이야.”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언젠가 뭘 짝짜꿍했는지 말하겠지. 그 부분은 그렇게 넘어가고, 다음.”
사락.
오광휘 단장이 또 수첩을 넘기자 황대산이 물었다.
“또 있습니까?”
“아직 많아. 소방장비 업체선정 끝났고, 제품 나오는 대로 배송해주기로 했대.”
“…….”
잠시 느슨했던 분위기가 다시 조여졌다.
후원금 사용내역이라 예민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태건도 눈에 힘을 주더니 곧 질문을 건넸다.
“국내 업체들이 꽤 다양하게 선정됐다고 하셨죠?”
“우리나라 소방업체들도 연구개발하고 있었던 거지. 특허품들은 어쩔 수 없이 수입해야겠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아무튼 정책과장님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진행 중이니까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오광휘 단장이 말하자 이지성이 조용히 삐쭉거렸다.
“보는 눈이 몇인데, 그거 꿀꺽하다 들키면 옷 벗어야지.”
“…….”
다들 그 부분에선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에는 너무 삐딱한 뉘앙스였지만 틀린 말은 아닌 탓이다.
잠시 조용해진 사이 태건이 물었다.
“그럼 이제 끝난 겁니까?”
“하나 더.”
“뭐가 또 있습니까?”
태건이 갸웃거렸다.
그 순간 오광휘 단장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찌릿!
“……혹시 길에서 시비가 붙더라도 가급적이면 현장을 빨리 벗어나도록.”
대놓고 태건을 저격한 말이었다.
두 사람 말고는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고수현이 가볍게 손을 들어 대표로 물었다.
“단장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어젯밤에 취객들이랑 한 판 하셨다더라. 본청에 직접 당한 사연을 아주 구구절절하게 써 놨다지 뭐냐.”
찌리릿!
태건을 향한 오광휘 단장의 말과 눈빛에 가시가 가득했다.
어제 외출한 사람은 태건 혼자였다.
선배들의 시선도 덩달아 태건에게로 향했다.
“여자친구 만나고 왔다며.”
“취객은 뭔 소리야?”
“태건이, 너 술 마시면 사람 때리고 그러냐?”
오해가 급속도로 불어났다.
그 순간 태건은 화가 솟구쳤다.
‘이 새끼들이.’
끝내 민원을 넣었단 부분이 짜증났다.
그보다 눈앞에 선배들에게 먼저 억울함을 어필했다.
“단장님, 그건…….”
“아, 됐어.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거야.”
“전 안 됐습니다. 지나가는데 시비를 걸어온 겁니다. 그리고 심하게 때리지도 않았습니다.”
“알아.”
오광휘 단장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더욱 억울함을 강조하려던 태건의 말이 순간 꼬였다.
“그러니까……. 아신다니요?”
“정책국장님이 벌써 조치하셨다더라.”
“뭘 어떻게요?”
태건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병원에 나이롱 환자로 입원했다나봐. 소방청 고문변호사랑 찾아가서 세 명을 각각 따로 불러 꼬치꼬치 캐묻다 진술이 어긋난 걸 잡아챘대.”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고문변호사가 법조문 쫙 읊으면서 생각 잘 하라고 했더니 꼬리 말았다던데 뭐.”
“그, 그럼 다행이네요.”
태건이 머쓱한 얼굴로 말하자 오광휘 단장이 눈치를 줬다.
“정책과장님에게 감사 전화 한 번 해.”
“고맙긴 한데…….”
“이제 알려지고 있는데 구설수 생겨봐야 좋을 거 없잖아.”
“흠.”
“너도 알잖아. 사람들은 자극에 반응하게 되어 있어. 막말로 어떤 기자가 악심 품고 기사 올리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아?”
오광휘 단장이 콕 집어 물었다.
태건은 쓴 얼굴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거짓이 사실이 되겠죠.”
“네가 잘못했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다음엔 확실히 마무리 지어.”
반전 어린 오광휘 단장의 질책에 태건이 멈칫했다.
“……네?”
“손 댈 거면 악소리도 못하게 하라고. 어설프게 봐주니까 뒷말 나오잖아.”
오광휘 단장의 마무리가 조금 이상했다.
그런데 선배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내새끼들이 술 쳐 먹고 행패라니. 그냥 다리몽둥이부터 확!”
“세상에 가장 치졸하고 치사한 게 남의 약점가지고 장난질 치는 거야.”
“그, 그렇지. 우, 우리가 상대적인 상황에선 아, 아무래도 약자니까. 그, 그게 자기들 권, 권리인 줄 알더라.”
황대산, 고수현, 유중헌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거기에 이지성도 보태 말했다.
“그딴 짓하는 놈들 인성은 오죽할까. 종량제봉투에 담아서 묻어봐야 땅이 썩겠지.”
표현력부터 확실히 달랐다.
태건은 선배들의 반응에 눈을 끔벅거렸다.
“저한테 뭐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우리가 바보냐. 매번 불구덩이에 사람 구하러 뛰어 들어가는 녀석이 밖에서 사람 팼다면 당연히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
황대산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유중헌도 한 마디 얹었다.
“네, 네가 그럴 리가 없, 없잖아. 우, 우린 널 아, 아니까.”
“내가 고아원 동생들한테 하는 말이 있어. 누가 맞고 들어오면 우르르 쫓아가 복수해 주라고, 그게 형제고 자매니까.”
텅.
고수현이 가슴까지 쳐가며 단호히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지성이 말했다.
“건드려도 하필 강태건을 건드리냐. 그 놈들 재수도 더럽게 없지.”
산통 깨는 말이지만 영 틀린 건 아니었다.
태건은 모두가 자신을 이렇게 믿어주는 줄 몰랐다.
자세한 상황 설명도 듣지 못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점이 가슴 뭉클하게 했다.
“이거, 좀 감동입니다.”
“그런 거 하지 마. 손발 오그라들어.”
다들 시큰둥하게 흘려 넘겼다.
그럼에도 태건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엉뚱한데서 가슴 들썩이게 하냐.’
선배들이 보여준 막무가내 믿음이 결국 태건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맨날 지지고 볶는 사이였지만 의리는 끝내줬다.
그렇게 공지 전달이 마무리 됐다.
태건은 옥상 한쪽으로 자리를 옮겨 우석진 정책과장에게 전화했다.
“과장님. 얘기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무슨 소리. 난 내가 한 말을 지킨 거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특수소방단을 전폭 지원한단 조건 잊었나. 자네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잖아.”
우석진 정책과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태건에겐 좀 다르게 들려왔다.
특수소방단에 대한 인지도가 상승중인 지금이라 불화를 미연에 방지하려 나섰을 거다.
태건은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지만 모두 뒤로했다.
때론 담백한 게 최고였다.
“묵묵히 제 할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강조할 건 아니지.”
“그러네요. 그럼 뒷일 걱정하지 않고 앞만 보겠습니다.”
둑.
태건은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