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태건의 소집령은 합당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금산T타운과 경우가 너무도 달랐다.
이번 현장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곧 황대산의 우악스런 목소리가 무전기에 울렸다.
-띠릭. 여긴 빅라텔, 지금 당장 올라……. 젠장. 우린 올라가야 된다고, 좀 놔보라니까!
무전 소리만 들어도 상황이 읽혔다.
다른 소방관들이 황대산과 이지성의 무모한 돌격을 저지시키는 모양이었다.
오광휘 단장의 무전도 바로 이어졌다.
-띠릭. 라텔캡이다. 운전라텔은 합류했는데, 길이 없어. 니들이 타고 내려간 로프도 짧아. 대책은 세우고 소집령을 때려야할 거 아냐!
당장 집결하지 못하는 짜증이 목소리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때 태건이 무전기를 누르며 말했다.
띠릭.
“제 눈엔 올라올 방법이 훤히 보입니다만.”
-띠릭. 장난하냐. 니 앞에 있는 거라고는 굴절……. 에이씨. 저게 방수하고 있어서 헷갈렸잖아. 다들 굴절사다리 앞으로 모여!
“소방호스 2개를 가급적 길게 연결해오시고, 그리고 출동가방 전부 가져오시고요.”
-띠릭. 접수.
무전이 끝남과 동시였다.
솨아……. 기잉.
굴절사다리의 방수가 멈추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쪽은 간신히 밀어놓은 연기들이 다시 창문으로 몰려왔다.
지상의 모습이 금세 검은 연기에 가려졌다.
태건은 모두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럼…….”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고수현도 기다릴 인내심이 없는지 먼저 말했다.
“여기가 3층이니까 우리가 먼저 수색 시작하자.”
“……제가 하려던 말이 그 말이었습니다.”
“그 전에 잠깐만.”
사삭.
고수현은 크로스백을 빠르게 열었다.
그 속에서 둘둘 말린 전선 같은 걸 꺼냈다. 전선의 끝엔 묵직해 보이는 배터리가 달려 있었다.
스위치를 켜자 전선에 전체가 빛났다.
LED가이드라인이다.
유연한 재질로 감싸져 있어 자동차가 밟고 지나가도 전혀 문제없었다.
번쩍!
강렬한 빛이 한데 뭉치자 검은 연기 속에서도 주변이 얼핏 보였다.
작업장이라더니 스틸 재질의 작업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락.
고수현은 신속히 배터리 부분을 작업대 다리에 묶었다.
반대쪽 얇은 전선의 시작부분은 허리에 묶었다.
“언제 써보나 했는데, 바로 써 먹네.”
“바로 움직이시죠.”
“그럼 가자.”
척척.
태건이 먼저 연기투과 플래시로 앞을 비추며 이동했다.
그 뒤를 고수현이 바로 뒤따랐다.
둘둘.
LED가이드라인이 풀리며 그가 가는 길을 빛으로 인도했다.
작업장을 벗어난 순간 암흑이 엄습했다.
마치 우주 같았다.
공간, 시간, 감각까지.
모든 게 사라진 듯한 적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진짜 지독하다.”
태건조차 막막함에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후웅. 훙.
손을 뻗어 저어 봐도 온통 허공이었다.
“후욱, 후욱.”
숨소리만 가득 들려왔다.
그런 태건이 뒤를 돌아봤다.
고수현의 허리부터 이어진 LED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찾아올 정도는 되네.’
지금은 그 정도로도 감지덕지. 아니, 감사했다.
단원들이 자신들을 찾아올 방도는 마련해뒀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문제였다.
이렇게까지 연기가 정체된 현장은 처음이었다.
슈욱, 슈욱.
엄청난 압박감에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이럴 때 서 있으면 더욱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선배, 자세 낮춰요.”
“응.”
사삭.
둘 다 얼른 최대한 자세를 낮췄다.
걸어가는 걸 아예 포기했다.
그럴 정도로 연기가 짙어도 너무 짙었다. 자세를 낮췄는데도 방향조차 읽히지 않아 앞으로 나아갈 길이 너무도 막막했다.
‘이런.’
태건이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눈을 감고 연기와 불을 헤쳐갈 순 없었다.
팟.
연기투과 플래시를 쭉 뻗어 앞을 비췄다.
기껏 1미터나 뻗어갈까.
정말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극히 제한적인 부분만 비춰졌다.
이 상태로는 신속한 구출작전을 펼칠 수가 없었다.
결국 태건의 입에서 불쑥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 큰 건물에 창문이라고는 땅콩만한 거 하나 만들어 놓고 땡이라니.”
“보냉을 위해서 기밀성을 유지해야 한다잖아.”
바로 뒤에서 고수현이 말을 받았다.
태건도 이런 소리하기 싫었지만 다급함에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그러다 반사적으로 이상함을 직감하고 말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음? 말이 안 되네요.”
“왜 그래. 연기 마셨냐?”
“선배, 연소 필수 조건 아시죠.”
“갑자기……. 아무튼 연료, 온도, 산소잖아.”
고수현은 자신을 무시한단 느낌을 받았는지 목소리가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태건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지금 현상의 근본을 되짚어간 거였다.
“그 중에 산소를 대체 어디서 공급받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연소가 되면 산소가 부족해질 텐데, 그래서 당장 불도 안 보이잖아. 이 정도면 연기도 줄어야 정상이지 않아?”
“그렇다면 안에 고립된 소방관들이 뭔가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태건은 확신했다.
그 말을 들은 고수현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뭔지 몰라도 공기를 유입시키는 중이라면 불이 더 크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아?”
“반대로 본인들에게 공기가 필요할 수도 있죠.”
“……결국 제자리잖아.”
고수현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스윽.
태건이 날카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봤다.
바로 뒤에 있는 고수현의 표정조차 짙은 연기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허리춤에 있는 LED가이드라인이 훨씬 잘 보였다.
반짝반짝.
‘음.’
다시금 바라본 태건의 눈이 일순간 가늘어졌다.
길게 늘어진 LED가이드라인은 태건과 고수현이 지나온 길을 확실히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방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창문이 저쪽이고, 서향이었으니까…….’
팽그르르.
머릿속이 빠르고 복잡하게 굴러갔다.
이내 태건의 눈빛이 LED처럼 빛나며 나지막이 말했다.
번뜩!
“그러면 연기를 배출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꾸 이상한 소리만……. 야, 같이 가.”
태건은 벌써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차한 고수현이 연기투과 플래시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태건을 얼른 쫓았다.
사악, 사악.
방화복 무릎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건은 그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현재 위치한 A구역에서 B구역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90도로 꺾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태건은 확신에 찬 몸짓으로 계속 전진했다.
‘이쪽이야.’
슥. 슥.
한 번 앞으로 나아가고.
삭삭.
손으로 사방을 한 번 훑어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그걸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나아갔다.
잠시 후.
태건의 손에 무언가 걸렸다.
턱, 터덕.
“음?”
빠르게 여기저기 짚어대던 태건이 가느다란 탄성을 흘렸다.
바로 뒤에서 고수현 목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어디 부딪친 거야? 아님 뭐가 있어?”
“맞게 온 거 같습니다.”
척. 척.
태건은 방화장갑까지 벗고 다시 한 번 손으로 짚었다.
만질만질하면서도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었다.
뒤따라 도착한 고수현이 멈칫했다.
핑.
플래시 빛이 철벽에 닿아 그 정체가 드러난 탓이다.
“이거……. 화물 승강기 맞지?”
“빙고.”
“이 어둠속에서 대체 여길 어떻게 찾아온 거야?”
“LED요.”
스윽.
뒤를 돌아본 고수현은 이내 태건이 어떤 방법을 활용했는지 눈치 챘다.
“……LED 빛으로 이동 방향을 가늠하고 예측해서 움직였다고?”
“미리 평면도를 본 게 도움이 되더군요.”
“그걸 이렇게 응용하다니. 하,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고수현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짙은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호흡기 커버, 그리고 방화두건까지 착용중이다.
그럼에도 그의 미소가 보이는 거 같았다.
그런데 태건의 표정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이제부터 막혔단 게 문젭니다.”
“뭐가 문젠데.”
“화물 승강기 강제 개폐 방법을 몰라서요. 관계자에게 빨리 물어야겠습니다.”
태건은 쓰게 말하며 무전기로 손을 뻗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텁.
고수현이 태건의 어깨 부근을 붙들며 말했다.
“너만 잘하는 거 있냐, 나도 잘하는 거 있어.”
“선배가 강제 개폐 방법을 안다고요?”
“18살 때부터 온갖 공사장을 전전한 몸이야. 이쪽은 빠삭하지.”
번쩍!
그의 가슴께 달린 연기투과 플래시가 강하게 빛났다.
이내 고수현은 연기 속에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짙은 어둠 속에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부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조작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퉁땅, 턱턱.
“뭐지?”
소리만 듣고는 쉽사리 짐작되지 않았다.
얼굴을 바짝 내밀면 뭘 하는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건은 그럴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믿음을 주고받은 사이다.
고수현이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분명 해낼 거다.
차라리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태건은 무전기를 잡았다.
띠릭.
“라텔캡, 현장 진입까지 아직 멀었습니까.”
-띠릭. 1차로 라텔캡과 빅라텔이 출동가방 싣고 상승 중. 3층 근접해 가는데 연기 진짜 엄청나네. 니들 어딨어?
“굴뚝 뚫고 있습니다.”
-띠릭. 뭔 소린지 곧 알게 되겠지.
오광휘 단장은 구태여 일일이 캐묻지 않았다.
믿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무전 횟수를 줄이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태건도 짧게 마무리했다.
띠릭.
“현장 도착하면 그 자리에서 잠시 대기.”
-띠릭. 최대한 빨리 결정 봐. 이상.
오광휘 단장의 간결한 답으로 무전이 끝났다.
태건이 무전기에서 손을 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됐어!”
고수현의 높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이어서 육중한 쇳덩이를 움직이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그극.
“흐으읍!”
힘쓰는 소리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