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178)화 (177/320)

178화

그제야 시선을 뗀 태건이 싱겁게 미소 지었다.

“이런 레퍼토리는 바뀌지가 않네.”

…….

스윽.

태건은 조용한 휴대폰을 잠시 바라봤다.

우석진 정책과장이 득달같이 전화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게 상당히 이상했다.

‘나야 좋긴 한데…….’

태건은 이내 관심을 접었다.

모르겠다.

벌러덩.

더는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  *  *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그 사이 다들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특히 유중헌은 정밀검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이제 퇴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고대하던 퇴원날이 밝았다.

“아싸, 퇴원이다!”

“집에 가자!”

촥촥.

누구라고 할 거 없이 힘차게 환자복 상의를 벗어던졌다.

그렇게 기분 좋게 퇴원준비를 이어갈 때였다.

오광휘 단장이 캐릭터 속옷을 슬쩍 보이다 아차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이번 주까지 오프인 거 안 까먹었지?”

“네. 차장님 지시사항이라면서요.” 

“이렇게 쉬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쉬게 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들 기분 좋은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다들 새로 지급받은 기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비번 옷차림으로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퇴원이 더 중요해 일일이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어서 소지품을 정돈할 때였다.

드륵.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라 생각한 모두가 활기찬 얼굴로 돌아봤다.

“저희 준비 다……. 어?”

“그간 고생 많으……. 어?”

살갑게 말을 건네던 모두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병실로 들어온 한 젊은 여성 탓이었다.

저벅저벅.

거침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온 여성은 태건에게 직행했다.

그리고 다가서자마자 다짜고짜 핸드백으로 내리쳤다.

퍽퍽.

“이 인간아. 제정신이냐!”

“억, 윽. 야, 야야!”

“지금 나 찾을 정신 있냐, 이게 뭐야, 이게 또 뭐냐고!”

후웅, 퍼버벅.

핸드백을 다각도로 휘둘러 때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데 태건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왜냐.

그 의문의 여성이 바로, 강주미였다.

그래도 한 마디는 했다.

“왜 이제 나타나서 이러는데.”

“그날 비행 갔다가, 어제 왔다, 어제!”

“다들……. 윽, 다들 보잖아.”

“어쩌라고!”

퍼벅!

강주미는 그간 묵혔던 분노까지 더해 쉬지 않고 핸드백을 휘둘렀다.

태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강주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린 탓이다.

‘짜식이, 그래도 동생이라고……. 윽, 이건 감정 실렸는데.’ 

한편.

선배들은 병실 구석으로 피신해 있었다.

강주미의 사나운 분위기에 눌려 저절로 한 곳에 모여든 거였다.

오광휘 단장이 갸웃거리며 말했다.

“누구지? 태건이 여자 친구는 아닌데…….”

“그럼 뭡니까. 저 녀석 양다리였던 겁니까?”

“이번에 방송 타면서 딱 들켰네.”

“어쩐지 저 장면, 드라마에서 본 거 같더라니.”

다들 방관하자 유중헌이 멈칫하며 물었다.

“저, 저기. 단장님. 그래도 도, 도와줘야 되, 되는 거 아니에요?”

“끝없이 이어지는 핸드백 어택이 안 보여, 저 속에 널 던질 자신 있냐?”

“……저렇게 맞으면 또 입, 입원해야 할 거 같은데요.”

“그래서 가만히 있는 거야.”

“아, 네. 가만히 있어야겠어요.”

결국 아무도 태건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애도를, 한편으로는 오해로 인한 힐난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후 병원 앞.

태건이 인상을 푹푹 쓰고 있었다.

‘저 꼬리 99개 달린 여시.’

찌릿.

그런 반면 강주미는 언제 그랬냔 듯이 이미지 관리를 하며 청순한 모습으로 인사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어요. 죄송해서 어쩌죠?”

스윽.

살짝 머리를 넘기는 제스처는 덤이었다.

눈에 확 띄는 미녀인 강주미의 행동에 만년 솔로들인 라텔은 내성이 전혀 없었다.

헤벌쭉.

“태건이는 제가 친동생처럼 아니, 친동생이니까 이제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제가 앞으로 절대 만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제가…….”

슥슥.

다들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내보이기 바빴다.

보다 못한 태건이 나서서 막아섰다.

“야, 가서 차나 빼와.”

“……응, 오빠. 그렇게 할게. 그럼 다음에 또 봬요.”

빠직.

강주미는 이마에 핏줄이 솟았지만 애써 이미지 관리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미 씨 잘 가요.”

“안녕.”

슥슥.

선배들 모두 손을 흔들며 강주미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 중 유일하게 오광휘 단장만 제정신이었다.

휙휙.

단원들 앞에 손짓을 해보인 그가 태건에게 말했다.

“얘들 증상 심각한데?”

“단장님, 쟤가 예쁩니까?”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미인이지. 같은 유전자 조합일 텐데 여긴 꽝, 저긴 성공, 뭐 이런 느낌?”

오광휘 단장의 팩트 폭행에 태건은 바로 반격했다.

“하긴 단장님은 경력이 있으셔서 외모에 흔들리지 않으시겠죠.”

“태건아, 동생 차에 곱게 탈래, 아님 실려 갈래?”

찌릿.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오광휘 단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태건은 두 손을 들며 뒷걸음질 쳤다.

“말이 그렇단 거고요. 저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동생이랑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 가져라.”

“핸드백 놀리는 거 못 보셨습니까? 쟤 장난 아니에요.”

“네 동생이니 오죽하겠냐. 그러게 네가 오빠로서 모범을 보였어야지. 인과응보야. 쯧쯧.”

오광휘 단장은 태건의 미래가 그려지는지 혀까지 찼다.

태건도 딱히 부정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 선배들 좀 부탁드립니다.”

“얼른 가버려.”

“넵, 라텔.”

척.

태건은 가볍게 거수경례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광휘 단장은 아직도 헤벌쭉 하고 있는 단원들을 보며 어이없어 했다.

“갔어. 갔다니까!”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선배들이 쑥덕거렸다.

“아아, 벌써 떠나다니. 차라도 한 잔…….”

“나 태건이한테 실수 한 거 없지?”

“저는 태건이가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갑자기 태건에 대해 칭찬릴레이를 펼쳤다.

오광휘 단장은 고개를 저으며 먼저 움직였다.

“에휴, 어린노무 시끼들.”

확실히 경험이 우러나오는 뇌까림이었다.


*  *  * 

주차장에 도착한 태건은 강주미의 차를 발견했다.

아담한 소형차에 귀여운 장식이 확 눈에 띄었다.

조수석으로 다가간 태건이 강주미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멈칫했다.

지잉.

썬팅 된 창문이 내려가더니 강주미가 운전석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저리 가.”

“네 차잖아.”

“가족특약 들어놨어.”

강주미의 뻔뻔한 대답에 태건은 항변했다.

“나 지금 퇴원했거든?”

“팔다리 멀쩡하네.”

통보를 마친 강주미는 조수석 창문을 올렸다.

지잉.

썬팅 된 창문 탓에 서로의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

태건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나 강주미는 조수석에서 내릴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다.

막내라 틈만 나면 이렇게 제멋대로에 응석까지 부렸다.

‘이런데 뭐가 예쁘다고.’

절레절레.

태건의 눈엔 이런 마녀가 없었다.

그래도 어쩌랴.

동생이라 못내 져줘야 하는 게 오빠였다.

“에휴, 내 팔자야.”

허탈함을 흘린 태건이 운전석으로 향했다.

부웅.

고속도로에 오른 소형차가 인천공항 방면으로 달렸다.

차 안이라 조용할 법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강주미의 잔소리 폭탄이 터져버렸다.

“내가 아까 오빠 직장 선배들 있어서 대충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TV보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알아?”

“또 뭐가.”

“뭐냐니. 대형마트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뻑하면 입원하는데 걱정하지 말란 소리가 나오냐!”

투다다다.

마치 기관총을 쏘는 거 같았다.

게다가 차 내부가 좁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렸다.

징징.

처음엔 잠자코 들어줬지만 귀가 괴로워지자 태건이 한소리 묵직하게 건넸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하긴 뭘 적당히 해. 오빠야 오빠 좋은 일이겠지만 그걸 보는 가족들은 생각도 안 해?”

“…….”

“대답 안 해?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외면한다고 끝날 문제야?”

강주미의 전방위 공격은 태건을 거세게 압박해왔다.

대답하면 그걸로 꼬투리 잡고, 대답 안하면 안한다고 난리다.

숨이 턱턱 막혀 운전이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태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왜 미루는데, 할 말 없어서 핑계 만들려고 그러냐. 그런다고 내가…….”

“아, 녀석. 정말!”

참다못한 태건이 한 마디 쏘아붙였다.

끼긱.

울컥한 순간 소형차가 살짝 흔들렸다.

그제야 강주미가 입을 다물었다.

“…….”

찌릿.

눈빛은 티끌만한 움츠림 없이 강렬하게 쏘고 있었다.

운전 중이라 잠시 조용하는 거뿐이었다.

절대 수긍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태건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부웅.

소형차는 조용히 인천공항 방면으로 향했다.

두 시간 후.

태건은 강주미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에 들어왔다.

전형적인 투룸 구조였다.

태건은 첫 방문이었다.

들어선 순간 펼쳐진 집안 모습에 태건은 할 말을 잃었다.

“……하아.”

입술을 비집고 나온 첫 마디가 한숨이었다.

훌렁훌렁 벗은 옷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곳곳에 뽀얗게 쌓인 먼지도 보였다.

태건은 고개 돌려 강주미를 바라봤다.

단정한 외모와 깔끔하면서 센스 있는 맵시까지.

자신을 꾸밀 줄 아는 감각이 탁월했다.

그러나 집안을 꾸밀 줄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광휘 단장의 집보다 덜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한소리했다.

“청소란 단어가 뭔지는 아냐?”

“어제 한국 들어왔다니까.”

“하루 만에 이렇게 된 거면 더 문제 있는 거 아냐?”

태건이 꼬집어 물었다.

그 순간 강주미가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다 이렇게 살아. 나중에 연미 언니가 독립하면 그때 가 봐. 난 깔끔한 거야.”

“깔끔이란 단어의 정의부터 사전 뒤져봐.”

“시끄러, 지금 이게 중요해?”

휙!

강주미는 쌩하니 지나쳐갔다.

찬바람 가득 부는 모습에 태건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 녀석이 정말.”

좋게 생각하려 노력하는 마음에 자꾸 브레이크가 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