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그 사이 강주미는 거실 소파에 자리했다. 그리고 소파 테이블을 두드리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탁탁.
“앉아봐. 2차전 해야지.”
“주미야, 적당히 하라고 했다.”
태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으며 불쾌함을 강하게 어필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방법이었다.
그 순간 강주미의 머리에서 마치 뿔이 솟아나는 거 같았다.
화르륵.
불꽃이 넘실거리는 아우라를 풍기며 강주미가 마주 으르렁거렸다.
“뭘 적당히 하란 거야.”
“마음 써주는 건 고마운데, 계속 그러면 나도 감정 상해.”
“허, 착각도 엄청 심하셔!”
강주미가 팍 쏘아붙였다.
태건이 집안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가 강주미였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어머니는 결국 태건의 편을 들어줬다.
강태영은 말빨로 눌러버리면 된다.
그 모든 게 통하지 않는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태건은 이 순간을 모면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차라리 부딪치자.
그 마음으로 소파에 자리했다.
척.
“그래, 어디 한 번 떠들어 봐.”
“어떻게 오빠는 옛날이랑 똑같냐. 어렸을 때도 그렇게…….”
강주미의 잔소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했다.
그 순간 태건이 적절히 파고들어 맥을 뚝 끊었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말해.”
“오빤 늘 그런 식이야. 오빤 지금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
“내가 소방관이라 어머니가 노심초사하고 계신단 게 문제잖아.”
태건은 씁쓸했지만 어머니를 언급했다.
전보다 훨씬 전화도 자주 드리고, 건강식품이나 평이 좋은 먹거리도 종종 보내드렸다.
그건 어쩌면 죄송함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기분이 가라앉아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았다.
태건은 그 부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강주미의 입에서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내가 이럴 거 같아?”
“……뭔 소리야?”
“엄마가 오빠 데려다가 요양시키래. 밥 해주고, 차도 타주고, 귀찮게 하지 말라고 얼마나 신신당부했는지 알아?”
강주미가 뚱한 얼굴로 빽 소리쳤다.
그러나 태건은 귀를 후비며 의구심을 더 짙게 내보였다.
후비적.
“귀도 다쳤나?”
“우씨, 사람 말하는데 그게 뭐하는 태도야!”
“내 귀가 이상하거나, 네가 말을 이상하게 하거나. 둘 중에 하나같은데…….”
태건은 뻔히 들었음에도 인지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예상 밖의 말이었다.
반대로 강주미는 기막히다 못해 열불 터지는 모양이었다.
“나도 내 일이 있는 사람이라고. 일주일 만에 한국 들어와서 좀 쉬려는데, 쉬지도 못하고 오빠 병간호하게 된 그 참담한 심정을 알아?”
“귀국 비행 전까지 자유시간이라며.”
“내가 지금 그걸 말하는 거냐고. 엄마는 오빠가 뭐가 예쁘다고 반찬해 보내고, 나한테 신신당부를 하냔 말이야.”
강주미가 억울함을 빽빽 소리쳐 알렸다.
태건은 역시 다시 들어도 같은 맥락임을 이제야 받아드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나 챙겨주라고 하셨단 말이야?”
“그럼 지금까지 뭐 들었는데!”
“음, 따로 전하란 말은 없으시고?”
태건이 묻자 강주미의 불만 가득한 눈빛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찌리릿!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진짜 있어?”
“흥! 몰라, 없어.”
훽!
강주미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잔뜩 토라진 티를 팍팍 냈다.
태건은 그런 강주미를 잠시 바라봤다.
강주미의 행동은 분명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과 ‘막내’란 시선으로 보면 전혀 다른 답이 나왔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짜증내고 화낸 모습이다.
가장 편한 상대에게만 보여주는 앙탈쟁이 막내의 얼굴이었다.
그 관점으로 보면?
빙긋.
태건의 굳은 얼굴이 풀어지며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걱정 되디?”
“뭐라는 거야.”
“주미야, 야, 강주미.”
툭. 툭툭.
태건이 잔뜩 토라진 강주미를 슬쩍 건드렸다.
강주미가 손을 거칠게 휘두르며 차가운 한 마디를 쏘아냈다.
“하지 마.”
“야, 야야.”
툭툭.
계속 지분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짓궂은 오빠였다.
그런 태건의 행동에 강주미가 이를 꽉 물고 복화술처럼 으르렁거렸다.
“흐즈 므르그 흐드.(하지 말라고 했다.)”
“걱정 많이 되디?”
“짜증나, 시끄러, 조용히 해. 안 들려, 안 들린다. 하나도 안 들린다, 아아아.”
양쪽 귀를 막고 홀로 생쇼를 펼쳤다.
그런 모든 게 앙탈쟁이 막내식 표현이었다.
서로 독립한지 오래 되어 태건도 이제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강주미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속상해하고 걱정하는 거였다. 거기에 어머니가 태건만 신경 쓰라고 하니 질투도 난 모양이었다.
그 모든 감정들이 비비 꼬여 엉뚱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지켜보던 태건이 속으로 뇌까렸다.
‘귀여운 녀석.’
겉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그 후로도 남매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강주미가 따지려고 만든 자리다.
그렇지만 태건은 속내를 간파한 후라 느긋함을 보였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배고프다. 밥 해.”
“지금 이 와중에 배가 고프냐, 이 식충이 오빠야!”
버럭!
외면하던 강주미가 울컥해 소리쳤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강주미가 멈칫했다.
…….
진중하고 묵직한 태건의 표정 탓이었다.
강주미가 어색해하며 흘려 말했다.
“왜, 왜 그렇게 보냐.”
“오빠로서 잘해 준 것도 없는데 걱정만 끼치고, 참 면목이 없네.”
“…….”
태건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분위기에 강주미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시선을 먼저 아래로 내렸다.
옆으로 가까이 다가간 태건이 강주미의 손을 붙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처억.
“앞으로 조심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강주미가 쭈뼛거리며 답했다.
토닥토닥.
태건은 강주미의 손등을 다독이며 이어서 말했다.
“밥 줘. 어머니가 보내주신 반찬으로 세팅해서. 아, 배고프다.”
“……지금, 지금 그게 할 소리냐!”
와장창.
그윽한 분위기가 한순간 깨졌다.
동시에 강주미는 손톱을 세워들고 태건에게 날아들었다.
그 후로 오피스텔 안에서는 비명소리만 가득 들려왔다.
“아윽, 악악악!”
태건이 꼬집히고 뜯기며 터져 나온 비명소리였다.
강주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면박을 줬다.
“조용히 해, 동네 시끄럽게 소리치지 말고!”
“그럼 그만 꼬집어!”
“누구 마음대로, 똑바로 대!”
“아아악!”
태건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런데도 표정은 부드럽기만 했다.
동생의 걱정.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원래 남매란 치고받는 게, 곧 서로를 보듬는 아이러니한 관계였다.
잠시 후.
남매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식탁 위엔 어머니의 손맛 가득한 반찬이 가득했다.
태건은 체면 따윈 내다버리고 왕성한 식탐을 보였다.
쩝쩝.
“음음. 역시 어머니 반찬이 최고야, 나물 하나도 다른 데선 이 맛을 못 낸다니까.”
“입 좀 다물고 먹어.”
“입 다물고 어떻게 먹냐. 아앙!”
태건은 보란 듯이 입을 떡 벌리고 밥을 크게 한술 떠넣었다.
그 짓궂은 모습에 약이 오른 강주미 얼굴에 열이 뻗쳤다.
“얄미워, 약 올라, 아흐으으!”
바동바동.
식탁 아래 두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게 익살 가득한 식사가 끝난 후였다.
시큰둥한 식탁 분위기가 영락없는 평소 모습이었다.
가볍게 커피잔을 쥔 태건이 어느새 차분하게 강주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뭐라고 하셔?”
“뭘 뭐라셔. 둘째를 너무 순두부로 키웠다고 자책하고 계시지.”
“순두부?”
태건이 이색적인 표현에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강주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엄마는 그렇게 픽하면 쓰러지는 아들 키운 적 없대.”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울 엄마 몰라? 약할 땐 한 없이 약한데, 한 번 마음 굳히면 절대 번복하지 않으시는 거 말이야.”
강주미의 말에 여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태건은 가볍게 말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삼남매는 스무 살 되자마자 집을 나왔지.”
“그런 엄마가 결심했대. 둘째가 단단한 두부가 되기 전까지 얼굴 안 보기로 말이야.”
“엥?”
“순두부 아들을 어디다 써먹겠냐고 단단해진 후에 집에 오래. 그때까지 오빠 없어도 잘 사니까 신경 쓸 거 없다고 하셨어.”
강주미의 말에 태건은 약간 혼란을 느꼈다.
“며칠 전에 전화할 때도 그런 말씀 없으셨어.”
“어제 나한테 말씀하셨으니까 오빤 모르지. 엄마가 그래도 아들이니까 안부 문자까지는 봐준대. 아, 선물 및 용돈도 포함.”
“헐.”
태건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강주미는 눈꼬리가 축 내려가며 괜히 커피잔을 돌렸다.
휘휘.
“전화하면 걱정하고, 늘 마음 쓰고, 엄마는 당연한데 오빠한테 부담되는 거 같아 싫었나 봐.”
“흐음.”
“큰오빠도, 나도 같아. 우리가 언제까지 걱정만 할 거야. 우리도 싫어.”
“……그럼 웃게 해줄게. 다음에, 또 그다음에 만날 때마다 기분 좋을 수 있게 노력할게.”
태건이 조금 어색한 미소로 결심을 말했다.
끄덕.
강주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태건이 강주미에게 커피잔을 내밀며 말했다.
스윽.
“그런 의미에서 커피 한 잔 더 타봐.”
“……오빠, 사무실에 유서 있다고 했었지.”
“응. 그런데 왜?”
“잘 됐다. 오늘 내가 하늘 위로 보내줄 거니까……. 이 진지함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인간아!”
으르렁.
강주미가 울컥해 버럭 소리쳤다.
태건은?
그럴 걸 예상하고 이미 작은 방으로 줄행랑 중이었다.
타다닥.
“그거 커피 한 잔 더 타주는 게 뭐 그렇게 화낼 일이라고!”
“어딜 들어가, 당장 나가!”
“싫어, 짜샤.”
태건은 끝까지 강주미를 놀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철컥.
얼른 문을 잠근 태건이 슈퍼싱글 침대로 직행했다.
“하하, 놀리는 맛이 쏠쏠하다니까.”
풀썩.
침대에 시원하게 누웠다.
그 풀럭임과 동시에 그리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엄마 냄새……. 아.”
어머니가 누웠던 자린가 보다.
사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알아챈 느낌이란 표현이 더 정확했다.
스르륵.
태건은 편안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열심히 운동해서 단단한 부침 두부가……. 아니, 튼튼한 아들이 될게요.”
태건은 어머니의 ‘순두부’란 표현에 휘말려 아차하고는 정정해 말했다.
그리고.
이제 부모님을 생각하며 더 이상 우울해지지 않기로 했다.
식구들의 걱정에 부담을 느끼기보다, 관심과 사랑이라 여기며 마음을 돌렸다.
그 결심과 동시였다.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사르륵 올라갔다.
‘마음이 한결 편하네.’
속으로 읊조린 태건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잠든 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태건은 그날부터 강주미의 오피스텔에 잠시 머물렀다.
요양을 한다?
그건 어머니의 바람일 뿐이었다.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