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어느날 오후.
벌컥.
큰 방문이 열리며 강주미가 동동거리며 나왔다.
외출 준비를 마친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옥의 티처럼 앞머리에 헤어 롤이 말려 있었다.
“아, 늦었어. 중요한 미팅인데, 또 늦었어!”
거실에 앉아 있던 태건이 뚱한 얼굴로 한소리했다.
“그러게 진작 준비하라니까.”
“몰라, 늦었어. 나 애들하고 저녁 먹고 들어올 거니까 알아서 먹어. 간다!”
“야야, 머리에 롤!”
태건이 소리쳐 알리자 강주미가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게 왜 아직도 달려 있어. 나 간다!”
휙.
헤어롤을 대충 던진 강주미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반면 태건은 바닥에 내던져진 헤어 롤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그 사이 양손은 마른 수건을 털고 있었다.
팡, 팡.
“이게 요양이냐, 상주하는 도우미 아저씨지.”
그렇게 푸념하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동생의 집이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유지되길 바란 오빠 마음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
태건은 깔끔한 차림으로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공항철도 주변의 번화가가 쫙 펼쳐져 있었다.
“여기도 살기 나쁘지 않네.”
가볍게 둘러보며 이동한 태건은 분위기 있어 보이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저쪽에 시선을 확 잡아끄는 미녀 삼인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취소. 미녀 둘에, 마녀 하나.’
속으로 정정한 태건이 말한 마녀는 당연히 강주미였다.
그런 강주미의 맞은편 자리에 친구들이 앉아 있었다.
일전에 만났던 이들이었다.
순간 태건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갈지 스스로 다짐했다.
‘멋진 오빠, 쿨한 오빠.’
강주미와 있으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날것의 대화가 오가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태건이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 태건을 친구들이 먼저 알아보고 천천히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살가운 인사에 태건도 마주 예의를 차렸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채연 씨, 유리 씨.”
“어머, 그날 잠깐 뵀는데 저희 이름을 기억하세요?”
김채연이 놀라 입을 가리며 물었다.
태건은 정중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요. 제 동생에게 친구가 있단 걸 알게 해준 역사적인 순간이었는데요.”
“네? 호호. 짓궂으셔라.”
꺄르르.
황유리가 다소곳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세 사람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강주미가 뚱하니 바라봤다.
“이보세요들, 왜들 서서 그러세요. 카페 안 무너지니까 좀 앉으세요.”
“반가워서 그러지……. 자, 앉으시죠.”
태건이 손짓을 더하자 친구들이 가볍게 앉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빙긋.
스튜어디스라 몸에 밴 자세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노력이 엿보였다.
“…….”
“…….”
그런데 첫인사 다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태건은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확실한 건 이성적인 호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태건에게 진한 호감을 가득 내보이고 있었다.
‘뭐지?’
스윽.
영문을 모르는 태건이 슬쩍 강주미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차 한 잔 하자더니?”
“여기 두 분께서 간곡히 부탁을 하셔서.”
“음?”
“팬이시래. 강태건 특수소방단원님의 열혈 팬.”
강주미가 툭툭 내뱉어 답했다.
태건은 순간 잘못 들었는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
“여기 강태건이 누가 또 있어?”
“없지……. 정말 저요?”
태건은 같은 질문을 친구들에게 똑같이 건넸다.
그 순간 김채연과 황유리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 단원님.”
“에에? 남도 아니고 낯부끄러운 호칭이네요.”
“그럼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스윽.
황유리가 기다렸단 듯이 되물었다.
태건은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저도 그렇게 불러주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저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럴까? 이제부터 편하게 할게.”
“아아, 감사해요.”
김채연이 두 손 꼭 모으며 대답했다.
태건은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동생 친구들인데 어려워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처억.
조금 편해진 자세로 바꾼 태건이 한층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스타도 아닌데 팬은 좀 그런 거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특수소방단만큼 핫한 셀럽이 어딨다고요.”
“난 글쎄. 잘 모르겠던데.”
“SNS에 특수소방단 활동만 전문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번에 이천 냉동창고 화재 소식도 알아요.”
김채연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황유리가 무섭게 치고 나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연기를 많이 마셨다고 들었는데요.”
“문제없어. 잠깐 힘들었던 거지.”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태건은 빙긋 웃으며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강주미가 툭 끼어들었다.
“얘들아, 팬이라면서 눈빛이 상당히 끈적끈적한 건 그냥 내 느낌이니?”
“어머, 주미야. 못 하는 말이 없어.”
“오빠 안 불러냈음 집까지 쳐들어올 기세는 어디 누구였는데?”
“우리가? 혹시 사람 착각한 거 아니니?”
김채연이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황유리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 모습에 강주미가 어이없어 했다.
“어머, 어머, 얘들 봐라.”
태건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양쪽을 만류했다.
“왜들 그래, 내가 불편하게 하는 거면 일어날게.”
“아니에요. 전혀,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요.”
황유리가 다급히 만류하며 친구들에게 눈치를 줬다.
그에 강주미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도대체 우리 오빠가 어디가 좋다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해.”
“왜, 멋지고 잘 생기셨잖아. 대형마트 화재 사건 때 엄청 멋졌어.”
“아, 숯 검댕이 잔뜩 묻히고 나와서 개폼 잡았을 때?”
강주미의 신랄한 표현에 태건이 삐끗했다.
“개, 개폼?”
반면 황유리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으며 부정했다.
“그때 말고. 그…….”
“아이 안고 뛰어나왔을 때. 그때 우리 다 같이 소리 질렀잖아.”
“같이 있던 다른 승무원들도 함께 말이야.”
김채연에 이어 황유리가 다시 말을 받았다.
그제야 강주미도 기억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순간만 소방관인가보다 하긴 했어.”
“그다음에 바로 재정비하고 들어갈 때, 네가 뭐라고 하지 않았니?”
“저 인간이 미쳤나, 라고 했었지.”
강주미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소리에 태건은 한 번 더 삐끗했다.
“미, 미쳤…….”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황당했다.
그런 태건에게 김채연와 황유리가 합심해 강주미의 흉을 봤다.
“그때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몰라요.”
“다른 승무원들이 놀라서 쳐다봤다니까요.”
“사무장님이 주미가 저런 말도 할 줄 아냐고 경악했어요.”
“주미를 짝사랑하던 남자 직원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고 하더라고요.”
티키타카.
주고받는 대화가 무척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하는 건 그만큼 친하다는 의미였다.
태건은 친구들을 통해 듣는 새로운 강주미 모습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표현을 역시나 장난으로 했다.
“어이구, 우리 동생. 오빠가 그렇게 걱정됐어요?”
“오빠, 여기 공항 아니야.”
챙.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손톱을 들어 보였다.
태건은 아차하며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크흠. 그나저나 다들 아직 식사 전이지?”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간을 확인한 친구들이 화들짝 놀랐다.
참 자연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태건에겐 티끌만한 어색함마저도 훤히 읽혔다.
“이렇게 차 한 잔 하고 헤어지는 건 아쉽지. 같이 식사 어때?”
“저희야 괜찮은데…….”
“그럼 가지. 주미야, 여기 괜찮은데 있어?”
태건이 호기롭게 말함과 동시였다.
대답하는 강주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나보다 얘들이 더 잘 알아.”
“그래? 그럼 채연이하고 유리가 안내 좀 해줄래.”
태건은 수더분하게 부탁했다.
네 사람은 그 길로 카페를 나섰다.
친구들이 앞서 걷고, 남매가 뒤따랐다.
태건이 슬쩍 강주미에게 기울여 조용히 물었다.
“너 왜 이렇게 까칠하냐?”
“내가 쟤들 뻔히 아는데, 내 앞에서 가식 떠니까 그러지.”
“친구들 흉봐서 너 좋을 건 뭐냐?”
“오빠가 몰라서 그런다니까. 그나저나 쟤들, 진짜 아무데나 막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강주미는 은근한 걱정을 보였다.
힐끔.
슬쩍 태건의 눈치도 봤다.
오빠 주머니 사정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태건도 그 시선을 느꼈다.
“…….”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을 거라 침묵했다.
잠시 후.
친구들이 안내한 장소는 분위기가 끝내주는 코스요리 전문점이었다.
“여기 음식이 괜찮더라고요.”
“그래요? 어디……. 이걸로 통일하는 게 어떨까요.”
척.
태건은 쭉 살펴본 후 메뉴 중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이 음식점에서 제일 비싼 코스요리였다.
그걸 본 강주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오빠, 이거…….”
“그래. 내가 봐도 맛있어 보인다. 같이 먹으면 더 맛있겠지?‘
“아니, 그러니까…….”
“다이어트 때문이야? 맛있는 건 언제나 0칼로리니까 걱정할 거 없어.”
태건은 걱정 가득한 강주미의 말을 뚝뚝 끊었다.
그런데 친구들도 살짝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저희는 이거 말고, 이게 더 좋을 거 같은데요.”
“저도요.”
스윽.
둘이 동시에 가리키는 건 비교적 저렴한 코스요리였다.
네 명이 먹으면 조금 무리했다라고 여길 수준이었다.
소방관의 월급을 정확히 몰라도 크게 부담 느낄 정도는 아닐 터였다.
그걸 본 강주미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머, 얘들 봐라.’
팬이라고 했던 말이 조금 와 닿은 모양이었다.
반면 태건은 그들과 생각이 전혀 달랐다.
스윽.
메뉴판 자체를 움직여 친구들의 손가락을 자신이 원하는 코스에 원위치시켰다.
그리고 반색했다.
“역시 마음이 통했네요……. 그럼 이걸로 주세요.”
“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정갈한 차림의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멀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강주미와 친구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네? 에? 이게 아닌데…….”
“어, 어쩌지?”
태건도 눈치가 빨라 그 분위기를 바로 읽었다.
그러나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했다.
“혹시 특수소방단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니?”
“네? 아, 어…….”
“나 말고 다른 단원들도 알지?”
“네에, 아, 알죠. 저희는 특수소방단 팬인걸요. 그런데 오빠, 저기…….”
친구들이 뭔가 말하려 폼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