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그 순간 태건은 다소 짓궂은 질문을 건넸다.
“너희들 남자친구들은 당연히 있겠지?”
“아니요. 그렇진 않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우리 사무실 궁금하지 않아?”
번쩍.
태건은 이 순간 엉뚱한 눈빛을 반짝였다.
모르쇠로 일관하면서도 친구들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심성이 나쁜 애들 같진 않으니까.’
강주미의 친구들이라면 모난 성격은 아닐 터였다.
선배들이 여사친도 없는 거 같은데, 알아둬서 나쁠 사이로 보이지 않았다.
까칠한 성격들이 여사친이 생기면 좀 나아질까 하는 바람도 있다.
물론 개개인의 성정은 절대 나쁘지 않았다.
한데 모였을 때 까칠함이 도드라지는 특이한 이들이었다.
태건의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잘 되면 좋은 거고, 아님 마는 거고.’
사람 인연이라는 건 한치 앞도 모르는 거다.
그렇게 얼렁뚱땅 대화가 오가던 중이었다.
“애피타이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척. 척.
모양을 화려하게 갖춘 전채 요리가 제공됐다.
이제 메뉴를 바꿀 수도, 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태건은 가볍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며 말했다.
달그락.
“잘 먹겠습니다.”
“저희도 잘 먹, 먹겠습니다.”
때를 놓친 강주미와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코스에 맞춰 요리가 하나씩 제공 되던 중이었다.
스으윽.
강주미가 살금살금 계산대로 다가가 속삭여 불렀다.
“저기요. 저희 거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스윽.
몰래 챙겨온 신용카드를 슬그머니 건네기까지 했다.
그런데 직원은 받지 않았다.
미소 띤 얼굴로 똑같이 속삭여 말했다.
“남성분께서 결제하셨습니다.”
“네? 언제요?”
“조금 전에요.”
“아, 네.”
강주미는 얼떨떨한 얼굴로 돌아섰다.
휘릭.
그 순간 강주미는 갑자기 나타난 친구들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어?”
“어어?”
놀란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김채연이 얼른 강주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우린 그냥 분위기 좋은 곳으로 안내하려다 보니까.”
“정말 오빠가 그럴 줄 몰랐어. 네가 벌써 계산했니, 나중에 우리가 줄게.”
황유리도 눈꼬리가 축 내려가 미안함을 보였다.
그런 친구들을 본 강주미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벌써 오빠가 계산했대.”
“헙, 어떻게 해.”
“몰라, 일단 들어가자. 이렇게 다 나와 있는 건 이상하잖아.”
“으응.”
척척.
강주미와 친구들은 서로 어색함을 풍기며 움직였다.
같은 시각.
태건은 홀로 자리해 있었다.
강주미와 친구들이 간격을 두고 차례로 돌아와 앉았다.
“자리 비워서 미안.”
“실례했어요.”
“죄송해요.”
태건은 나이프로 안심을 썰다 부드럽게 물었다.
슥슥.
“항공사에 무슨 문제 있어?”
“에? 어, 어……. 아까 미팅한 거어얼……. 정리한 게 어딨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저런, 그래서 찾았대?”
“그그그, 그럼. 두는 데야 뻔하니까.”
강주미는 당황한 와중에도 말이 되는 핑계를 만들어 냈다.
그런 걸 보면 잔머리도 어느 정도 유전인 모양이었다.
태건은 어떤 미동도 없이 자연스레 권했다.
“얼른 먹어, 안심은 너무 식으면 맛없어져.”
“그럼. 머, 먹자.”
강주미는 친구들에게 권하며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풍성한 저녁식사였다.
그런데 태건은 그걸로 끝내지 않았다.
“간단하게 입가심으로 와인 한 잔 어때?”
“네. 그건 저희가 살게요.”
“무슨 소리. 오늘 내 밑으로 지갑 열 생각 마.”
찡긋.
태건은 익살 가득한 눈짓을 하며 장소를 옮겼다.
2차로 도착한 장소는 와인바였다.
“여기 보르도…….”
태건이 직접 고른 와인은 꽤 가격이 있는 거였다.
강주미와 친구들은 이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오빠, 괜찮아?”
“뭐가?”
“아, 아니야.”
“싱겁기는,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자연스레 대화를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친구들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저 여유는 진짠데…….’
‘퍼스트클래스 고객들이랑 비슷해.’
‘적당한 위트에, 예의도 좋아.’
‘태건 오빠랑 친하다고 자랑해야지.’
태건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아 보이자 강주미의 친구들도 걱정을 내려놓고 이 순간을 즐겼다.
태건에겐 동생과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었다.
근사한 식사 한 끼, 세련된 한 잔의 술.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하지 않나 속으로 걱정했다.
‘강남으로 뛸 걸 그랬나.’
강주미의 체면을 단단히 세워주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저 멋진 직업을 가진 인물로 만족이 되지 않았다.
멋진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그게 태건의 진정한 바람이었다.
‘매 순간 치열하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이기에 더욱 알차게 보내고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 모든 행동에는 그날 강주미와 약속이 녹아 있었다.
늦은 밤 오피스텔에 돌아온 태건이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물었다.
“오늘 좀 웃었냐?”
“뜬금없이 뭔 소리야?”
“후후. 자라.”
태건은 홀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 * *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이번 휴가는 짧았기에 태건은 더욱 알차게 꾸려갔다.
하루는 정연미와 치열한 데이트를 했고.
또 하루는 부모님의 선물을 사서 택배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강태영이 찾아와 삼남매가 오랜만에 모여 술 한 잔 기울이기도 했다.
물론 술자리의 안줏거리는 강주미였다.
“그때 주미가…….”
“어렸을 때 주미가…….”
오빠들의 짓궂은 놀림에 강주미는 얼굴이 뻘게지더니 결국 폭발했다.
“엄마, 아빠한테 이른다!”
“푸하하하!”
오빠들은 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간 각자의 일이 바쁘단 핑계로 조금 소홀했었다.
오늘 이 술자리를 빌어 모든 섭섭함을 털어냈다.
어렸을 때처럼, 철이 없지만 늘 똘똘 뭉쳐 지내던 그 시절의 삼남매로 다시 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였다.
복귀 날이 밝았다.
아침 식사 후, 태건은 작은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척. 척.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뭔 짐이 생겨.”
말만 그랬지 실상 책가방 하나 정도 양이었다.
괜히 투덜거린 한 마디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한 거였다.
강주미가 문틀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었다.
“…….”
얼굴 전체가 뭔가 뚱한 표정으로 가득했다.
이내 짐을 모두 챙긴 태건이 강주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심통 난 표정이야?”
“내가 뭘!”
“거울 줄까?”
태건이 짓궂게 묻자 강주미가 삐쭉거렸다.
“식충이 오빠가 간다니까 얼른 내보내려고 구경 중이다, 왜!”
틱틱.
강주미는 계속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런데 태건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간다니까 서운하냐?”
“서, 서운? 하, 가든가 말든가!”
휙!
퉁명하게 쏘아붙인 강주미가 문틀에서 벗어났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태건은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짜식.”
덩치만 컸지 어릴 때와 똑같았다.
깍쟁이에 떼쟁이였다.
강태영과 산으로 계곡으로 뛰어다닐 때면 자기도 데려가라고 떼쓰고 울던 모습이 지금도 훤히 그려졌다.
삼남매의 거국적인(?) 술자리 이후 예전 모습이 훨씬 도드라졌다.
잠시 후.
태건이 가방을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강주미는 소파에 두 다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쭈글쭈글한 모습이었다.
“…….”
입을 삐쭉 내밀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건은 그 모습만 봐도 귀여웠다.
“간다. 밥 잘 챙겨 먹고, 적당히 어지르고 살아.”
“잔소리 말고 빨리 가.”
“누가 누구한테 잔소리 타령이야.”
“빨리 가라니까.”
팩!
퉁명하게 쏘아붙인 강주미는 고개 돌려 외면했다.
그런 동생 모습이 태건의 발길을 붙들었다.
‘짜식, 마음 무겁게.’
스윽.
몸을 돌려 강주미에게로 향했다.
이내 가까이 다가선 태건이 강주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슥슥.
“아직도 애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손 안 치워?”
“이러면 마음 편안해진다며.”
“그건 어렸을 때고, 얼른 손 치우라니까.”
강주미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그런 목소리와 달리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얼마든지 태건의 손을 뿌리치거나 손길을 피할 수도 있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내심 즐기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그런 강주미에게 오랜만에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드니 간다며, 안전하게 잘 다녀와.”
“놀러 가냐, 일하러 가지.”
“다음에는 입원 소식 말고, 자랑스러운 소방관 같은 상장 받은 소식 전해줄게.”
“그러거나 말거나.”
강주미는 어째 한 마디도 좋게 하는 법이 없었다.
태건은 그럴수록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이제 진짜 갈게.”
“가라니까. 아직도 안 갔냐?”
“그래. 간다.”
처억.
태건은 거실에서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곧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끼익.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강주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더 아프단 소리만 들려 봐. 진짜 가만 안 둬.”
“그게 내 맘대로 되냐.”
“알겠다고 순순히 대답하면 어디가 덧나냐?”
삐쭉삐쭉.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투덕거렸다.
태건은 힐끗 돌아보며 무신경하게 손을 들었다.
“잘 살아.”
“빨리 가라니까.”
“간다니까.”
태건은 퉁명하게 대답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철컥.
그리고 승강기로 향하며 낮게 읊조렸다.
“우리 사이에 신파는 무슨.”
절대 어울리지 않을 모습이다.
이렇게 한결같이 이죽거리고 쏘아붙이는 게 훨씬 자연스러웠다.
태건은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철컹, 철컹.
“오랜만이네.”
그간 헬기 타고 현장 날아다니기 바빴다.
그래서 지하철이 어딘지 모르게 정겹게 느껴졌다.
태건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 속에 자리한 사람들의 모습이 제각각이었다.
휴대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쉬기도 했다.
늘 마주할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둘러보는 태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오늘도 무사히.’
모두가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이 순간이 태건에겐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