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182)화 (181/320)

182화

시간이 흘러 태건은 우면 훈련장에 도착했다.

처억.

주차장에 선 태건이 훈련장 건물을 크게 둘러봤다.

“자아, 다시 시작해 볼까.”

구구구.

일상의 여유로움을 벗어던지고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다시 시작될 출동 대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이내 숙소 문이 열리고 태건이 들어섰다.

끼익.

복도를 중심으로 6개의 쪽방이 존재했고 모두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커튼이 열렸다.

사락.

그리고 고수현이 고개를 내밀더니 태건을 발견하고 부산을 떨었다.

“어이고, 이게 누구야. 내가 우리 라텔에서 제일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우리 막내 강태건이 아아니야!”

“수현 선배, 증평 내려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갔다가 어제 왔지. 이번에 내려가서 수당 받은 걸로 애들하고 파티하고 왔다는 거 아니냐.”

처억.

고수현의 어깨가 태평양보다 넓게 벌어졌다.

맏이 노릇을 제대로 하고 온 모양이었다.

태건도 같이 미소 지었다.

“아이들이 엄청 좋아했겠네요.”

“그럼 이제 내 말이라면 끔뻑 죽지. 그보다 우리 태건이는 잘 쉬다 왔어?”

“그럼요.”

“쉬는 동안 어디 아픈 데는 없었고? 가방, 이리 줘.”

스윽.

살갑게 다가온 고수현이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너무 과한 친절에 태건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뭡니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기는. 나 알지? 우리 라텔 6인방 중에 네가 가장 잘 따르고 좋아하는 형이 누군지 알잖아. 그치?”

“제가요? 고 선배를 요?”

띠용.

태건은 처음 듣는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무엇보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다른 커튼이 열리며 황대산이 듬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촤락!

“오오, 강태건이. 잘 쉬다 왔어?”

“네. 대산 선배도 일찍 오셨네요.”

“으허허. 조금 전에 왔지. 네가 이렇게 바로 뒤따라 도착할 줄 알았다면, 요 앞에서 만나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들어오는 건데 말이야.”

“선배랑 저랑 차를 마신다니, 왜요?‘

태건이 묻자 황대산이 다가와 굵은 팔을 떡하니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터억.

“왜냐니, 우리 사이에 차 한 잔 마시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는데요.”

“앞으로는 많아야 되지 않겠냐. 그보다 여기서 지내는데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지금 많이 불편합니다.”

태건이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 순간 황대산의 시선이 엉뚱하게도 고수현에게로 향했다.

“고수현이, 어디 갈데 없냐, 우리 태건이가 불편하다잖아.”

“제가 아니라 선배가 불편하다는 거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야. 화끈하고 남자다운 우리 태건이가 나를 불편해하다니, 너야, 너.”

“태건이 어깨 내려앉겠습니다. 그 팔부터 좀 치워요. 얼마나 무거우면 부담까지 느끼겠습니까.”

으르렁.

황대산과 고수현이 느닷없이 서로를 디스했다.

태건은 돌아가는 상황이 전혀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이제는 궁금함이 싹틀 지경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이지성이 들어왔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고 있는 걸 보니 이제 도착한 모양이었다.

단원들 중에 가장 이성적인 그의 등장이 태건은 내심 반가웠다.

“지성 선배, 오셨습니까.”

태건이 먼저 인사함과 동시였다.

표정 하나 없이 차가운 이지성은 태건을 본 순간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이게 누구야. 우리 태건이잖아.”

“……선배, 웃어요? 왜 웃습니까. 징그러우니까 억지로 웃지 마요.”

“억지라니. 난 널 보면 늘 기분이 좋아.”

“처음부터 지금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안 든다면서요.”

태건이 어이가 없어 반박했다.

이지성이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별 소리를 다했네. 그때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랬던 거니까 잊어버려.”

“절 볼 때마다 그랬으면, 절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오해 아닐 텐데요.”

“처음 이 훈련장에서 식사할 때 혼자 먹는 내 앞에 네가 다가온 순간부터 호감이 있었어.”

빙긋.

이지성이 미소를 지었다.

워낙 딱딱한 얼굴이라 미소가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런 그의 반색에 태건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지 마요. 저 진짜 지금 간이 철렁철렁 합니다.”

삭삭.

팔까지 쓸며 질색했다.

그런 태건의 모습에 황대산이 얼른 나서서 이지성을 구박했다.

“이지성이, 조용히 곱게 들어올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태건이에게 시비야!”

“맞아. 너 태건이 별로 안 좋아한다며. 나한테 그랬잖아.”

사삭.

고수현이 얼른 황대산의 옆에 서서 같이 몰아붙였다.

이지성은 연합한 둘의 모습에 콧방귀를 뀌었다.

“하, 바로 그렇게 둘이 붙어먹네. 그런다고 태건이가 눈길이라도 줄 거 같습니까?”

“너 말 다했냐?”

“덜 했습니다. 멀쩡한 사람 음해하지 맙시다. 내가 가장 가능성이 높아서 질투하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하라고요.”

이지성이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그 순간 고수현이 발끈했다.

“야, 얼굴로 보나 뭐로 보나 내가 훨씬 가능성이 높지!”

“무슨 소리. 남자는 자고로 이렇게 근육이 있어야 여자들이 듬직하다고 느끼는 법이야.”

황대산까지 목소리 높여 자신을 어필했다.

가만히 들어보던 태건은 그제야 눈치 챘다.

병원에서 강주미를 만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였다.

‘감히 내 동생을?’

태건은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다들 동작 그만, 이 사람들이 감히 누굴 넘봐.”

“…….”

선배들 모두 멈칫하며 바라봤다.

태건은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더 강렬한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내 눈에 불이 들어와도 그럴 일 없으니까 다들 꿈 깨고 현실로 돌아옵시다.”

“사람 일은 그렇게 속단하는 게 아니야. 쉬면서 주미 씨랑 내 얘기한 적 있잖아. 그치?”

“아니요.”

태건이 딱 잘라 답하자 고수현이 심히 당황했다.

“어, 없어? 한 마디도?”

“단 한 마디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이 퍼펙트한 얼굴을 보고도 아무 말도 안 할 리가 없잖아.”

고수현이 자존심이 박살나 당황했다.

그 순간 황대산이 얼른 나서서 물었다.

“그럼 내 얘기를 했을 거야. 그 남자다운 선배가 누구냐고 물었겠지. 안 그래?”

“네. 안 그렇습니다.”

“…….”

황대산은 너무 단칼에 거절당해 입만 벙긋거렸다.

사삭.

이지성이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며 자신을 내보였다.

“역시 이 중에서는 나밖에 없겠지. 네가 생각해도…….”

“지성 선배는 절대 아닙니다.”

태건의 대답이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

그 순간 이지성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더니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야, 꺼져.”

“자기만 동생 있나.”

“나 원 참. 세상에 여동생 있다고 유세 떠는 놈은 처음 보네.”

황대산과 고수현의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전보다 더 싸늘하고 퉁명하게 느껴졌다.

선배들의 급격한 변화에 태건은 어이없이 바라봤다.

‘이래도?’

눈빛을 굳히며 휴대폰을 꺼내 조작했다.

슥슥.

조용히 뭘 찾는 사이였다.

선배들은 그런 태건의 모습조차 이젠 아니꼽게 보이는지 툭툭 시비를 걸었다.

“어디 선배들이 말하는데 휴대폰을 깔짝거려?”

“여동생이 좀 예쁘면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니가 뭔데 여자 친구하고 여동생을 다 가지고 있어. 야, 강태건. 야!”

선배들의 시비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때 태건이 그들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척.

액정 속에는 김채연과 황유리의 매력적인 사진이 꽉 차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진인지 화질이 끝내줬다.

그래서 그녀들의 미모가 선명히 살아있었다.

태건은 사진을 무기로 내밀고는 나지막이 덧붙여 말했다.

“제 동생 친구들입니다. 특수소방단 팬이고 남자친구도 없다네요.”

“어, 어어?”

“한 번 초대할까 했는데……. 아님 말고요.”

스윽.

태건이 말을 바꾸며 휴대폰을 회수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터더덕!

선배들이 앞다퉈 휴대폰을 붙들며 절절히 사과했다.

“태건아, 내가 제일 아끼는 내 동생!”

“어이쿠, 오해했구나. 너한테 한 말이 아니라 지성이한테 한 말이었어.”

“내, 내 연기가 좀 리얼 했지. 하하.”

그런 그들을 향한 태건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후후. 게임 끝.’

당연히 태건의 승리였다.

누릴 기회가 찾아왔으면 누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태건의 태도가 살짝 거만하게 바뀌었다.

“아, 목이 좀 마른데…….”

“예이!”

사삭.

“가방이 무거운데…….”

“내가 들게, 내가.”

삭.

태건의 한 마디에 선배들이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어느새 태건은 라텔의 왕이 되어 있었다.

“후후. 이게 권력의 맛이었어.”

물론 진심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

그건 태건의 생각일 뿐, 만년 솔로인 선배들은 안타깝게도 진심이었다.

*  *  *

오후 무렵.

태건은 훈련장 앞에 나와 있었다.

“곧 오신다더니.”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중얼거린 그때였다.

부웅.

차 한 대가 우면 안전센터를 지나 훈련장 쪽으로 올라왔다.

이내 중형차 한 대가 근처에 멈춰 섰다.

태건은 처음 보는 차였다.

“누구지?”

의아해할 무렵,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그 중 한 명은 오광휘 단장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30대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태건은 낯설어야할 상대를 한 눈에 알아봤다.

결혼사진으로 봤던 오광휘 단장의 전 부인이었다. 사진 속 아담하고 오밀조밀한 모습 그대로였다.

“헙, 업, 크흠.”

괜히 태건이 낯설고 어색해했다.

그때 트렁크가 열리고 오광휘 단장이 손짓했다.

“막내야. 거기서 뭐하냐, 짐 내려야지.”

“네? 아, 네.”

얼떨떨한 태건이었지만 일단 다가갔다.

척척.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건 아니다 싶었다.

본인 짐을 들어달라고 부르다니.

너무도 뻔뻔한 그의 지시에 태건은 살짝 기분이 상하려 했다.

그런 불편함은 잠깐이었다.

트렁크 속 짐을 본 태건은 입이 꾹 다물어졌다. 오광휘 단장의 집에 두고 온 본인의 짐인 탓이다.

“으쌰.”

때마침 오광휘 단장이 하나 들어 올리자 태건이 얼른 넘겨받으며 말했다.

“이리 주십시오. 제가 들겠습니다.”

“그럼 당연히 니가 들어야지.”

“그, 그러게요.”

턱. 턱.

태건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종이상자들을 하나씩 옮겼다.

대부분 계절 옷이라 부피만 클 뿐 무겁지는 않았다.

태건이 짐 상자를 빼는 사이였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제 정리 다 된 거지?”

“그래. 진짜 끝이야. 모두 끝났어.”

“시작도 말았어야 했어.”

쌔앵.

시베리아 벌판도 저기보다는 따뜻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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