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잠시 후.
부웅.
중형차가 떠나갔다.
그리고 태건의 발밑엔 짐들이 쌓여 있었다.
…….
태건은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어색함을 깨고 오광휘 단장이 먼저 입을 뗐다.
“누군지 알지?”
“뭐, 크흠. 그런데 짐은 천천히 빼도 된다고 하시더니요.”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 아파트 팔았어.”
오광휘 단장의 대답이 너무도 덤덤했다.
반면 태건은 멈칫했다.
“그 집…….”
“그래, 신혼집이었지. 엑스와이프가 진작 팔자고 했는데 내가 붙들고 있었어, 공동명의란 명목이 마지막 끈이었거든.”
“저는 잘 모르는 일이라. 크흠. 들어가시죠.”
스윽.
머쓱한 태건은 허리 굽혀 짐 상자를 들려 했다.
그때 오광휘 단장의 씁쓸한 목소리가 울렸다.
“왜 이혼했는지 늘 궁금했지?”
“…….”
우뚝.
태건이 허리를 굽힌 그대로 굳어졌다.
오광휘 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직하게 말했다.
“집안 반대가 엄청 심했어. 그래도 사랑으로 극복하자고 결혼했지. 그런데…….”
“힘들면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후우. 시작은 좋았어. 그런데 낮이고 밤이고 호출 받고 뛰어나가는 내 모습에 서서히 지쳐가더라.”
“…….”
태건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오광휘 단장은 하소연하듯 훌훌 이어서 말했다.
“어느 날 현장 정리하는데 전화가 왔어, 응급실이라고.”
“응급실이요?”
“유산이라더라. 엑스와이프도 임신한 줄 몰랐대, 자각하기도 전에 그렇게 된 거였어.”
“아…….”
태건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뭔가 생각을 하려는 찰나 오광휘 단장이 먼저 말했다.
“많이 힘들어했어. 그 시간이 길어지다 결국 끝이 난거지.”
“…….”
“아까 그러더라. 그때 가장 힘들었던 건 아픈 몸이 아니라, 그런 자신을 두고 현장으로 달려간 내 모습이었다고 말이야.”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태건은 쉽사리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오광휘 단장은 개의치 않고 다음 말을 꺼냈다.
“금산T타운에서 매몰됐던 임산부…….”
“이혜진 씨요.”
“그래. 이혜진 씨, 그때 하필 엑스와이프가 오버랩 됐었어. 타이밍도 참.”
“그날, 그 일 때문이라면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태건은 최대한 정중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오광휘 단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쓰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냐.”
“그럼 저랑 연미 때문이십니까?”
태건이 계속 언급하던 문제를 들춰봤다.
스윽.
오광휘 단장이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진도 나가지 말란 거지, 그냥 결혼하지 말란 소리는 아니었어.”
“그건 제가 오해했네요.”
“지금 난 내가 라텔에 집착하는 이유를 말하는 거야.”
“…….”
태건이 조용히 바라보자 오광휘 단장이 가볍게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척.
“조금이라도 현장이 빨리 정리되고,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면……. 늘 가슴 졸이는 우리네 가족들도 조금은 안심하지 않을까.”
“물론입니다.”
“잘 쉬고 와서 청승 떨어서 미안하다. 진짜 끝이 나니까 나도 모르게 센치해졌던 모양이야.”
툭툭.
오광휘 단장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거뒀다.
그 순간 태건은 그의 무거운 눈빛을 봤다.
품고 있는 남다른 각오가 엿보였다.
태건은 새삼스럽지만 적잖이 놀랐다.
‘뭔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속사정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늘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옆집 형과 같은 모습만 보여줬던 탓이다.
한편으로는 뒤통수를 맞은 거 같기도 했다.
그런 판단은 이내 접었다.
왜 오광휘 단장이 라텔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 다시금 확신을 굳힐 수 있었다.
‘내가 아플수록 남을 더 보듬을 수 있는 사람.’
그게 오광휘 단장이었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훈련장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얼른 들어가자, 애들은 다 왔냐?”
“단장님. 좀 도와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응. 아니야. 혼자 날라.”
척. 척.
오광휘 단장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훈련장으로 쏙 들어갔다.
순간 태건이 뚱한 표정으로 변했다.
“스토리 끝이 왜 이래.”
턱.
투덜거린 태건은 짐 상자를 들고 뒤따랐다.
바로 그때 자동차 한 대가 훈련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끼익.
“어이, 강태건이. 혼자 뭘 나르고 자빠졌어!”
창문이 내려가고 유중헌의 거친 언사가 들려왔다.
그를 본 태건의 눈빛이 반짝였다.
“선배, 기다렸습니다!”
태건은 자신을 도와줄 단원이 넝쿨째 굴러들어오자 세상 가장 환한 미소로 반겼다.
* * *
다음날.
라텔 모두가 사무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선이 전부 오광휘 단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사무실 전화기를 들고 통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라텔.”
탈칵.
이내 수화기를 내린 오광휘 단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푸우우.”
“…….”
그런 분위기가 처음이라 모두가 긴장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일이 꼬였나?’
태건은 김을영 소방차장의 약속이 어긋나지 않았나 억측까지 됐다.
그때였다.
터엉!
오광휘 단장이 거칠게 책상을 내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모두 주목!”
번뜩!
날카로운 눈빛이 가득 빛났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현 시간부로 이곳 우면 훈련장은 ‘특수소방단 본부’로 변경됐다.”
“…….”
“그리고 우리 특수소방단은 차장님의 직속으로 이관되었으며, 또…….”
오광휘 단장의 말이 장황해지려 했다.
첫 마디로 눈치 챈 태건이 슬쩍 끼어들었다.
“단장님, 짧게 하시죠.”
“까짓것 세세한 건 나중에 따지고, 이것만 알면 된다.”
“…….”
“현 시간부로 청장님을 제외하고 우릴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쿠구궁!
오광휘 단장이 박력 넘치게 외쳤다.
모두 소망하던 그 일이 끝내 이뤄졌다.
자신들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검은 손길을 전부 차단한 순간이다.
벌떡.
단원들은 두 손 번쩍 들며 환호했다.
“이야하아, 호오!”
“고로췌!”
“됐어. 이제 됐어!”
“아자자자잣!”
쿵, 쿵, 쿵.
발을 구르고, 책상을 두드리며 기쁨을 한 가득 표현했다.
며칠 후.
독립의 기쁨이 가시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런데 사무실에 자리한 단원들은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으아악, 뭐 이렇게 할 게 많아!”
오광휘 단장이 모두를 대신해 아우성쳤다.
독립이란 사소한 일처리까지 모두 자체적으로 해결한단 걸 의미했다.
예산 편성은 기본이었다.
그 예산으로 출동부터 시작해 사무용품 구매까지 처리해야 했다.
숫자와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닥친 숫자들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외에 각종 계획서도 작성해야 했다.
월간, 분기, 연간 기획서.
훈련 및 교육 계획안.
교보재 구매 및 사용 내용 등등.
각종 서류에 치이다 못해 말라갈 지경이었다.
견디다 못한 태건이 벌떡 일어나 강하게 항의했다.
터엉!
“계속 이런 거 시키면, 저 확 잠수 탑니다!”
“맞습니다. 출동해도 모자랄 시간인데요!”
“물론 지원요청이 아직 없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뒤따라 선배들이 힘을 실어줬다.
그런 모두에게 오광휘 단장이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어떤 새끼가 독립하자고 했어.”
“…….”
사사삭.
선배들은 망설임 없이 일제히 태건을 가리켰다.
바로 배신한 선배들의 모습에 태건이 크게 움찔했다.
“같이 한 거 아니었습니까?”
“응. 네가 먼저 말했고, 우리는 따랐을 뿐이야.”
“……와. 진짜 너무하네.”
태건은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했다.
오광휘 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건을 협박했다.
“다음 주까지 해결방법 찾아내. 못 찾아내면 네가 다 할 줄 알아.”
“으앗,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네가 한 말이니까 책임도 네가 져야지!”
“같이 했다니까요!”
태건은 길길이 날뛰며 항변했다.
그러나.
“…….”
모두가 외면하며 태건에게 떠넘겼다.
태건은 졸지에 사무직으로 돌아설 위기에 봉착했다.
“미치겠네!”
머리를 쥐어뜯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선배들은 벌써부터 희희낙락이었다.
“역시 태건이가 일을 참 잘해.”
“불을 잘 끄더니, 우리 속에 들끓는 불도 잘 끄네요.”
“이래서 라면, 라면 하나 봅니다.”
태건에게 떠넘기는 걸 아예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태건이 머리 아파할 때였다.
끼익.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이런, 이게 어떻게 사무실인가. 대기 장소로 바꾸도록 하지.”
들어서자마자 개선안부터 말했다.
그런 그를 본 모두가 멈칫하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님!”
모두가 놀라 외친 그는 박규영 차장부속실장이었다.
박규영 실장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 아니고, 본부장이야.”
“네?”
“제대로 다시 소개하지, 오늘 발령 받은 신임본부장이야.”
투둥.
박규영 실장 아니, 본부장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 소리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헉!”
“악!”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는 소방차장의 심복이다. 더군다나 부속실의 실장이다.
최측근인 그가 본부장으로 취임했다는 건 그만큼 힘을 실어준단 의미였다.
그런데 찾아온 이들은 박규영 본부장만이 아니었다.
우르르.
열린 문으로 십여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
처억.
모두 오와 열을 맞춰 반듯하게 섰다.
박규영 본부장이 그들을 가볍게 가리키며 물었다.
“행정팀을 꾸려왔는데 어떤가, 같이 일할 맛이 나겠나?”
그 소리에 라텔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행정팀이 갖춰지면 이 모든 머리 아픈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 어어?”
“우와.”
다들 순식간에 팍팍 진행되는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사사삭!
자리를 박차고 박규영 본부장에게 달려가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태건이었다.
“본부장님!”
“으음?”
“충성을, 정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억!
태건은 거침없이 다가가 손을 붙들고 감사를 표했다.